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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34화 < 스틸웰, 버마 탈환을 꿈꾸다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9.02|조회수597 목록 댓글 3

일본이 파죽지세로 남방을 침략하고 있었던 42년초, 스틸웰의 버마에서의 모험은 철저하게 실패한채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북부 버마의 울창한 정글을 도보로 횡단하여 비참한 몰골로 5월 19일 인도 임팔에 도착합니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버마로 파견되었던 중국군 3개군은 손입인의 제38사단만이 그런대로 건재를 유지할 수 있었을뿐 나머지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모든 장비는 버려진채 각 부대는 개별적으로 일부는 인도로, 일부는 운남으로 탈출하였습니다. "귀환에 실패한 병사들의 유골이 길을 하얗게 뒤덮었다. 많은 곳을 글자 그대로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군이 중국군을 추격하여 운남성 남부지역을 침공하여 노강(살윈강의 중국명)까지 진격하자 중국군은 버마루트로 활용되고 있던 노강의 혜통교를 스스로 폭파시켜야 했습니다. 또한 남방총군은 그 여세를 몰아서 제18사단과 제33사단을 동원해 인도 북부의 아쌈주를 침공하는 "21호 작전"을 대본영에 건의했으나 당시 제18사단장인 무다구치 렌야 중장이 병참선의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습니다.   

 

일본군을 격파하여 빨리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던 스틸웰은 6월 3일 중경으로 복귀하자말자 장개석을 만나 자신의 버마 탈환계획을 설명합니다. 그는 중국이 일본의 대중 봉쇄망을 돌파하고 본격적인 대중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영국군과 연합해 버마를 탈환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버마에서 인도로 탈출한 중국군의 잔존병력을 X군을 편성하여 미국식으로 재편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X군은 10만명으로 편성되며 이를 위해 중국이 추가로 병력을 제공할 것, 훈련과 무장은 미국이 책임지되 이들에 대한 모든 통제권한, 즉 작전권과 지휘권, 인사권은 자신이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X군의 통제권을 스틸웰이 가지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영국군이 지휘하는 상황은 결코 인정할 수 없으며 이 부분에 대해 사전에 영국측과 명확히 합의해야 주장합니다. 이것은 당시 장개석이 영국에 대해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는데다 혹시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때 중국군을 활용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5만명의 중국군을 파견하는 댓가로 "중국전구 유지를 위한 3가지의 최소 요구"를 제시합니다. 이른바 장개석의 "3항 요구"로 알려진 조건은 첫째로 험프루트를 통한 대중원조물자를 매월 5천톤으로 확대할 것, 둘째로 미군 3개 사단이 9월까지 인도에 투입되어 영, 중과 연합해 버마에서 반격을 실시할 것, 셋째로 중국 전구의 공군력을 500대로 증강할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이 이런 요구를 한 것은 영국을 불신한 만큼이나 미국에 대해서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42년 여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의 상황은 최악이었는데 롬멜의 공세로 오킨렉의 제8군은 완전히 괴멸되어 토부룩이 함락되고 리비아-이집트 국경을 돌파한 롬멜의 군단이 카이로까지 위협하자 루즈벨트는 당초 중국전구에 투입하기로 약속했던 미 제10공군과 중국군을 위해 인도로 수송중이던 물자, 전투기, 차량을 중국과의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영국에게 돌려버립니다. 중국 전구에 배치된 센놀트의 "미니공군"은 고작 전투기 45대와 폭격기 7대만을 보유했을 뿐이었습니다. 즉, 장개석의 시각에서 볼때 미국은 유럽전선만 중시할뿐 일본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아주 소극적이며 단지 중국군만 희생되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서로간의 입장차이와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불신이었지만, 스틸웰은 미-중 양측을 중간에서 적절히 외교적으로 중재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장개석의 요구가 무례하다고 격분하였고 그는 본국에 그대로 전달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한줄 첨부시킵니다. "그들은 너무 멍청해서, 우리가 그걸 약속해 주리라 생각한다." 장개석의 3가지 요구는 한동안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결국 마셜의 육군부는 일부만 수용키로 결정하였습니다. 미군은 아시아 대륙에 파견되지 않으며 항공기 500대 대신 전투기 265대와 수송기 100대를, 대중 공수물자는 가능한 빨리 5천톤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수송기의 부족과 험프루트의 험난함으로 지지부진했고 43년 1월에도 1,700톤에 불과했습니다. 

 

한편, 영국측 역시 스틸웰의 계획에는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는데 처칠부터가 "미국인들은 왜 그토록 버마루트의 개통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고 영국 동남아 전구 사령관인 웨이블은 인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중국군의 인도 주둔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틸웰의 강력한 요구로 웨이블은 일단 람가르에 있는 포로수용소를 중국군의 훈련장으로 제공키로 합의합니다. 당시 람가르 포로수용소는 북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 2만여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약간의 개조를 통해 훈련장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이블은 스틸웰이 한창 중국군의 훈련에 착수하고 있던 9월말에도 재차 문제를 제기하여 훈련소를 아예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루즈벨트가 직접 개입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북부 인도 자르칸드주에 있는 람가르.  

 

스틸웰의 계획은 10만명의 중국군을 축차적으로 미국식으로 훈련시켜 43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버마에서 반격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틸웰과 함께 인도로 퇴각한 제22사단과 제38사단 3만여명이 우선 람가르에 도착하여 X군으로 편성되어 8월 26일부터 훈련을 시작합니다. 스틸웰은 장개석에게 추가로 병력을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여 중국군은 수송기를 타고 험프루트를 넘어 인도로 공수되었습니다. 12월말까지 3만 2천명이 미군에 의해 훈련받았고 44년말까지 람가르 훈련소를 거쳐간 중국군은 총 8만 5천명에 달했습니다. 

 

 

미군 교관에 의해 훈련중인 중국군 병사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34960204 

 

X군은 2개 보병사단(제22사단, 제38사단)으로 편성되었고 1개 사단은 1만 2천명으로 미국식의 3각 편제에 따라 3개 연대로, 1개 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X군 직속부대로 3개 포병연대(1개 연대당 75mm, 105mm 곡사포 36문), 1개 수송연대(차량 400대), 2개 공병연대, 2개 화학연대, 1개 기마치중연대, 1개 특무대대, 1개 통신대대, 1개 전차 훈련소가 있었습니다. 편제는 물론 장비도 모두 미제로 무장한 이 2개 사단은 중국군 최정예부대로서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X군과는 별도로 운남에서도 Y군이 편성됩니다. 스틸웰은 먼저 30개사단을 재편성하고 추가로 계림에서 Z군 30개사단을 편성하여 향후 중국전선에서의 반격에 활용할 생각이었습니다. X군과 달리 이들에 대한 통제권은 전적으로 중국에게 있었으며 미군은 단지 훈련과 장비의 공급을 맡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43년 4월부터 곤명에서 Y군이 편성되어 축차적으로 훈련과 재편성을 실시합니다. 이들의 훈련을 위해 각 부대에서 8천여명의 교관을 차출하여 람가르 훈련소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Y군은 11개군 32개사단으로 편성되며 총 41만 2600명이 필요했으나 실제 인원은 그 절반정도인 22만 7천여명에 불과하여 18만명이 결원인 상태였고 이에 대한 보충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미국의 선유럽전략에 따라 대중원조의 우선순위는 가장 낮았고 따라서 스틸웰의 계획과는 달리 Y군의 증강은 지지부진했으며 Z군은 종전까지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Y군의 훈련과 장비는 미군이, 지휘권은 중국이 가진다는 이중적인 구조는 이후 Y군을 놓고 중미간의 심각한 갈등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43년말까지 6개군 15개사단이 재편 및 훈련을 완료하였고 1개 사단의 정원은 1만 300명이었으나 실제로는 7~8천명정도였으며 6천명이하인 부대들도 있어 1개 군의 전체 병력이 2만명도 채 되지 못했습니다. 장비의 보급은 미국이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약속했음에도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군수품이 매우 부족하여 부족분은 중국이 알아서 보충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인도에서 미국식으로 완편된 X군에 비해 격차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틸웰이 구상한 "애나킴 작전"은 중국군의 편성과 훈련이 완료되는대로 X군이 살윈강 서쪽에서, Y군이 동쪽에서 협공하여 버마 북부를 장악한후 남하하여 북상하는 영국군과 함께 랭군을 탈환한다는 것이며 또한 인도 레도에서 출발한 공병들은 정글을 뚫고 운남 곤명까지 연결하는 "레도공도"를 개통한다는 생각이었으나, 그의 야심찬 의욕과는 달리 정작 미영중 삼국 수뇌부들은 시큰둥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었던 미, 영에게 버마탈환은 한낱 부차적인 문제였고 스틸웰의 계획을 위해 물자와 병력을 분산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인도는 스틸웰이 구상하는 대규모 공세를 감당할 병참기지가 없었고 철도와 도로망도 극히 빈약했습니다. 43년에는 극심한 흉년으로 100만명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인도 주둔 영국군은 사기도 낮았고 물자도 심각하게 부족했으며 전염병이 만연하여 전군의 85%가 말라리아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동부지역에서는 대규모 반영 폭동이 일어나 웨이블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일본군에게 공세를 취할 형편이 아니었죠. 게다가 42년말 영국군이 제14사단을 동원해 제한적으로 시도했던 아라칸 공격작전은 지형의 험난함과 일본군의 강력한 방어선에 가로막혀 지지부진하다가 43년 3월 일본군이 반격하자 참담하게 실패로 끝난채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여단장 1명을 비롯해 25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찰스 윙게이트준장이 지휘하는 제77인도여단(이른바 "윙게이트병단")은 임팔을 출발하여 일본군의 후방에 깊숙히 침투한후 습격과 파괴작전을 수행한후 철수하였으나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43년 2월 8일 임팔에서 출발한 윙게이트 병단은 친드윈강을 건너 유격전을 펼치며 철도와 다리를 폭파하였습니다. 버마 깊숙히 진격하면서 병참선이 끊어지고 우세한 일본군에게 가로막혀 결국 3월 24일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합니다. 당초 3천명이었던 부대는 큰 손실을 입었고 2천200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윙게이트 병단의 활약은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으나 1년전 동경을 폭격했던 두리틀 폭격대와 마찬가지로 연합군이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정글을 뚫고 일본군의 배후를 찔렀다는 점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처칠은 윙게이트를 대담무쌍한 천재라며 극찬하였습니다. 한편 무다구치는 윙게이트의 성공을 보면서 임팔공격을 계획합니다.    

※ 사진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 98  

 

스틸웰의 반격작전에서 중국군은 핵심이었으나 장개석은 중국군이 공세에 나서기 위해서는 우선 미, 영의 적극적인 개입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X군과 Y군은 중국군의 최정예부대였고 만약 스틸웰이 충분한 준비없이 성급하게 공격했다가 또다시 실패했을때 그 댓가는 중국이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신중할 수 밖에 없었죠. 그는 미국이 말로만 중국을 동맹국이라고 할뿐 막상 영, 소에 비해 대중원조는 한낱 생색내기 수준에 불과했고 자신들이 유럽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일본과의 전쟁에 중국인들만 희생시키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래부터 대단히 급한 성격이었던 스틸웰은 초조하고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대중원조를 무기로 장개석을 압박하고 중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했으나 이는 도리어 역효과만 날 뿐이었습니다. 일개 군인에 불과한 스틸웰의 월권은 중국으로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고 루즈벨트는 "장개석을 모로코 술탄처럼 다루어서는 안된다"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센놀트는 스틸웰이 군사적 풋내기이며 단지 자신의 복수에만 불타 무리한 작전을 고집한다며 비난하자 양자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무기대여법에 의해 원조되는 한줌의 보급품을 놓고 두사람은 서로 우선권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죠. 

 

사실 스틸웰은 외로운 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른바 "토치 작전"이라 불리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상륙과 이어서 유럽본토에 제2전선을 꿈꾸고 있던 연합군은 애나킴 작전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하자 장개석 역시 같은 자세를 취합니다. 결국 43년 5월 워싱턴에서 열린 트라이덴트회의에서 애나킴 작전은 취소되었고 센놀트의 항공작전에 집중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버마에 대한 공격은 단지 레도 공도를 개통하기 위한 북부지역에 대한 제한된 공격만 용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연합군간의 지휘의 일원화를 위해 43년 8월 인도, 버마를 별도로 연합군 동남아전구로 편성하여 사령관에는 루이스 마운트배튼중장이, 부사령관에는 스틸웰이 임명되었습니다. 

 

 

연합군 동남아전구 사령관 마운트배튼 백작(1900~1979).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이자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배우자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숙부. 2차대전중 비시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의 침공을 지휘한후 동남아전구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버마탈환전을 지휘하였습니다. 종전후에는 마지막 인도총독으로서 인도의 독립과 인도-파키스탄의 분리를 수행하였고 원수로 승진하여 대영제국 국방참모본부 의장을 지낸후 명예롭게 퇴임하였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스틸웰은 센놀트의 말도 안되는 호언에 루즈벨트와 처칠이 속아넘어갔다고 분개했지만 실상 가장 큰 이유는 많은 물자와 병력을 요구하는 스틸웰의 구상이 유럽을 우선시한다는 연합군의 기본 전략에 배치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일본과의 전쟁은 단지 현상유지를 원했고 따라서 중국전구에 대한 지원은 명목적인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버마에 대한 작전 역시 군사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중국을 계속 연합국에 붙잡아 두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판단이었죠.   

 

이런 연합국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불리한 여건속에서 스틸웰의 야심찬 반격계획은 당초 42년 11월에서 계속 연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43년 가을에 오면 X군 2개 사단 2만 3천명에 대한 훈련과 재편이 끝났고 Y군 역시 15개사단이 준비되었습니다. 또한 임팔에는 슬림의 제14군 휘하의 제4군단(제17인도사단, 제20인도사단, 제23인도사단)이, 남쪽 500km 떨어진 아라칸에는 제15군단이 있었고 44년 2월에는 미본토에서 프랭크 메릴 준장이 지휘하는 제5307혼성연대(이른바 "메릴부대")가 파견되었습니다. 스틸웰은 이들을 밑천으로 삼아 제2차 버마원정을 결정합니다. 

 

 

이른바 "메릴의 학살자"라고 불리운 제5307혼성연대. 2900명으로 편성된 이 특수부대는 윙게이트병단을 참고하여 편성된 일종의 유격부대로서 아시아대륙에 파견되는 최초의 미군부대였습니다. 지휘관인 프랭크 메릴은 제1차 버마원정당시 스틸웰의 참모로서 스틸웰과 함께 정글의 지옥을 탈출하였습니다.  

※ 사진출처 : http://www.necrosant.net/zbxe/5611  

 

그의 계획은 X군을 인도-버마국경의 나가산지를 돌파하여 레도공도를 건설하는 미군공병대를 엄호하고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후캉계곡을 점령한후 모가웅과 미치나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는 길을 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버마에서의 일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데다 동맹국들과 사전에 충분한 상의를 거친 것이 아니었기에 이후 심각한 불화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노력과 고생끝에 버마에서 승리하고도 자신마저 몰락시키게 되었습니다. 

 

버마의 우기가 끝나는 43년 10월말 중국군 제38사단이 국경을 돌파하여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런데 스틸웰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고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장개석은 버마의 일본군이 적어도 8개 사단이라고 말했으나 스틸웰은 5개 사단에 불과하다고 끝까지 고집부렸고 북부버마에는 일본군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장개석의 말대로 가와베 마사카즈중장이 지휘하는 버마방면군은 3개군 8개 사단이었으며 제15군 3개사단이 임팔과 후캉방면에서, 제28군 3개사단이 랭군 일대를, 제32군 2개사단은 버마 동북부와 노강 서안지구에서 중국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추가로 2개 사단을 증원하고 있었죠.  

 

따라서 손입인중장의 제38사단은 다나카 신이치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18사단을 상대로 악전고투하면서 전진했으나 곧 후캉계곡에서 교착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요상중장의 제22사단을 추가로 투입하고 갓 버마에 도착한 메릴부대를 일본군 후방인 후캉계곡의 마인칸에 침투시켜 일본군을 포위섬멸하려고 했으나 이를 미리 파악한 일본군은 교묘하게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44년 3월 5일 중미연합군은 후캉계곡을 완전히 점령하였고 이어서 남하하여 모가웅으로 진격합니다. 

 

 

후캉계곡을 향해 진격중인 중국군 제38사단. 완전히 미국식으로 편성, 무장된 중국군 최강부대였습니다. 종전후 이들은 중국으로 귀환하여 "신1군"으로 개편되었고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만주에 투입되었으나 만주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공산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 121

 

또한 스틸웰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44년 2월 윙게이트의 제3인도사단이 대량의 글라이더를 활용해 제18사단의 후방인 인다우에 대한 대규모 강하작전을 실시하여 일본군의 병참선을 차단하였고 버마 남서부에서는 영국군 제15군단이 제2차 아라칸작전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전선에서 맹장으로 명성을 떨친 하나야 다다시중장의 일본군 제55사단은 "하호작전(ハ号作戦)"을 발동하여 벵골만의 영국군에 대해 성급한 공격을 시도했다가 압도적인 반격에 밀려 작전 15일만에 큰 피해만 입고 퇴각해야 했습니다.  

 

버마탈환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같았으나 스틸웰은 충격적인 뉴스를 접합니다. 3월 8일 무다구치 렌야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15군이 "우호작전(ウ号作戦)"을 발동하여 연합군의 후방기지인 임팔을 공격한 것이었죠. 원래 무다구치는 험난한 지형때문에 임팔에 대한 대규모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윙게이트병단이 임팔에서 자신들의 후방에 침투하자 "가능하다"라고 판단하고 인도 공략계획을 주장합니다. 그의 계획은 임팔에 대한 선제공격을 실시하여 영국군의 위협을 제거하고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을 지원하여 임팔에 괴뢰정권을 수립한후 인도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1897~1945). 영국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후 귀국하여 간디의 비폭력투쟁에 참여하였고 1930년대에 캘커다 시장과 인도 국민회의 의장을 지냈으나 급진적인 성향이었던 그는 간디의 방식이 인도에 독립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영국의 식민지배만 더 강화할 뿐이라며 1939년 국민회의를 탈퇴함으로서 간디와 결별합니다. 41년 1월 소련을 경유하여 독일로 건너간 그는 일본과 협력하라는 히틀러의 조언에 따라 43년 5월 독일과 일본 잠수함을 번갈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43년 10월 21일 일본의 후원을 받아 싱가포르에 자유인도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보스는 국가주석 겸 수상의 자리에 앉았으나 실상 일본의 괴뢰정권에 불과했습니다. 임팔작전이 철저하게 실패함으로서 그의 인도 귀환은 실패하였고 이후 일본이 패망하고 8월 18일 보스는 대만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합니다. 수장인 보스가 죽자 자유인도 임시정부 역시 와해되었습니다. 

 

 

독일제 MG-34와 인도국민군(INA) 병사. 영국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꿈꾸던 보스는 독일에서 인도인 포로들중 자원자를 받아  "인도 국군(Azad Hind Fauj)"을 편성하였고 숫자는 약 3,500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보스가 일본으로 떠나자 이들은 독일군에 편입되어 SS 인도연대로 개편되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 투입되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보스는 동남아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새로이 인도국민군을 창설하였고 그 숫자는 4만5천에 달합니다. 44년 3월 일본이 임팔작전을 개시하면서 괴뢰군인 인도국민군 1개사단도 투입하였고 이 전역에서 50%이상의 손실을 입은채 소수의 생존자들은 간신히 버마로 도주합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72228931 

 

무다구치의 야심찬 임팔침공은 그러나 매우 졸속적인 것이었습니다. 병참선을 위한 도로 공사는 자재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으며 대규모 공세에 필요한 물자도, 보급을 뒷받침할 역량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공권에서는 압도적으로 열세했습니다. 그럼에도 영국군을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한 무다구치는 "승리는 기정사실"이라며 임팔을 점령한후의 통치계획과 물자 확보에 대해서만 열을 올리고 정작 작전준비에 대해서는 게을리합니다. 이 작전을 "욕탕에서 결재한" 도죠조차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습니다.  

 

공세에 동원된 부대는 제15군 산하 3개사단(제15사단, 제31사단, 제33사단) 8만6천명이었습니다. 이외에 인도국민군 1개 사단 6천명도 동원되었으나 주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인도인들중에서 구성된 이 부대는 어떻게 보더라도 오합지졸이었고 사기도 매우 낮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상대해야할 영국군 제4군단은 3개 인도사단 15만명정도였습니다.   

 

무다구치의 임팔공격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우선 제33사단이 친드윈강을 도하하여 영국군 제17인도사단과 제20사단을 각각 공격한다.

2. 남쪽에서 제31사단이 북상하여 임팔북쪽 100km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코히마를 점령하여 영국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영국군의 증원을 저지한다. 

3. 영국군은 임팔에 배치된 예비대인 제23인도사단을 출동시키면 제15사단이 영국군의 허를 찔러 인팔로 진격하여 영국군을 포위한다. 

4. 작전기한은 20일이내로 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탁상공론에 불과한 작전이었으나 무다구치는 일본군이 공격하기만 하면 영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낙관하였습니다. 게다가 병참은 소와 코끼리, 수천마리의 양을 끌고가며 일단 영국군을 격퇴한후 적의 것을 약탈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식량은 대략 3주분량이 준비되었고 수송수단의 결여로 전적으로 인력과 우마에 의존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병사들은 잡초를 먹는 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초반에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3월 8일 야나기다 겐조중장이 지휘하는 제33사단이 진격을 시작하여 13일 영국군 제17인도사단의 후방에 진출하여 영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증원부대로 파견된 제23인도사단 2개 여단도 포위되었습니다. 제20인도사단 역시 퇴로가 차단되었습니다. 나머지 2개 사단 역시 15일까지 친드윈강을 도하하여 사토 고토쿠중장의 제31사단은 21일 코히마에 진출하여 영국군 수비대를 포위하였고 야마우치 마시부미중장의 제15사단은 28일 임팔을 포위합니다. 영국군은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무다구치의 작전은 손쉽게 성공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미 북부 버마에 깊숙히 진출한 상태였던 스틸웰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군의 역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약 임팔이 함락된다면 스틸웰의 부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적진 한가운데에서 고립된채 괴멸될 상황이었습니다. "일본군의 공격은 우리를 고립시키고 영광스러운 1944년 봄의 원정을 끝장낼 것이다." 

 

당초 일본군을 과소평가했던 그는 이번에는 일본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나머지 장개석에게 운남에서 대기중인 Y군을 즉각 일본군을 협공하는데 투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스틸웰의 버마 탈환 계획에 시큰둥하고 있던 장개석은 화북에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유일한 전략 예비대인 Y군을 스틸웰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였고 그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직접 나서 "당장 Y군이 버마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미국의 원조는 당장 중단될 것"이라며 3번에 걸쳐 전보를 보내자 결국 장개석은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월 11일 Y군 12개사단은 혜통교 상류에서 도하하여 마쓰야마 유조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56사단을 공격하였으나 매우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일본군의 저지로 곧 교착상태에 빠졌고 일본군의 사상 최대 작전인 "이치고작전"앞에서 중국의 동부전선 전체가 절대절명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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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9.03 드디어 한국독립의 일등공신 무다구치 렌야 선생이 활약하는 군요 ㅋㅋㅋ
  • 작성자Aetius | 작성시간 13.09.03 어찌보면 역설적이지만 독소만큼 중국군의 재건에 있어서 큰 도움된 나라는 없나보네요. 미국 또한 랜드리스로 중국에게 엄청난 물자를 퍼부어줬을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연재를 통해 참 많은 생각들이 바뀝니다.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3.09.04 잡초를 먹는 훈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쳐버릴듯한 정신세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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