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29화 < 파죽지세의 일본, 연합군의 굴욕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8.25|조회수924 목록 댓글 5

12월 8일 11시 30분. 대미개전과 진주만 기습의 성공을 알리는 도조 히데키의 특별성명이 전국에 전파되자 일본 열도는 환호에 휩쌓입니다. 도쿄의 주식시장이 유례없이 폭등한 것만큼이나 일본군의 남방침략 역시 그동안의 우려를 단숨에 날리듯 파죽지세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무방비나 다름없었던 연합군은 연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롬멜과의 싸움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극동에서의 방어태세는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홍콩에는 1만3천, 말레이에는 약 8만8천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현지민들이었고 장비도 매우 노후화된데다 훈련상태도 형편없었습니다. 이들은 정규군과의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치안 임무에나 적합한 부대들이었죠. 본국이 독일에게 함락당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와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도 같은 실정이었죠. 호주 역시 대부분의 병력을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파견한 상태로 본토는 사실상 무방비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미 태평양함대가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단 자체가 전무한 실정이었죠. 

 

그러나 장비와 훈련상태는 어쨌든, 적어도 숫자상으로는 공격군을 몇배나 압도하고 있었기에 적절한 협조체계가 있었다면 보다 효과적인 방어전략을 전개할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적으로 연합군을 통합지휘할 수 있는 어떠한 준비나 사전 협의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었죠. 

  

운명의 진주만 기습이 있었던 12월 8일(일본시간). 이 날은 연합군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의 날이었습니다. 필리핀, 괌, 웨이크, 홍콩, 말레이 등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연합군의 주요 비행장과 군항, 사령부가 폭격당하고 일본군은 동시다발적으로 상륙을 개시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미처 대응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진주만 기습 직후 대만에서 출격한 일본해군 제11항공함대 소속의 육상공격기 108대와 0식 전투기 84대가 필리핀의 클라크 비행장을 공습하여 B-17 18대를 비롯해 108대의 항공기가 지상에서 이륙조차 하지 못한채 격파되었습니다. 이어서 니콜스 비행장과 상글리 비행장, 마닐라만에 있는 캬비테군항 등 여러 비행장과 항구도 폭격당하여 필리핀에서 미군의 해공군력은 단 3일만에 완전히 괴멸되었습니다.

 

또한 당일날 오후 1시 30분, 야마시타 토모유키중장이 지휘하는 제25군 산하 제18사단이 영국령 말레이반도 최북단의 코타발에 상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도처에서 영국군을 격파합니다. 일본군은 3개 사단 6만명 정도인 것에 반해 영국군은 8만이 넘었음에도 일본군의 맹렬한 진격과 전차의 적절한 운용, 압도적인 제공, 제해권의 지원아래 미처 방어선조차 구축할 여유도 없이 붕괴되었습니다. 더욱이 퍼시발은 일본군을 과소평가했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방어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을뿐, 진지 구축과 병사들의 훈련을 게을리하였고 방어태세도 매우 허술했습니다.

 

말레이의 정글을 통과중인 95식 경전차 "히고". 당시 영국군은 울창한 정글지대에서 전차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했으나 일본군은 경전차와 자전거부대를 이용해 신속하게 진격하여 영국군의 허를 찔렀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pzkpfw3485/2242318 

 

12월 10일에는 남중국해에서 영국이 자랑하던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가 일본기의 공습으로 격침당했고 2월 8일에는 영국 극동 최대의 요새인 싱가포르가 포위되어 1주일간의 격전끝에 15일 함락되었고 극동군 사령관 아서 퍼시발중장 휘하 7만명이 항복하였습니다. 일본은 겨우 2개월만에 말레이 전역을 장악했으며  대소 96회의 전투에서 전사자 2천여명을 포함해 약 5천미만의 사상자를 낸 것에 반해, 영국군은 전사자만 5천이 넘었습니다. 후에 처칠은 "영국군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었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항복 협상중인 야마시타와 퍼시발. 퍼시발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으로 교섭하려고 하자 승자인 야마시타가 고압적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Yes or No!"라고 한 것은 당시 유명한 일화이죠. 그러나 그런 두사람의 처지가 3년 반 뒤에 180도 바뀌어 야마시타는 전범으로 처형당했고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퍼시발은 전함 미주리에서 맥아더와 함께 일본의 항복 조인식에 참석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pzkpfw3485/2242318 

 

사카이 다카시 중장이 지휘하는 제23군은 홍콩을 공격하여 12월 14일 구룡반도를 제압했고 25일 저녁까지 홍콩 전역을 함락시킵니다. 18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700명을 포함해 22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영국군은 1700명의 전사자에 11,000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12월 10일에는 겨우 427명의 미 해병이 수비하는 미국령 괌에 5,400명의 일본 해군육전대가 상륙하여 간단하게 제압하였고, 웨이크섬에서는 수비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이 반파되고 구축함 1척이 격침되는 큰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결국 12월 23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미드웨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공략작전은 연기되었으나 마찬가지로 공습과 함포 포격을 받았습니다. 

  

한편, 말레이 상륙과 동시에 중립국인 태국에 대해서도 침공을 개시합니다. 일본은 40년 6월 태국과 주권존중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제5사단이 말레이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싱고라와 파타니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또한 태국정부에 대한 최후통첩을 날려 일본군의 말레이와 버마 침공을 위한 통로를 제공할 것, 태국-일본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할 것, 추축국의 일원으로 미, 영에 선전포고할 것을 요구합니다 

 

태국정부와 일본의 교섭이 완료되지도 않았음에도 일본군은 일단 상륙부터 시작하였고 태국 남부지역 곳곳에서 쌍방의 치열한 충돌이 벌어져 태국군이 180명, 일본군이 140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피분 송크람 총리는 저항을 중지할 것지시하였고 12월 11일 쌍방간에 통과협정이 체결되어(사실상 항복) 큰 충돌없이 일본군은 수도 방콕을 비롯해 태국 전역을 장악합니다. 형식상 태국의 중립을 존중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반식민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죠. 

 

일본의 태국 침공. 일본은 태국을 홍콩이나 버마, 말레이처럼 아예 직할지로서 총독을 파견해 통치하지는 않았고 형식상 동맹국으로 주권과 영토를 존중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식민지나 다름없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피분은 원래 친일성향이 강한 관료였으나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전부터 일본의 위협을 심각하게 우려했고 41년 9월 국민총동원령을 선포함과 함께 미, 영의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고 미국에게 전투기 10대와 폭격기 24대를 판매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태국은 일본과 이미 한패라고 생각했고 영국은 지원의사를 밝혔으나 막상 도와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태국은 일본의 침략앞에서 홀로 맞서거나 아니면 굴복하거나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해야 내가 나중에 나라를 팔았다는 말을 듣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은 우리 군대의 무장을 해제할 것이고 그러면 끝장이다."라고 토로하였습니다. 

 

 

쁠랙 피분 송크람(1887~1964) : 원래 군출신으로 1933년 왕족 쿠테타를 진압한후 1938년 군부의 지지를 받아 총리자리에 오릅니다. 사실상 독재자였으나 태국의 근대화와 군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大태국주의"를 추구하여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망한 것을 이용해 과거 라마 5세시절 프랑스에게 강제로 빼앗긴 영토의 탈환에 나섭니다. 태국군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여 비시프랑스군과 충돌하였고 41년 1월 29일 동경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1903년과 1906년에 상실했던 영토의 대부분을 반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중재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 피분은 일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나 한편으로 이로 인해 태국의 중립이 침해받을 것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우려했습니다. 결국 일본의 압박에 못이겨 영토 통과권과 동맹 체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일본의 패색이 점차 짙어지자 1943년 7월 총리직에서 스스로 사임하였고 45년 10월에는 전범으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무죄로 석방된후 다시 독재자의 자리에 올랐고 군부독재와 부정선거, 부패를 일삼다 결국 57년 9월 군부쿠테타가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나 전쟁기간 강력한 리더쉽으로 조국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한 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국이 아직 정식으로 추축동맹에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영국 공군이 방콕과 태국 남부를 수차례 공습하자 1월 25일 연합군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합니다. 비록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는 했으나 한편으로 군부내 친일파들이 일본의 눈부신 속전속결을 보면서 전쟁에서 일본이 이길지도 모르며 여기에 편승해 이익을 얻어야 한다, 라고 기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소국이 얼마나 위험한 줄타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죠.  

  

태국은 실제로 연합군에 맞서 군사작전을 펼치지는 않았으나 일본의 버마 침공을 위해 영토 통과권을 내주는 한편 일본군과 연계해 중국 운남성을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버마와 태국을 연결하는 철도건설을 위해 12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그 중 4천명이 죽고 1만4천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 데이빗 린 감독의 고전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바로 이 철도건설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일명 죽음의 철교라 불리었으나 실제로는 연합군 포로보다 태국인들의 희생이 훨씬 컸습니다. 

 

태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였으나 사실상 아무런 주권도 없는 식민지나 다름없었으며(을사조약이후 조선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일본은 모든 산업시설과 군사 지휘권, 외교권, 행정권을 죄다 장악하였습니다. 또한 관세를 철폐하고 주요 항만을 장악했으며 철도생필품과 의약품을 비롯한 모든 물자를 강제 징발하고 막대한 쌀과 자원을 수탈하여 태국 국민들은 전쟁기간 심각한 인플레에 허덕이게 됩니다. 이런 일본의 횡포로 당연히 반일 감정 역시 점점 격화됩니다. 피분도 일본의 수탈을 공공연히 비난하는 한편 비밀리에 연합군과 교섭하여 태국의 입장을 호소하고 중국군과 연계하여 일본에 대항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합니다. 또한 주미공사인 쎄니 쁘라못을 중심으로 자유타이군이 결성되어 연합군에 협조하는 등의 노력덕분에 태국은 공식적으로 추축국의 일원이자 일본의 동맹국이었음에도 연합군은 태국을 적국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국토가 전쟁터가 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있었습니다.  

 

12월 10일부터 홈마중장의 제14군이 필리핀 루손섬에 대해 남북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합니다. 필리핀 수비를 맡고 있던 맥아더는 루손섬 방어를 위해 41년 1월부터 바탄을 비롯해 마닐라만 입구를 요새화하였고 본국에서 증원군이 올때까지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며 바탄으로 철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필리핀의 수비병력은 미군 13,500명을 포함해 2개 현역사단과 10개 예비사단 13만명정도였고 장비와 훈련은 물론 일선의 방어태세도 여전히 형편없었습니다. 필리핀의 미 극동항공군은 미국 국외에 있는 항공부대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으나 실제로는 항공기 277대중 절반정도인 142대만이 가용가능했습니다. 더욱이 맥아더는 진주만 기습 보고를 받고도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즉각적인 전투태세를 지시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주요 비행장과 군사기지, 군항이 무방비상태로 일본군의 공습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웨인라이트소장은 필리핀군을 지휘하여 루손 북부지역에서 일본군을 일시적으로 저지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루손섬에 본격적으로 상륙하여 내륙으로 신속하게 진격하자 맥아더는 제공권, 제해권이 없는 상태에서 방어전은 자살행위라고 보고 지연전을 펼치면서 방어에 유리한 바탄의 정글속으로 모든 병력을 철수시킵니다. 42년 1월 2월 일본군은 비무장도시로 선포된 마닐라에 무혈입성한후 제16사단과 제65독립혼성여단으로 바탄을 포위합니다. 숫적으로는 8만에 달하는 미-필 연합군이 월등히 우세했으나 사전에 식량과 의약품을 충분히 비축하지 못했기에 곧 기아에 허덕입니다. 그럼에도 수차례 일본군의 돌격을 저지하고 큰 피해를 입혔으나 반대로 일본군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도 없었습니다. 

  

바탄의 미군을 향해 포격중인 일본군 포병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pzkpfw3485/2241645

  

일본군은 병력 3만에 포 200문, 전차 50대, 항공기 100대로 증강하여 3월 31일부터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치열한 전투를 거치며 진지를 하나씩 점령하여 4월 9일 바탄반도가 함락되고 7만6천명이 항복합니다. 바탄 함락전에 맥아더는 필리핀 대통령 케손과 함께 호주로 탈출했고 그의 뒤를 이은 웨인라이트 역시 2천명의 잔존병력을 이끌고 바탄반도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인 코레히도르로 철수하여 계속 전투를 지휘했으나 일본군이 상륙하자 5월 6일 항복합니다.웨인라이트가 항복하자 민다나오섬을 비롯해 필리핀 곳곳에서 고립된채 저항하고 있던 부대들 역시 하나씩 투항하여 6월 9일에야 필리핀 전역은 완전히 종료됩니다. 

 

 

항복협상중인 웨인라이트와 홈마.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click4059/120036970480  

 

약 6개월간의 치열했던 필리핀전역에서 연합군은 전사 1만에 7만 5천명이 포로가 되었고 일본군 역시 전사자 7천을 비롯해 약 3만명에 달하는 큰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이들의 분전덕분에 일본은 남방작전에 상당한 차질이 발생하였고 미국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에서 마지막 미군의 거점이었던 코레히도르섬을 함락시키고 입성중인 일본군.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pzkpfw3485/2241645 

 

포로가 된 연합군은 심각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음에도 일본군은 제대로 물과 식량도 공급하지 않은채 100km이상을 강행군시켰고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많은 포로들이 죽어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온갖 학대는 물론이고 낙오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총검으로 살해하여 "죽음의 행진"과정에서 적어도 7천명이상이 사망하였습니다. 그 잔혹함은 중국전선에서 중국군 포로에게 대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령관이었던 웨인라이트는 이후 대만을 거쳐 만주국 수도인 심양(봉천) 근교의 포로수용소까지 끌려갔고 마찬가지로 포로가 되었던 퍼시발 역시 이곳에서 만납니다. 둘다 고위급 포로임에도 매우 가혹한 대접을 받아 종전 직전 OSS에 의해 구출되었을때는 몸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이후 퍼시발과 함께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에 참석하였고 반대로 그를 포로로 잡았던 홈마는 포로학대 및 살해죄로 B급 전범으로 처형됩니다. 

 

42년 1월 11일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됩니다. 일본군은 말레이와 필리핀을 관통하여 곧장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심장부인 자바섬으로 진격하였고 보르네오를 비롯한 주요 해안 도시들을 차례로 제압합니다. 네덜란드군은 하인텔 폴텐중장휘하 약 8만5천에 달했으나 대부분 현지민들에다 사기와 훈련, 장비 모두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주만 기습후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남방침략을 개시함에 따라 미, 영, 네덜란드, 호주 4개국은 12월 23일 워싱턴에서 극동에서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키로 하고 42년 1월 10일 자카르타에 통합사령부를 설치하여 사령관에는 1년전 중동군 사령관으로 10배가 넘는 이탈리아군을 격퇴했으나 롬멜에게 완패하여 해임된 아치볼트 웨이블 대장이 임명됩니다. 연합군의 방어전략은 말라야-수마트라-자바-호주 북부를 연결하는 이른바 "말레이방벽"을 구축하는 것이었으나 연합군간의 이견과 협조 부족, 일본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제대로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와해되어 버렸죠.

 

2월 14일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최대 유전지대인 수마트라 팔렘방의 유전시설들이 미처 파괴되기전에 일본군 제1정진단(공수부대)의 기습을 받아 점령되었고 27일 벌어진 자바해전에서 4개국 연합함대가 전멸당함으로서 자바섬은 삼면에서 완전히 고립됩니다. 웨이블은 25일에 이미 콜롬보로 탈출하였고 28일 이마무라중장의 제16군이 자바섬에 대해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와 세마랑에 상륙하여 결국 3월 9일 네덜란드군은 완전히 항복합니다.  

 

 

자바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집중포격을 당하고 있는 영국해군 중순양함 "익세터". 자바해전에서 피아간의 전력은 일본군 순양함 3척에 구축함 7척에 비해 연합군은 순양함 5척, 구축함 9척으로 우세했음에도 지휘계통의 혼란과 제공권의 열세로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당한채 괴멸되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단지 구축함 1척이 대파됩니다. 

※ 사진출처 : http://cafe.daum.net/tyengco/nG7t/27?docid=1MMxXnG7t2720120110182641 

 

진주만 기습이래 겨우 6개월만에 일본은 서부 태평양 전역을 장악했고 그 면적은 무려 2600만㎢에 인구는 1억 5천만명에 달했습니다.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석유와 천연가스, 고무, 망간, 주석, 니켈 등 일본이 필요로 하는 자원을 넘칠 정도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당초 목적은 달성된 것이었고 이이상의 확전은 무의미했죠.  

 

1942년 여름 일본제국의 최대 판도.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고 호주와 인도까지 장악하고 나아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그 순간까지 무한 확장만을 원했습니다. 일부 수정론자들의 주장처럼 태평양전쟁은 단순히 태평양을 놓고 "패권싸움"도, "자원전쟁"도 아니라 바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세력과 그것에 저항하려는 세력간의 생존 그 자체의 싸움이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kimgg0804/130131875243 

  

문제는 일본군 수뇌부가 이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죠.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전쟁기구는 끝없이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버마는 그다지 가치는 없었습니다. 물론 석유를 비롯해 풍부한 자원이 있었지만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말레이를 점령한 이상 굳이 부족한 병력을 분산시키고 전선을 확대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초기작전에서 예상밖의 승리에 기고만장해진 군부는 그동안의 우려와 공포는 죄다 까먹어버리고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합니다. 영국의 위협을 제거하고 중국의 원조루트를 차단하여 중국을 고립시킨다는 것이 작전의 명분이었으나 정작 전력을 집중시켜 운남과 사천을 단숨에 공격하여 중국전선을 종결시키겠다는 계획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중국전선은 이미 관심밖이었으며 버마를 발판삼아 상황에 따라서는 인도까지 장악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야심만을 품고 있었죠.

 

41년 12월 23일 60대의 폭격기가 랭군 시가지를 무차별로 폭격하여 2천명이 사망합니다. 이어서 이이다 쇼오지로중장휘하의 일본군 제15군이 42년 1월 16일 태국 국경을 통해 버마 동부 정글지대를 돌파하고 랭군 동쪽에서 겨우 140km에 떨어진 해안도시 모울메인까지 단숨에 진출합니다.  

 

허튼중장이 지휘하는 버마 주둔 영국군은 겨우 2개사단 8500명에 불과했고 항공기도 35대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침공 직전 인도에서 증원된 병력까지 합해도 겨우 1만 4천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허튼중장은 여타 연합군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방어태세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습니다. 

 

영국에게 버마는 인도를 수비하기 위한 관문이기도 했지만, 중국으로서도 버마는 생명줄이었기에 일본의 남방침략이 본격화되는 41년 중순부터 양국은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으나 영국은 버마로 증원할 병력이 없는데다 북아프리카 전역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기에 일본의 위협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역시 유사시 10개사단을 편성하여 이중 7개를 유럽으로, 2개를 브라질로, 1개는 하와이에 배치하겠다는 생각이었으나 중국과 버마에 대한 파병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41년 12월 23일에야 장개석의 제의로 중경에서 미, 영, 중 3국간의 연합군사회의가 개최되어 대일전을 위한 연합국간의 협력방안을 논의했으나 서로간의 의견차이가 너무 큰데다 영국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양국간의 버마 공동방위 제안과 중국군의 버마 진입을 거부하였고 여기다 영국군이 버마루트를 통해 중국으로 수송될 군수물자를 무단으로 압류하자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됩니다. 마셜의 중재로 간신히 회담은 재개되었고 버마를 포함하는 중국전구의 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하여 장개석이 총사령관으로 추대됩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인 지위에 불과했을뿐 실제로는 일본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어계획도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고 서로간의 공조를 위한 협력기구도, 연락체계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영국은 중국군의 버마 진입을 계속 거부하다가 일본군의 공격 직전에야 진입을 허가했고 중국군의 작전을 지원하지도, 심지어 현지 지도조차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일본군이 버마를 침공하자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주로 버마인들과 인도인들로 구성된 수비대는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채 와해되어 정글속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살윈강을 도하하자 2월 27일 버마 총독인 레지놀드 스미드는 런던으로 "나는 랭군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라고 통신을 보냈고 처칠은 그를 대신해 덩케르크 철수의 영웅인 해럴드 알렉산더중장을 급파합니다. 그는 현지 시찰후 버마방어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랭군 교외에 있는 1억 5천만 갤런에 달하는 석유저장고를 비롯한 주요 시설을 일본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폭파시키는 한편 잔존부대를 구출하는데 주력키로 합니다. 랭군은 3월 7일 함락되었습니다. 

 

 

랭군을 함락시키고 영국 총독부 앞에서 자축하는 일본군 

※ 사진출처 : 라이프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30 

 

스틸웰이 버마로 온 것은 바로 이런 혼란의 순간이었습니다. 마셜에 의해 중국전구 참모장으로 임명된 그는 소수의 참모들과 함께 버마국경의 라시오에서 장개석을 만납니다. 스틸웰은 참모총장인 마셜과 전쟁성장관 스팀슨을 통해 자신이 장개석으로부터 중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보장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그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을뿐이었고 장개석은 단지 자신을 보좌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을뿐, 그 권한에 대해 사전에 명확하게 논의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의 요구는 중국으로서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부당한 것이었는데, 20년대이래 장개석의 주변에는 독일과 소련에서 파견된 많은 군사고문이 있었으나 그들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 직접 중국군의 지휘권을 요구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스틸웰은 미국정부가 중국에게 거액의 원조를 제공한 이상 그에 합당한 권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나 반면 장개석으로서는 실전에서 대부대를 지휘해본 경험도 전혀 없고 일본군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미국인이 5년 이상 일본군과 직접 싸워온 자신들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죠.

 

더욱이 스틸웰이 간과한 것은 이들이 외국인에게 굉장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중국인 특유의 중화사상은 둘째치고라도, 장개석을 비롯해 중국군 지휘관들은 의화단의 난 이래 서구 열강이 중국에서 그동안 보여준 수많은 만행과 횡포, 멸시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1923년 10월 10일 광주에서 군함을 동원해 포격하여 황포군관학생들을 포함해 다수의 중국인들이 죽었고 북벌과정에서도 장개석의 북벌군이 남경을 점령하자 미, 영이 무력 간섭하여 남경시내를 포격하였습니다.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까지도 이렇다할 도움은 커녕 일본의 침략을 묵인하고 심지어 간접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음에도 이제와서 원조를 무기로 "사대외교"를 강요한다면 반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장개석은 미국과 굳이 불화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스틸웰의 요구를 마지못해 받아들였으나 이런 상황에서 서로간의 제대로 된 협조가 될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 역시 비협조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장개석이 영국 극동군 사령관인 웨이블에게 버마 국경에 대기중인 중국군 제5군에 대해 유류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중국군의 지원이 필요없다고 생각한 웨이블은 이를 거부합니다. 더욱이 처칠은 버마는 중요하지 않으며 일본군이 인도를 침입하지 않도록 저지하는 선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스틸웰 스스로도 "그들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대단히 중요한 작전구역에 있는 2개군을 생면부지의 신뢰할 수 없는 외국인에게 순순히 맡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를 적절히 타협하고 설득시키려고 하기보다 그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상 끝까지 고압적인 태도와 책임전가, 비난으로 일관함으로서 상황만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 미국의 이런 태도는 소련에 대한 태도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는데, 스탈린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싶어했던 루즈벨트는 소련과 마찰을 빚을만한 어떤 행위도 금지시켰고 무기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되는 모든 원조는 "아무런 조건도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스탈린정권의 비도덕성과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한 비판과 경고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기존의 많은 서적들은 스틸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여 버마에서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중국군의 무능함과 태만함으로 전가시켰으나 이는 명백한 왜곡입니다. 문제는 스틸웰과 영국, 중국간의 극도의 불신과 협조부족에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없었으며 그 불협화음은 북아프리카에서 롬멜과 이탈리아군간의 관계보다도 훨씬 심각했습니다. 제5군 사령관 두율명이 "야포는 어디있나"라고 묻는 알렉산더에게 "야포는 소중한 것이며 파괴되어서는 안되므로 후방으로 철수시켰다"라고 대답한 것에 대해 중국군의 무능함을 비웃지만 그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승리한 적이 있는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며 버마에서 그의 부대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그가 무능하거나 의도적으로 전투를 회피하려고 했다고 덮어놓고 비난하는 것은 성급한 것입니다. 

 

두율명(1904~1981) : 최종계급은 이급상장. 황포군관학교 1기 졸업생으로 해방군 10대원수인 서향전과 동기입니다.(참고로 임표는 4기 졸업생) 북벌전쟁부터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으며 진성, 탕은백과 함께 장개석의 최측근중 하나입니다. 중국군 최초의 기갑부대를 창설했고 중일전쟁중 장사전투와 남녕 곤륜관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이후 제5군이 창설되자 사령관이 되었고 버마원정군의 부사령관으로 버마에 파견됩니다. 그러나 장개석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고 국공내전중 서주 회해전투에서 참패하여 10년간 강제수용소에서 혹독한 사상개조를 받았습니다. 1959년 사면되어 이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대표가 되는 등 비록 실권은 없지만 고위직을 맡아 나름 평온한 말년을 보내다 북경에서 77세의 나이로 병사합니다.

 

영국은 버마 방어에 소극적인 반면, 평생 처음으로 한개 전선의 야전지휘를 맡은 스틸웰은 자기 혼자 의욕에 넘쳐 일본군을 과소평가하고 무모한 반격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원정군은 영국의 비협조로 충분한 준비도 없이 급작스럽게 편성된데다 유류부족으로 제5군 휘하의 제200사단(기계화사단)만이 랭군 북쪽의 퉁구로 전진할 수 있었고 나머지 2개사단(신22사단, 제96사단)은 여전히 훨씬 북쪽의 만달레이와 라시오 사이에 있었습니다. 제6군 3개사단(제49사단, 임시55사단, 제93사단)은 태국접경의 켕퉁에 있었으나 정작 그곳에는 일본군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틸웰의 추가 파병 요청으로 제66군(신28사단, 신29사단, 신38사단)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각 부대들은 사전계획없이 축차적으로 투입되었기에 넓은 지역에 아무런 연계도 없이 흩어져 있었고 제대로 된 작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사전에 정글전에 대비해 충분한 훈련을 받은 일본군과 달리 영국군과 중국군은 아무런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다 3월 21일부터 22일까지 200대에 달하는 일본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버마주둔 영국공군과 센놀트의 플라잉타이거즈 제3전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소수의 잔존기만이 각각 인도와 중국으로 철수합니다. 4월 5일에는 나구모의 기동함대가 영국 동양함대의 본거지인 실론섬의 콜롬보를 강습하여 항모 허미즈와 순양함 2척이 격침되었고 서머빌제독은 잔존함대를 동부 아프리카로 철수시킵니다. 이로서 버마와 인도양에서 연합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상황은 최악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반격은 무모하며 모든 병력을 버마 북쪽으로 철수하여 국경지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해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것에는 중국과 영국 모두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틸웰은 일본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지도 않고 무작정 "적은 전차도 대포도 없고 병력도 약하다"라며 신속하게 공격할 것을 고집하였습니다. 장개석은 영국군이 함께 반격에 나설 생각이 없는데다 중국군 역시 제대로 집결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200사단 역시 영국군이 연료를 제공하지 않아 전차부대가 일선에 도착하지 못했다며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중국군과 영국군간에 지휘 통일이 되지 않아 제대로 협조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스틸웰이 중영 연합군을 구성하여 지휘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스틸웰은 장개석의 충고에 대해 "전선에서 16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주제에 사사건건 끊임없이 간섭한다"라며 죄다 무시하였고 버마 남부에 대한 반격을 통해 랭군과 퉁구의 탈환을 추진합니다. 그는 랭군과 퉁구를 탈환해야 미군의 물자를 중국으로 들여올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설사 그의 작전이 성공한다쳐도 이미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죠.

 

3월 24일 일본군이 북상하여 만달레이를 공격하자 그는 중국군 임시 55사단과 제200사단에게 반격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영국군이 스웨다웅에서 패배하자 사전 통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퇴각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위됩니다. 슬림의 제1버마군단 역시 일본군에게 패주하여 북쪽의 유전지대로 후퇴합니다.  

 

연합군의 작전은 말그대로 엉망진창이었고 예하 부대와의 통신이 끊어지자 스틸웰은 직접 참모를 보내어 명령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정작 그들은 중국어를 몰랐습니다. 스틸웰이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행동하여 중국군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한 장개석은 그를 무시하고 직접 명령을 하달함으로서 더욱 혼란에 빠졌고 서로 책임만 미룹니다.

  

스틸웰의 야심찬 공격은 단 4일만에 철저하게 실패로 끝납니다. 제200사단은 퉁구시내에서 고립되었고 12일동안 치열한 방어전을 펼친후 두율명의 명령으로 북쪽의 핀마나로 퇴각하였습니다.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었고 훈련과 장비가 매우 빈약했던 임시 55사단은 핀마나와 라시오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전차와 포병을 앞세운 일본군 제56사단의 공격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와해되었습니다. 영국군 역시 전의를 상실한채 예난자웅의 유전지대를 폭파하고 북쪽으로 철수합니다.  

 

그러나 일본군 제33사단에 의해 예난자웅이 함락되어 슬림의 제1버마군단은 분단되었고 일부 병력이 포위됩니다. 알렉산더는 중국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손입인이 지휘하는 신38사단이 출동하여 2일간의 격전끝에 예난자웅을 탈환하여 영국군 7천명과 포로, 선교사, 신문기자 등 500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어서 제17인도사단 역시 구출합니다. 손입인의 승리는 버마작전동안 유일하게 성공적인 작전이었으나 4월 29일 라시오가 함락됨으로서 중국군의 퇴로가 차단됩니다. 

 

버마작전의 전개과정. 붉은 색이 일본군의 진격. 푸른색이 연합군의 후퇴.  

 

결국 연합군은 버마의 방어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면적인 철수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과 공습으로 조직적인 철수를 할 수 없었고 각 부대는 개별적으로 정글을 돌파하며 제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송희렴의 중국원정군 사령부와 손입인의 신38사단은 영국군과 함께 인도의 임팔로, 두율명의 제5군과 신22사단은 레도로, 제96사단은 운남으로 철수합니다. 

 

 

손입인(1900~1990) : 최종계급 이급상장. 중국인들을 멸시했던 "까다로운 죠"조차 "동양의 롬멜"이라며 극찬했던 중국군 제일의 명장. 원래는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운동에도 매우 뛰어나 농구선수로서 극동선수권대회에 중국대표로 참가하여 우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가서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한후 귀국하여 중앙군관학교 교련연대장을 맡았고 중일전쟁 발발후 상해, 소주, 무한전역 등 주요전투에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스틸웰 휘하에서 버마를 탈환하고 레도공도를 회복했으며 신1군의 사령관이 됩니다. 미국식으로 편제된 그의 신1군은 이른바 "5대 주력"중 하나라 불리며 중국군 최강부대였으나 국공내전에서 만주전역에 투입되었다가 장개석의 무리한 작전으로 보급선이 끊겨 임표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고 그 책임으로 지휘권을 박탈당합니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쫓겨난후 대만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그가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의심한 장개석에 의해 "쿠테타를 획책했다"며 파면되어 1988년까지 무려 23년간 연금당합니다.

 

그러나 스틸웰의 명령에 따라 타웅지를 탈환했던 제200사단은 그곳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고 포위망을 간신히 돌파해 운남성 운용으로 귀환하였으나 사단장 이하 병력의 반수 이상을 상실해야 했습니다. 스틸웰 자신은 소수의 병력으로 버마 북부의 미치나에서 최후 항전을 시도했으나 5월 8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본인은 소수의 참모, 간호사, 선교사, 종군기자에 중국인 병사까지 100여명의 행렬과 함께 도보로 정글속에서 비를 맞아가며 220km의 험난한 길을 도주해야 했습니다. 완전히 누더기가 된 그의 일행은 5월 19일 임팔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고 스틸웰은 후에 당시의 상황을 "지옥에서의 탈출"이라고 회고합니다. 

 

 

정글을 뚫고 탈출하는 스틸웰의 일행. 그 지옥을 함께 탈출했던 종군기자들은 그의 실책을 부각시키는 대신, 참모들과 함께 도보로 걷는 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초인적인 불굴의 의지"라며 극찬했고 덕분에 그는 패장에서 도리어 영웅이 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suprim/13416947 

 

스틸웰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어 버마에 파병한 부대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던 장개석은 5월 6일에야 두율명을 통해 인도로 퇴각중임을 알게 된 그는 스틸웰이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자신이 맡긴 중국군을 팽개친채 멋대로 인도로 도주했다며 격분하였습니다. 

 

물론 스틸웰은 스틸웰대로 할말이 있었고 버마에서의 실패에 대해 "이른바 제5열이라 부르는 현지독립세력의 적대적 행동, 제공권의 결여, 일본군의 선제공격, 열악한 장비, 탄약의 부족, 무능한 지휘관들, 영국군의 비협조적이고 패배주의적 태도, 형편없는 방어전략, 장개석의 간섭, 먹통이 된 통신망 등등...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라고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으나, 자신의 오판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버마에 투입된 중국군은 손입인의 신38사단을 제외하고는 1명의 사단장이 전사했고 모두 괴멸상태나 다름없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전략예비대의 대부분을 상실했다는 것과 더이상 외부로부터의 원조를 받을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6월 4일 중경에서 장개석이 "이번에 나는 좋은 교훈을 배웠소.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소."라고 말하자 스틸웰은 "방어보다는 그래도 공격이 댓가가 적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화기애애하게 보였으나 장개석과 스틸웰은 이미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증오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미국과의 교섭을 위해 워싱턴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의 처남 송자문에게 "스틸웰은 임무에 아주 태만하다"고 비난했고 스틸웰은 장개석을 땅콩이라 부르며 자신의 일기에 "무지하고 즉흥적이고 완고한 인물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 일본이 중국을 박살내던지 아니면 혁명이 일어나서 그를 쫓아내던지 양단간에 결정이 나야 한다"라고 씁니다. 

 

한편, 일본이 버마 점령 직후 그 여세를 몰아 중국 남부와 동부, 북부 삼방향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면 중국은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위한 준비도 계획도 없었고 육군은 남방작전이 어느정도 마무리되었으니 만주와 중국으로 병력을 전환시킨후 독소전쟁에 호응하여 소련을 공격할 것을 주장한 반면 해군은 하와이와 호주를 공략할 것을 주장합니다. 처음부터 명확한 전쟁계획이 없었던 그들은 예상보다 너무 쉽게 승리하자 완전히 기고만장해져서 무작정 새로운 먹이를 찾아 나설 뿐이었습니다. 결국 6월 5일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참패로 그들의 승리는 종지부를 찍었고 점차 수세로 몰리게 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열혈청년 | 작성시간 13.08.26 살줄만 알고 죽을 줄은 모르는 일본군.....이런 군대에게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찾아오는 법.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8.26 다단계 피라미드 사업자들 같네요. 끊임없이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내야만 유지되는 전쟁 기계.
  • 작성자Aetius | 작성시간 13.08.27 어쩐지 중일전쟁 관련 서방측 자료를 볼때마다 글들의 논조가 장개석정권이나 중국군에 대한 비난일색이였던지라 의아했었는데 저런 깊은 내적갈등이 있는진 몰랐네요.
  • 작성자지옥괭이 | 작성시간 13.08.27 일본 군부는 전쟁의 승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전쟁 그 자체를 필요로 하는 거 같아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8.27 2222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