CAFE

[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26화 < 중국 하늘에서 벌어진 전쟁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8.20|조회수770 목록 댓글 1

30년대 장개석이 군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공군력의 확충이었습니다. 그는 30년대 초반 상해사변과 열하사변, 장성에서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중폭격에 중국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보면서 근대전에서 제공권의 확보와 공군력의 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열강들이 공군을 한낱 육군의 지원부대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29년 11월에 장개석은 이미 정식으로 공군을 육군에서 독립시켜 육해군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는 본인이 항공위원회 위원장을, 비서장으로 자신의 와이프인 송미령을 임명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공군력의 건설과 전투기 500대, 파일럿 1천명의 확보를 목표로 합니다.

 

상해사변 이후 송미령은 남편의 대리로서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해외 각국에서 적극적으로 비행기를 구입하고 공군고문과 파일럿, 기술자, 훈련교관의 확보에도 나섭니다. 또한, 이를 위해 연간 국방예산의 30~40%를 공군력 육성에 배정합니다. 이 시기는 강서성과 안휘성에서 대규모 공산당 토벌작전로 인해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때였죠. 그만큼 장개석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공군력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국의 급격한 공군력 확장에 대해 일본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항공기의 수입과 함께 자체적인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3곳의 항공기 제조창과 6곳의 항공기 수리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항주와 낙양, 광주에 비행학교를 설립하였고 항공기 정비사의 교육을 위해 별도로 남창에 중국항공기계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 그외에도 지방 군벌들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군관학교에서도 비행학과가 있어 소수의 비행사를 배출하였으며 연안의 공산군 역시 37년말 신강성 우루무치에 있는 신강항공학교에 43명의 훈련생을 입교시켰고 이들은 30년대 내전당시 국민정부군에게서 노획한 몇대의 비행기를 운용함으로서 이후 인민해방군 공군의 근간이 됩니다.  

 

이런 노력으로 30년대 초반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당시 중국공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송미령의 요청으로 한시적으로 공군 자문으로 왔던 센놀트가 "중국공군이 서류상 500대이나 실제로는 91대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나 이는 상당히 축소된 것이라는 견해가 통설이며 하응흠의 회고록에 따르면 총 9개 대대 26개 중대(사령부 : 남창)에 기체는 300여대에 700여명의 파일럿을 보유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미국 커티스사의 "커티스 호크-III". 33년부터 생산된 이 기체는 엔진마력 770hp에 최고속도 362km/h, 항속거리 1,167km, 7.62mm 기관총 2정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공군의 훈련 상태는 천차만별이었는데, 센놀트는 노구교사변 직전 이탈리아인 교관이 맡고 있던 낙양의 비행학교 초급과정에서 훈련생들의 비행을 참관하면서 "아주 좋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서 이착륙하던 13대중 6대가 파괴되었다"라고 매우 실망하기도 했으나, 미국인 교관이 훈련한 항주의 중앙항공학교는 훈련이 매우 엄격하여 정원 400명에서 실제 입학을 허락받은 사람은 150명, 최종 졸업자는 그 중에서 겨우 30~50%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6년 서방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연안을 방문한 에드가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모택동은 "인민전쟁"을 강조하며 "비행기와 전차따위는 장개석의 값비싼 장난감에 불과할뿐"이라고 혹평하였고 센놀트 역시 "중국공군은 구제불능이며 날아다니는 사격 표적에 불과하다"라고 했으나, 중일전쟁 초반 이들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매우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물론 상해전투에서 일본군 제3함대를 수차례 공습했으나 명중탄은 제로였고 오히려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는 점에서 그들의 폭격 실력이 상당히 형편없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대신 치고 빠지기식의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일본 해군항공대의 주력전투기인 96식 함상전투기의 항속거리가 짧은 것을 이용해(1,200km) 전투기의 엄호없이 비행하던 일본군 폭격기들을 습격하는 전술로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들은 결코 "귀족도련님"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희생으로 일본군의 제공권 장악에 어느 정도나마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초반 일본 해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96식 육상공격기. 35년부터 배치되어 최대속도는 348km/h, 7.7mm 기총 3정, 최대 폭장량은 800kg이었으며 특히 항속거리가 4,550km에 달하여 광활한 중국 대륙 곳곳을 전략 폭격하였습니다. 41년 12월 10일에는 영국 동양함대의 프린스오브웨일즈와 레펄즈를 격침시켜 처칠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죠. 그러나 방어력이 매우 빈약하여 적기의 공격에 취약했으며 한구, 중경, 난주 상공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중국 공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기체들이 격추당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naljava69/60152871180  

 

중국 공군의 커티스 호크-3 전투기가 96식 육상공격기를 격추하는 것을 묘사한 일러스트

※ 사진출처 : http://joshinweb.jp/hobby/11652/4544032690854.html

 

37년 8월 21일 중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됨과 함께 소련은 중국군을 위해 대규모 군사 원조를 시작합니다. 장개석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항공력에 중국군이 큰 피해를 입고 있으며 무엇보다 공군력의 재건이 급선무라며 항공기와 파일럿, 훈련교관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소련의용비행대가 결성되어 37년 10월부터 스페인내전의 에이스였던 리차코프소장이 지휘하는 2개 비행대대(I-16 31기, SB-2 31기)를 비롯해 전투기 155대, 폭격기 62대, 연습기 8대와 파일럿, 훈련교관, 지상요원 등 447명이 신강성을 통해 중국으로 입국합니다. 또한 사천성 성도와 제5전구 사령부가 있는 호북성 노하구에 비행학교를 설립하여 중국 공군을 상대로 비행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중-소 연합공군의 첫번째 출격은 남경이었는데, 소련인 파일럿들이 조종하는 I-16 23대와 SB-2 20대가 37년 12월 1일 남경비행장에 착륙후 남경을 향해 쇄도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고 남경을 폭격하는 일본기에 맞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입니다. 남경 함락후에는 남경의 일본군에 대해 수차례 폭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소련이 파일럿과 전투기를 제공하자 일본도 이를 모를리가 없었고 소련대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했으나 소련은 "우리는 파일럿을 보낸 사실이 없다"라고 딱 잡아땝니다. 

 

 

한구비행장에서 소련파일럿들과 SB-2폭격기

 

 

청천백일마크를 단 소련제 I-16전투기

 

중국공군은 본격적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소모된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일본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갑니다. 37년말까지 쌍방의 피해에 대해 중국측은 144기 상실에 대해 일본기 129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한 반면,  일본측은 241기 격추에 17기를 상실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쌍방의 전력 차이와 훈련 수준을 고려했을때 양측이 거의 호각이었다는 중국측 기록은 믿기 어렵지만 반대로 일본 역시 전과를 과장하고 피해를 축소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점에서 "너무 미숙해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센놀트의 말과 달리 당대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추고 있던 일본 해군항공대를 상대로 중국 공군이 상당히 선전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전쟁기간 내내 중국 공군은 일본의 전략 폭격에 대항해 요격전을 펼침과 함께 동계 공세를 비롯한 주요 전투에서 지상군에 대한 지원을 수행하였습니다. 

   

38년 2월 23일에는 소련 의용대대의 포이닝 대위가 지휘하는 SB-2 폭격기 28기가 대만의 송산비행장을 공습하여 활주로에 주기되어 있던 일본기 40대를 격파했으며(이에 대해 일본측은 단 한대도 파괴되지 않았고 주변의 민가에 폭탄이 떨어져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4월 29일 무한 상공의 전투에서 일본기 46기가 공격하자 소련 조종사를 포함한 60대의 중국 전투기가 출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이 공중전에서 중국은 일본기 21기를 격추하고 9기를 상실했다고 주장하였고 일본은 51기를 격추하고 4기를 상실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무한 전역 전체에서 쌍방의 피해는 일본이 56기를, 중국은 40기를 상실합니다. 

 

9월에는 SB-2 폭격기 2대가 남큐슈까지 날아가 "평화"를 외치는 100만부의 선전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42년 4월 두리틀 폭격대가 동경을 공습하기 3년 7개월이나 빠른 것으로 일본 본토가 적기의 침입을 당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출격에 대해 김구선생의 비서였던 해암 안병무 선생은 "삐라가 아니라 폭탄을 떨어뜨렸어야 했다."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하였습니다. 38년 10월 한구 함락후 한구 비행장에 대해 수차례 대규모 공습을 실시하여 50~60기의 비행기를 파괴하고 제1연합항공대 사령관 츠카바라 니시조 소장에 중상을 입혔습니다.

 

츠카바라 니시조(1887~1966) : 최종계급 해군 대장. 해군병학교 36기 출신으로 중일전쟁 초반부터 해군항공대를 지휘하였고 39년 10월 한구에서 중소연합공군의 폭격으로 중상을 입어 한동안 병원 신세였다가 태평양전쟁 발발후 제11항공함대를 맡아 말레이해 해전에서 영국 동양함대를 괴멸시키고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레펄즈를 격침시킵니다. 42년 12월 항공본부장이 되었고 45년 5월에는 해군 대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미 전쟁 말기로 패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지라 그의 승진이 곧 "최후의 해군대장"이 되었습니다.

 

무한 작전이후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일본은 병참의 문제와 중국군의 저항으로 더이상 깊숙히 진격할 수 없자 장기전략으로 전환합니다. 대본영은 38년 12월 2일 중지나방면군에 대해 "항공격멸전"을 지시하고 항공 폭격으로 중국의 중심부를 파괴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38년 12월부터 중경, 성도, 서안, 난주, 낙양 등 내륙의 대도시들과 주요 비행장에 대한 대규모 전략 폭격이 시작됩니다. 특히 주요 목표는 중국의 임시수도인 중경과 소련 의용비행대의 기지인 난주였는데 38년 12월부터 39년 3월까지 4개월동안 중경에 4회, 난주에 3회 등 총 27회의 전략 폭격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중소 연합공군의 반격으로 방어력이 취약한 일본 폭격기들(주로 97식중폭격기, 3식중폭격기와 이탈리아제 BR.20로 구성)은 난주에서만도 5기가 격추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고 동계기간의 중경에 대한 폭격은 안개가 많은 중경 특유의 기상조건으로 인해 실패합니다. 

 

이탈리아 공군의 주력 폭격기였던 피아트사의 BR.20 경폭격기. 2차대전중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기체였지만 적어도 일본의 주력폭격기였던 97식 중폭격기보다는 폭장량, 속도, 항속거리, 방어력 등 모든면에서 월등히 능가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이탈리아로부터 총 85기를 수입하였고 "伊식100형重폭격기"라는 이름을 붙여 중국전선에 투입하였습니다. 피아트사는 일본외에도 스페인, 헝가리, 베네주엘라 등에도 수출합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일본의 본격적인 중경 공습은 39년 5월 4일부터 시작되어 무방비 상태였던 중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힙니다. 사실 38년 초부터 몇차례 폭격이 있기는 했어도 주로 비행장과 군사시설에 국한되어 있었고 최일선으로부터 800km나 떨어진데다 안개와 잦은 비, 험준한 산맥이 천연의 장애물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대공방어가 매우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단지 외곽에 소수의 대공포가 배치되어 있었을뿐이었죠. 따라서 중경 시가지에 대한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중경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심지어 장개석은 중경도 안심할 수 없다며 보다 내륙인 성도로 수도를 이전할 것까지 고려하기도 하였습니다. 

 

40년부터 중국 공군은 갈수록 상황이 악화됩니다. 39년 9월 일소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유럽의 정세가 급변하면서 스탈린의 관심사도 극동에서 유럽으로 이동하였고 그로 인해 소련의 원조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죠.  

 

일본은 중경에 대한 대대적인 전략폭격과 함께 중국의 공군력을 완전히 일소하겠다는 이른바 "오지항공공격작전(101호작전)"을 발동하여 전 공군력을 총동원해 40년 5월 17일부터 9월 4일까지 중경을 비롯한 대도시와 주요 비행장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전개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중경대폭격"의 시작이었습니다.  

 

원래 20만에 불과했던 중경은 피난민들로 100만까지 늘어나 있었고 맨하튼 크기만한 장소에 빽빽하게 밀집한 건물의 대부분은 화재에 취약한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폭격기들이 소이탄을 퍼붓자 것잡을 수 없이 화재가 중경 전체로 퍼졌습니다. 일본군은 1회 출격때마다 약 100대의 폭격기가 투입되었는데 라이프지의 기자 칼 마이던스는 "어떤 도시도 일찌기 당한 적이 없는 맹폭격"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목표는 중경 시가지 전체였으며 2/3가 파괴되었고 5천명이 사망합니다. 물론 중국 공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서 일본군 폭격기들도 최소 16기가 격추되었고 다수가 피격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이 점령한 비행장으로부터 중국 내륙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전투기의 엄호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국민당 중앙당사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런데 이런 상황이 8월부터 역전되었는데 바로 "0식함상전투기", 이른바 제로기의 등장이었죠. 진주만 기습부터 태평양전쟁 전기간동안 남방전선을 누비며 미해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제로기는 최대 항속거리가 무려 3천km에 달했으며 속도와 화력 모든 면에서 중국 공군의 주력인 소련제 I-16을 완전히 능가했습니다. 40년 8월 19일 일본군의 최일선인 의창 비행장에서 96식 함상공격기와 제로기 편대 약 200대는 중경과 중국 공군을 습격하여 그야말로 초토화시킵니다. 중국 공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제로기의 위력은 압도적이었고 9월 13일 중경상공에서 벌어진 I-16 27기와 제로기 13기의 공중전에서도 중국공군은 2배의 숫적 우세에도 괴멸됩니다. 

 

한때 중국 대륙과 태평양을 자신의 독무대마냥 누볐던 0식 함상전투기. 최고 속도 560km/h에 항속거리는 무려 3100km에 달했고 날렵한 기동력과 20mm 기관포 2정은 당시로서는 매우 강력한 화력이었습니다. 진주만이래 태평양전쟁 초기 미해군은 제로기를 상대로 1:1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했을 정도였으나 헬켓이 등장하면서 "날으는 사격표적"으로 전락하였고 44년 이후에는 가미가제 신세가 됩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read0596/10022976  

 

4개월간의 공습에서 중경에는 1만발(150t)의 폭탄이 떨어졌으며 장개석의 거처도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폭격이 끝난후 초토화된 중경 시가지를 보면서 자신의 일기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후세의 국민들은 오늘 자신들의 부모가 당한 역사상 미증유의 고난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중경폭격은 38년 2월부터 43년 8월까지 장장 5년 5개월간 지속되어 "가장 오랫동안 폭격을 받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런던 폭격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훨씬 좁은 지역에 인구가 밀접한 도시에 총 218회의 공습에 3천톤의 폭탄이 떨어졌고 중국측 추산으로는 11,8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공습 초반에는 중경 시민들은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좁은 장소에 많은 군중들이 몰려 질식하거나 압사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방공태세도 강화되었고 따라서 피해도 줄어들었습니다. 일본 역시 41년말부터 태평양전선으로 대부분의 항공력을 전환하였고 게다가 미 제14공군이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중국 상공의 제공권이 역전되자 일본도 43년 8월을 마지막으로 전략폭격을 완전히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또한 중국 공군도 180기를 상실하여 사실상 괴멸상태가 되었으며 40년말 잔존기는 겨우 65기에 불과했습니다. 제로기의 등장은 중국 공군이 더이상 일본 폭격기의 요격을 시도하는 것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전력 보존을 위해 전투를 회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상공은 일본의 독무대가 되었죠. 

 

장개석의 첫번째 부인이자 장경국의 어머니인 모복해(중간). 왼쪽이 장경국. 장개석이 4번째 부인인 송미령과 결혼하기전 이미 그녀와는 오래전에 이혼상태였지만 여전히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성 봉화현 계구의 옛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무차별 폭격은 장개석의 고향도 예외가 아니었고 39년 12월 일본군의 공습을 받아 그녀 역시 사망하였습니다.      

 

여기다 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은 대중원조 중단을 선언하였고 의용비행대도 완전히 철수합니다. 소련은 37년부터 41년까지 총 1,250대의 각종 항공기와 2천여명의 인원을 제공하였고 이중 200명이상이 전사하였습니다. 그들의 정확한 전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38년부터 40년까지 총 50회의 작전에서 81기 격추, 지상격파 114대, 함선 14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이렇듯, 소련의 원조도 격감한데다 중국 공군은 기체도 부족하고 파일럿 부족은 더욱 심각하여 더이상 일본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통상 파일럿 1명을 제대로 육성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3~4년의 훈련기간이 필요한데 그럴 시간도, 이들을 훈련시킬 교관도 턱없이 부족했죠. 그런데 40년 9월 일본의 삼국동맹 체결과 북부인도차이나 침략으로 본격적으로 남방진출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자 미일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미, 영은 중국에 대한 지원을 강화합니다.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었던 중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천우신조였죠. 

 

장개석은 루즈벨트에게 일본의 전략 폭격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공군력의 지원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친서를 보냅니다. 루즈벨트는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는 미의회를 고려해 직접 개입 대신 41년 4월 5천만달러의 차관을 공여하여 미국이 영국에게 P-40 워호크 전투기 100대를 판매하고 다시 중국이 이 돈으로 영국에게 구입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플라잉타이거스의 주력기였던 P-40 워호크. 41년 3월 미의회에서 "전시무기대여법", 이른바 "랜드리스법"이 통과되었고 당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영국에 5월부터 본격적으로 군함과 전차, 전투기 등 대량의 물자가 지원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초기 미육군항공대 주력인 P-40은 방어력과 화력은 그런대로 우수했으나 전반적인 성능에서 도저히 독일의 BF-109이나 제로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영국과 소련은 받고도 투덜거렸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당시 장개석의 공군 자문으로 곤명에서 중국 공군의 훈련을 맡고 있던 센놀트는 전투기외에도 파일럿의 확보가 시급하며 이를 위해 미국에서 비행사를 모집하는 방안을 장개석에게 건의합니다. 장개석은 자신의 동서이자 대미 차이나로비를 맡고 있던 송자문을 통해 루즈벨트에게 적극적으로 로비하여 1년 계약에 기간이 끝나면 원대복귀한다는 조건하에 100명의 파일럿과 200명의 지상요원을 미국 항공대에서 모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냅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중국에게 "잠시 빌려주는" 것과 같은 것인데 아직 일본과 정식으로 전쟁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꽁수"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센놀트는 미해군과 육군, 해병대를 상대로 4월 한달간 의용대를 모집하였는데, 지원자는 일단 군에서 퇴역후 일시금으로 500달러를 지급받고 매월 600달러의 급여를 받되 1기 격추시마다 500달러를 추가 지급받을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이 "용병"이라는 특성상 통솔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해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상습적인 음주, 마약, 전투와 무관한 질병(성병), 꾀병, 기밀 누설 등은 즉시 해고사유"라고 계약서에 못박았습니다. 

  

해군에서 50명 육군에서 35명, 해병대에서 15명 등, 총 100명의 파일럿과 지상요원 200명이 선발되었고 이들은 "센터럴 항공 제작 회사"와 계약한 민간인 신분으로 미국을 출발하여 버마로 향합니다. 그리고 버마에서 미국인 제1의용대대(American Volunteer Group; AVG)가 정식으로 창설되었고 별명으로 "플라잉타이거스", 중국명으로는 "비호대"라고 불리게 됩니다. 

 

플라잉타이거즈의 파일럿들. 이들은 "사고뭉치"라고 불릴만큼 기강이 형편없었지만 전투에서의 활약만큼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러나 훈련수준이 매우 낮은데다 2/3이상이 폭격기 조종사들이라 중국전선에서 몇년째 일본군의 실력을 실감했던 센놀트로서는 이들이 잘 훈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의 상대가 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개전전만 해도 미국의 전투태세 자체가 지극히 낮았고 이탈리아 듀헤의 "전략폭격"의 영향으로 폭격기 만능론이 대세였기에 전반적인 상태가 이런 수준이었죠. 또한 일본군에 대해 "일본기체는 구닥다리", "일본인들은 근시라 전투기 조종에 걸맞지 않다"따위의 근거없는 막연한 편견과 경시사상도 심했습니다. 

 

따라서 센놀트는 버마에 도착한후 랑군 근처의 비행장을 빌려 여름부터 가을까지 몇달에 걸쳐 이들을 매우 강도높게 재훈련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40명의 파일럿이 탈락하여 본국으로 귀국하였고 기체 역시 부품 수급 문제로 30여대가 파손되어 70대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P-40이 제로기나 97식전투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보고 나름의 신전술을 개발하였는데, 2대가 1조가 되어 적기앞에서 급강하면서 발포하고 이탈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격이탈전술"을 고안하여 파일럿들을 훈련시킵니다. "P-40으로는 일본기를 상대로 그 의표를 찌르려고 한다거나 묘기를 보여줄 생각을 하지마라.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이 한창 훈련과 편성중이던 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미일 양국은 전면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로 인해 영국령 버마 역시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따라서 플라잉타이거즈에게 주어진 임무는 당시 유일한 대중원조루트인 버마루트를 보호하고 랑군과 곤명, 중공의 하늘을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센놀트는 부대를 3개 전개를 편성한후 제1전대와 제2전대는 곤명에, 제3전대는 랑군에 배치하였습니다. 

 

 

플라잉타이거즈는 용맹함과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기체 기수에 상어이빨을, 캐노피 아래에는 월드 디즈니사의 직원이 마스코트로 도안한 날으는 호랑이 그림을 그려넣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jstars/78306854  

 

12월 20일 곤명을 폭격하기 위해 접근하던 제82독립중대의 99식 경폭격기 10대을 발견하였고 플라잉타이거즈는 이들을 요격하여 최소 3기이상을 격추하였고 그들의 피해는 전무했습니다. 이것이 플라잉타이거즈의 첫 출격이자 승리였습니다. 3일뒤인 12월 23일 일본군은 버마 침공을 위해 97식 중폭격기 60대, 99식 경폭격기 27대와 이를 엄호하기 위한 97식 전투기 30대 등 100여대가 넘는 대규모 편대가 랑군 시가지를 공습하여 1천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랑군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제3전대는 겨우 18대에 불과했고 버마 주둔 영국 공군(RAF) 역시 전력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측 연합공군은 이들에 맞서 격렬한 공중전을 펼쳐 일본 폭격기 8대가 격추되었고 P-40 3대와 영국 공군의 F2A전투기 4대가 격추되었습니다. 25일의 공중전에서도 일본은 8대를 상실한데 영국공군은 5대를 상실하고 플라잉타이거즈는 P-40 2대가 반파되어 불시착하였습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버마를 침공하자 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였고 42년 3월 21일에는 일본 비행장을 기습하여 지상에서 20대를 격파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영국 공군은 17대의 F2A전투기를, 플라잉타이거즈는 P-40 1대를 상실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랑군을 함락시키고 버마 전역을 석권하자 플라잉타이거즈는 잔존기체를 곤명으로 철수시킵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대부분의 항공전력을 남방으로 전환합니다. 1941년 12월 당시 총 143개 비행단중 본토에 15개, 만주에 37개, 남방에 78개, 그리고 중국전선에는 13개 비행단 390여대만이 잔류합니다. 그러나 한줌밖에 되지 않는 중국공군과 플라잉타이거즈에 비한다면 그정도만으로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월등히 우세한 것이었습니다. 플라잉타이거즈는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략폭격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42년 7월 4일 형양에서 피해없이 97식 전투기 4대를 격추시킨 것을 마지막 임무로 그들은 미육군 제23전투비행단(이후 제14공군으로 확대)에 편입되었고 센놀트는 준장으로 승진하여 제23전투비행단의 사령관이 됩니다.

 

약 7개월간의 전투에서 플라잉타이거즈는 약 297대를 격추 또는 지상격파하고 1천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상당히 부풀려진 것이며 실제 격추대수는 153대에서 115대라는 설도 있습니다. 한편, 플라잉타이거즈는 총 80대의 전투기를 상실했으나 이중에 공중전에서 상실한 것은 겨우 12대뿐이었고 전사한 사람은 13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이 성능에서 월등히 열세한 P-40을 타고 숫적으로도 열세했음에도 공중전에서 명백한 우세를 보였다는 것이죠. 이런 전과는 동시기 태평양 전역에서 연전연패를 당했던 연합군의 그 어떤 부대보다도 뛰어난 전과였습니다. 

 

플로리다 메모리즈 공원에 있는 플라잉타이거즈 기념비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미육군에서 있을때부터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센놀트는 관료적인 형식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고 어떤 외부의 간섭도 배제한채 소신껏 전술을 짜고 자신만큼이나 제멋대로였던 부대원들을 적절히 통제하였습니다.  

 

따라서 전투와 훈련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면서도 평상시에는 도가 지나치지 않는한 사고를 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주었죠. 이런 점이 플라잉타이거스가 급조된 외국인 용병대에다 기강도 형편없었음에도 막상 전투에서는 매우 용감하게 싸울 수 있었던 비결이었으나 태평양전쟁 이후 상관으로 부임한 스틸웰은 청교도정신이 투철한 양반이었고 센놀트의 "건달들"이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묵인하려고 하지 않아 전쟁기간내내 서로 심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센놀트는 당시 타임지의 극동지부 프리랜서 기자였던 데오도르 H. 화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스틸웰과 왜 처음부터 사이가 틀어졌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창녀집 문제때문이었소. 우리 애(부하들)들은 그걸 가져야 할 때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추한 것을 취하는 것처럼 때로는 깨끗한 것도 가져야 하죠."

 

그의 공군부대는 곤명에 주둔해 있었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곤명의 부대주변에는 유명한 뒷골목이 있었다. 그의 부대원들은 이 골목을 들락거렸고 성병은 그들의 전투력을 감소시켰다. 그것은 그들의 비행기가 지상에서 일본군의 폭격을 받는 것과 같은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센놀트는 비행기를 인도로 보냈고 의료진과 12명의 인도 매춘부들이 함께 실려왔다. 이 매춘부들은 깨끗하게 성병을 치료받고 검진이 끝난후에 이들의 위안부로 전속 배치되었다. 문제는 스틸웰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보고를 듣고 완전히 폭발했고 미공군 비행기가 매춘부들을 태우고 히말리야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센놀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창녀집"을 폐쇄해야 했다. 

 

센놀트가 루즈벨트에게 "105대의 전투기와 42대의 폭격기만 있으면 100만톤의 일본해군을 수장시키고 중국 상공에서 일본의 항공전력을 괴멸시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라고 큰소리친 것은 분명 누가 보더라도 억지스런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기보다 미국의 무기 원조가 전적으로 영국과 소련에만 집중되고 대중원조는 고작 1%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과장된 주장을 펼쳐서라도 대통령의 관심을 끌고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전선을 맡고 있는 지휘관으로서 솔직함이 능사는 아니며 이런 쇼맨쉽도 틀림없이 필요한 것입니다. 반면, 스틸웰은 그의 성격상 미국과 중국 양쪽에게 끼인채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한채 불만만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재중 미 제14공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화되어 44년에는 480대로 확대됩니다. 중국 공군 역시 미군의 보조로 전락하기는 했으나 미국의 지속적인 원조를 통해 240대로 증강되었고 최신예 P-51과 B-29폭격기로 무장한 미중연합공군은 구식기체만을 보유한 일본군을 압도하면서 43년 이후에는 중국에서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일본은 44년 4월 "이치고"작전에서 약 100여대의 항공기를 투입하여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한 것이 사실상 마지막 항공작전이었습니다. 미국은 45년말까지 중국에게 총 936대의 각종 항공기를 제공하였고 중국공군은 약 600대의 항공기와 12만명의 병력을 보유합니다.(그러나 그 대부분은 전쟁말기에서 종전후에 공여되었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열혈청년 | 작성시간 13.08.21 역시 공군력이 !!! 그나저나 중국과 일본은 스텔스기를 장비한다는데 우리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