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35화 < 무다구치의 실패, 레도 공도를 열다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9.04|조회수1,244 목록 댓글 3

 

44년 3월 임팔작전 개시 당시 쌍방의 대치상황 

 

버마 북부와 남부에서 이미 연합군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된 상황에서 무다구치의 임팔공략작전은 시기적으로도 적절치 못했을 뿐더러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강폭 800m의 친드윈강을 도하해도 그 앞에는 2천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들이 연이어 펼쳐져 있었습니다. 원시림으로 빽빽한 정글에는 온갖 독충과 뱀, 거머리가 들끓고 있었죠. 이것은 연합군에게도 고통이었지만 일본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이 양동작전으로 실시했던 제55사단의 "하호작전"은 전차와 항공기, 화포를 앞세운 영국군 제15군단의 압도적인 반격에 밀려 패주했고 도리어 영국군은 이 여세를 몰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윙게이트의 제3인도사단(일명 "친디트부대" 또는 "윙게이트병단") 3개 여단 9천명은 대규모 공수작전을 통해 교통의 요충지인 인다우에 낙하하여 점령한후 간이 비행장을 건설합니다. 비행장의 이름은 "브로드웨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송기로 후속부대를 부지런히 실어날라 신속하게 거점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임팔방면의 제15군 3개사단과 제18사단의 병참선이 완전히 차단되어 버리죠. 

 

제공권에서 압도적인 열세에 놓인 제 5비행사단장 다조에중장은 버마방면군 사령관 가와베중장에게 임팔작전을 중지하고 우선 후방에 침투한 윙게이트 병단부터 격퇴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미 대본영으로부터 작전을 승인받은 이상 이제와서 번복하는 것은 체면문제라며 작전의 강행을 지시합니다. 대신 윙게이트 병단에 대해서는 제24혼성여단 외에 제18사단, 제56사단에서 각각 1개 대대를 차출하여 이들을 격퇴할 것을 지시하지만 이미 이정도로는 어림없었죠. 윙게이트 병단은 이미 1만2천이 넘었으며 비행장 주변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다 B-25, P-51 등 막강한 항공지원을 받아 일본군의 공격은 단숨에 격퇴되었으며 일본군은 북부버마에 대한 어떤 증원도 할 수 없었죠. 

 

 

윙게이트소장이 지휘하는 유격부대인 친디트부대. "친디트"란 버마의 사원을 수호하는 사자상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윙게이트에 의해 철저하게 훈련을 거친후 44년 2월 작전을 개시하여 일부는 도보로, 일부는 글라이더로 대담하게 일본군의 후방에 침투하여 대대적인 유격전과 파괴활동을 전개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44년 3월 24일 전선 시찰후 복귀하는중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사진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115 

  

작전을 시작도 하기전에 병참선부터 차단되었음에도 일본군 3개사단은 당초 계획대로 3월 8일 친드윈강을 도하하여 인도-버마 국경을 향해 진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군은 시작부터가 그야말로 지옥의 연속이었습니다. 병사 1명당 소총 240발, 수류탄 6발, 약 3주분의 식량을 메고 험한 산길과 정글을 뚫고 적진을 향해 전진하였고 또한 그 뒤에는 탄약과 식량, 무기 보급품을 잔뜩 실은 코끼리, 소, 양, 산양 등 3만마리에 달하는 가축들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친드윈강의 거센 물살을 건너다 약 1/3의 가축들이 떠내려갔고 이어서 험준한 아라킨산맥을 건너면서 많은 수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린데다 더욱이 수많은 가축들을 끌고 가는 이 대행렬은 그대로 연합군 폭격기에게 노출될 수 밖에 없어 수시로 공중 폭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때문에 적과 마주치기도 전에 대부분의 물자와 무기, 식량을 상실해 버립니다. 게다가 워낙 험준한 지형상 대구경 야포와 같은 중화기의 운반이 어려워 화력에서도 열세였습니다. 제공권도 상실한 상태라 항공기를 통한 공중수송도 불가능했습니다. 

 

 

험준한 산길을 타고 코히마로 진격중인 일본군 기병부대. 그러나 워낙 지형이 험준한데다 식량부족과 전염병의 만연으로 전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2/3이상의 말과 많은 병사들이 중간에서 쓰러졌습니다.      

※ 사진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150    

 

무다구치가 수립한 작전의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영국군의 허를 찌르고 미처 방비를 강화하기전에 신속하게 영국군의 배후를 돌아 임팔을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다수의 가축까지 끌고 가면서 그와 같은 쾌속진격을 요구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억지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실패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죠. 

 

병참의 어려움과 궁핍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정글을 뚫고 3월말에는 영국군의 배후에 진출하여 야나기다중장의 제33사단은 일선의 영국군 2개사단을 포위하였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제23인도사단 2개 여단 역시 고립되었습니다. 3월 21일에는 사토중장의 제31사단이 코히마에 진출하여 소수의 수비대를 포위합니다. 야마우치중장의 제15사단 역시 3월 28일 임팔 부근까지 진출합니다.  

 

일본군의 임팔 침공. 맨위쪽(우익)이 제31사단, 중앙이 제15사단, 남쪽(좌익)이 제33사단.  

※ 사진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152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군의 역습으로 영국군은 완전히 허를 찔린 것같았지만 그러나 우세한 제공권과 화력은 곧 그 효과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던 제17인도사단과 제20인도사단은 공중보급을 받으며 압도적인 화력과 전차부대를 앞세워 일본군 제33사단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임팔로 퇴각하였습니다. 또한 남쪽의 아라칸지구의 제15군단은 일본군 제55사단의 공세를 격퇴한후 전면적인 반격으로 전환하였고 제5인도사단을 신속하게 임팔로 공수하여 전선을 보강합니다. 이어서 제33군단 휘하의 제7인도사단과 영국군 제2보병사단까지 추가로 증원되죠. 이로서 쌍방의 균형은 단숨에 영국군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전황은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는데, 코히마는 인구 3천명의 작은 산골마을이었으나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만약 일본군이 코히마를 점령한후 그 북쪽 74km 지점에 있는 벵골과 아삼을 연결하는 철도 보급선인 디마푸르까지 장악한다면 일본군은 막대한 물자를 노획하여 단숨에 보급을 해결할 수 있을 뿐더러 임팔에 있는 제4군단 전체의 퇴로는 물론 스틸웰의 X군과 대중원조물자를 수송하는 험프루트 역시 완전히 차단될 판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 영국군은 아샘지방 전역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죠. 그러나 코히마의 수비대는 고작 1천명에 불과했고 디마푸르는 아예 무방비상태였습니다. 

 

4월 5일 제31사단휘하의 선봉인 미야자키지대 4천명이 코히마 외곽까지 진출하여 다음날 새벽 코히마를 기습하자 당황한 영국군 수비대는 코히마를 버리고 인근의 고지로 후퇴합니다. 디마푸르-코히마지구의 수비를 맡은 영국군 제33군단 스톱포드 중장은 일본군이 별다른 수송수단도 없이 도보에만 의존해서 이렇게 빨리 코히마까지 진출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부랴부랴 제161여단을 급파했으나 일본군에게 도리어 퇴로가 차단됩니다.  

 

무다구치는 코히마를 점령하고 영국군을 고립시킨 이상 일부 병력을 돌려 단숨에 디마푸르를 점령할 것을 가와베 중장에게 건의했으나 가와베는 "이것은 당초 계획에 없는 것"이라며 거부하였고 사토는 다마푸르로 향하던 병력을 되돌릴 수 밖에 없었죠. 덕분에 영국군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영국군 제14군 사령관 슬림중장은 이런 일본군의 지휘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공군이 사토의 사령부를 폭격하려고 하자 "사토는 나의 가장 믿음직한 친구"라며 당장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미 일본군은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고 있었으며 아무런 보급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포위망 안쪽에 있는 영국군의 포격과 전차포의 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숫적 우세를 통해 매일 밤마다 "반자이"를 외치며 맹공을 퍼부었고 영국군의 방어선은 점점 축소되었습니다. 1주일이 지나자 영국군 수비대 역시 물과 탄약, 식량이 바닥났고 탄약을 공중보급했으나 일본군 진지에 떨어져 영국군을 향해 발사되었습니다. 4월 18일 수비대의 전멸이 눈앞에 다가오고 최후의 공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드디어 제161여단이 일본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코히마에 도착합니다. 영국군의 병참선은 다시 연결되어 이제 수세에 몰리는 것은 일본군이었습니다. 

 

 

전차를 앞세워 코히마를 향해 진격중인 영국군.   ※ 사진출처 : http://www.necrosant.net/zbxe/5679 

 

한편, 포위했던 영국군 2개 사단을 놓쳐버린 일본군 제33사단장 야나기다 중장은 매우 천천히 진격하면서 무다구치에게 이미 피아간의 전력차이가 너무 크고 병참의 어려움을 이유로 작전의 즉각 중지와 전력을 보존하여 버마 방위를 강화할 것을 건의하지만 격노한 무다구치는 그를 해임하고 다나카 노부오 소장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또한 제15사단장 야마우치 역시 전과가 신통치 않다며 시바다 우이치 중장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무다구치의 감정적인 횡포나 다름없었으며 사단장이상 고위지휘관에 대한 인사권은 천황에게 있다는 것을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신임 다나카 중장은 5월 20일 임팔의 관문인 비센푸르 요새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다나카 중장은 휘하 장병들에게 요새를 함락시킬때까지는 절대 살아돌아오지 말 것을 강조하며 옥쇄에 가까운 공격을 퍼부었으나 전차의 엄호를 받는 영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고 심지어 전사자의 시체를 언덕처럼 쌓아올린후 그것을 은폐물로 삼아 공격하고 결사대를 모집해 전차를 향해 육탄돌격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만 낼 뿐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과거처럼 단순한 선형방어선이 아니라 적의 우회를 용납치 않는 원형방어선을 구축하고 막대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공수하여 방어선을 강화합니다. 상공에는 쉴새없이 영국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폭탄과 기총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인도의 영국 전술공군은 3월부터 7월까지 임팔전역동안 무려 29,660소티나 출격하여 일본군을 괴멸시키고 병참선을 파괴하였습니다.

 

제15사단도 임팔을 눈앞에 두고 교착상태에 빠진채 영국군의 방어선을 향해 무익한 공격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3개 사단 모두 식량과 탄약은 완전히 바닥났고 많은 병사들이 전염병과 아사상황에 직면하자 조속한 보급을 요청했으나 무다구치는 "곧 보낼 것이니 공격하라", "식량은 적에게서 구하라"따위의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일본군 병사들은 무다구치를 "무챠구치(無茶口 - 제멋대로 지껄이는 입)"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령부 창고에는 대량의 식량이 방치된채 썩어가고 있을 정도였고 무다구치는 사령부 근처의 요정에서 기생들과 유유자적한 시간만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제31사단장 사토는 코히마 공략이 불가능하며 작전 중지와 후퇴를 몇차례나 요청했으나 무다구치는 끝까지 거부하고 공격을 속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게다가 영국군 제2인도사단과 제17인도사단이 반격을 개시하였고 제58연대는 전멸당합니다. 이미 제31사단의 피해는 전사 3천, 부상 4천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고집만 부리는 무다구치에게 격분한 사토는 휘하 참모들과 의논하여 결국 6월 3일 독단적으로 퇴각명령을 하달합니다. 이것은 일본 육군사상 사단장이 직속상관의 명령을 묵살한채 후퇴한 최초의 항명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선봉에 서서 생존자들과 함께 퇴각하지만 퇴각길은 비참하여 말라리아와 기아에 허덕이던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졌고 길목마다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와 허연 뼈가 겹겹히 쌓였습니다. 

 

 

패주하는 일본군이 지나가는 곳에는 수많은 시체만이 남았습니다. 일본군은 동료들의 시체들을 보며 "백골가도" 또는 "야스쿠니가도"라고 불렀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038550207

 

물론 무다구치 역시 이런 비참한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체면때문에 상부에 "후퇴"를 상실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6월 5일 가와베와의 면담에서도 서로 안색만 살필 뿐이었습니다. 후에 무다구치는 "임팔작전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단지 내 얼굴을 보고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랬다"라고 술회하였고 가와베는 가와베대로 자신의 일기에 "무다구치의 표정은 하도 단호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통할 것같지 않았다"라고 씁니다. 결국 둘다 자신의 체면에만 급급하고 서로에게 책임만 떠넘기려는 것일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무능함으로 인해 철수는 더욱 지연되었고 병사들의 희생만 더 늘어났습니다.  

 

사토는 할복을 명령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군의에 의해 급성과로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강제 예편된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보내졌습니다. 제31사단이 퇴각하자 제15사단도 전의를 상실한채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의 지휘계통마저 완전히 무너진채 병사들은 개별로 도주하였고 시체와 중환자들은 곳곳에 버려진채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추격해 온 영국군은 전염병이 자신들에게도 전파될 것을 우려해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르자 무다구치는 가와베에게 넌지시 작전중지를 전달했으나 가와베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인팔 동쪽에 있는 팔렐에 대한 공격을 명령합니다. 진퇴양난에 몰린 그는 사령부 뒷산에 올라가 참모들과 함께 "고사"를 지내는 포퍼먼스까지 하자 결국 가와베도 백기를 들었고 7월 9일 전면 철수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수가 아니라 비참한 패주의 행렬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가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려 있었고 패잔병들은 무기도 식량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부상병과 환자를 이끌고 적의 추격과 폭격을 받아가며 정신없이 도주할 뿐이었습니다.

 

약 4개월간의 임팔작전은 일본 육군 전사상 최악의 패전이자 졸전이었습니다. 당초 3개 사단 8만6천명중 전사자 3만2천, 아사자는 4만이 넘었고 단지 1만2천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출발했던 6천명의 인도 국민군 역시 생존자는 1천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없었죠. 전투에 참가했던 모든 사단장들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전적으로 "무다구치의 무능"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채 참모들을 모아놓고 눈물을 흘리며 훈시하였습니다.

 

"사토는 식량이 없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군명을 어기고 퇴각했다.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무기가 없어도, 탄환이 없어도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지 않은가.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지 않은가.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찰 것이고 발도 없으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인에게는 대화혼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이다."

 

그는 장장 한시간 넘도록 장황하게 연설했지만 정작 영양실조와 피로에 지친 장교들은 그의 앞에서 하나둘씩 차례로 쓰러졌습니다.

 

 

임팔작전을 주도했던 제15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 노구교사변 당시 현지 연대장이었던 그는 독단적으로 사태를 확대하여 전면전으로 비화시켰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귀신 무다구치"라고 불리었는데 "바보같은 대장이 적보다 더 무섭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또한 "무다구치 각하가 좋아하는 것은 첫째가 훈장, 둘째가 여자, 셋째가 신문기자"라며 비웃음 당했습니다. 임팔작전이 실패하자 자신의 참모인 후지와라 이와이치 중좌에게 "자결하고 싶다"라고 말하자 후지와라는 "옛부터 말로만 죽네죽네 하는 인간에게는 죽을 마음이 없습니다. 사령관으로서 진실로 책임을 느끼신다면 조용히 할복하십시오. 누구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작전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신랄하게 비난했으나 끝까지 할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예편되었으나 다시 육군예과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일본 항복후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일본군에게 큰 해를 끼침으로서 영국군의 작전에 공헌했다는 점을 참작해 불기소 석방되었습니다.

 

구태의연했던 대본영과 육군 상층부 역시 임팔작전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따지지 않은채 그냥 덮어버렸고 어느 누구도 이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그 원인을 제대로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버마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되어 북부 버마의 수비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초 작전을 마지못해 승인했던 도죠는 "인팔작전은 44년이 아니라 42년에 해야 했다"라며 후회하였습니다. 만약 처음에 구상했던 대로 버마를 점령한 직후 그 여세를 몰아 인도를 침공했다면 약화될대로 약화된 영국군으로서는 일본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반대했던 것도 무다구치였고 뒤늦게 작전의 강행을 주장했던 것도 무다구치였습니다.

 

만약 그가 임팔작전을 고집하지 않고 버마의 수비를 강화하는 쪽을 택했다면, 제15군 3개사단의 병력을 북부버마를 침공한 스틸웰에게 돌렸다면 스틸웰의 중미연합군은 적지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괴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버마전역의 전개자체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4월초 임팔전역이 점점 악화되자 스틸웰은 후캉계곡에서의 작전을 중지하고 중국군 제38사단을 구원군으로 파견할 것을 영국군에게 제안했으나 제14군 사령관 슬림중장은 "걱정할 것 없다"라며 병참선을 반드시 지켜낼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후캉계곡을 점령한 스틸웰의 중미연합군은 모가웅에서 일본군 제18사단과 대치합니다. 임팔의 상황이 점차 개선되자 스틸웰은 메릴부대(제5307혼성연대)와 중국군 2개 연대로 미치나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찰스 헌터대령이 지휘하는 특공대는 해발 6천피트의 험준한 쿠몬산맥과 정글을 뚫고 5월 17일 북부 버마의 요충지인 미치나 교외 서쪽에 있는 비행장을 기습합니다. 여기에는 고작 1개 소대밖에 없었고 중국군 제150연대가 공격해 간단하게 점령하였습니다.

 

사실 당시 미치나는 거의 무방비상태였기에 그들이 그대로 미치나에 돌입했다면 손쉽게 점령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북부버마의 전황은 훨씬 쉽게 전개되어 중국으로 향하는 레도공도도 보다 빨리 개통되었을 것입니다. 같은 시간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붕괴되고 있던 중국의 전황은 완전히 바뀌어 이후 국공내전의 결과에까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국군 정보부는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쌍방간의 심한 불화와 갈등으로 인해 스틸웰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스틸웰은 특공대에게 단지 비행장을 확보하라는 명령만 했을뿐 그 다음에 뭘 어떻게 하라고는 지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귀중한 시간과 호기를 놓쳤습니다. 그 사이 일본군은 신속하게 미치나의 방어선을 강화하여 포병과 공병을 포함해 4,6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근 2개월반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스틸웰이 미치나를 점령한 것은 8월 3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군 1,227명을 포함해 5,383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미치나 전투는 "작은 갈리폴리"라는 오명이 붙었습니다. 일본군 수비대 역시 전멸당했으며 지휘관인 미지카미 겐조 소장은 스스로 할복하였습니다.

 

 

스틸웰의 제2차 버마원정 전개상황.    ※ 사진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127

 

6월 11일 모가웅이 점령되었고 그동안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던 일본군 제18사단은 거의 붕괴된채 후퇴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임팔에서 일본군은 완전히 괴멸된채 소수의 패잔병들만이 정글을 뚫고 도주하고 있었죠. 점차 상황은 연합군쪽에게 유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는데 스틸웰이 미치나를 점령했다는 뉴스에 처칠과 마운트배튼은 격노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애초에 영국군과는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었고 전구사령관으로서 스틸웰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마운트배튼은 처칠에게 스틸웰의 해임을 건의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스틸웰을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해 작전중이던 제3인도사단은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미치나 점령을 돕겠다고 제안했으나 스틸웰은 필요없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후 그의 예상과 달리 미치나에 대한 일본군의 방어선이 강화되어 교착상태가 되자 제3인도사단이 인도로 철수한다는 요청 또한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메릴부대 역시 스틸웰의 독단적인 지휘에 불만을 품고 심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그들은 해체되었습니다.

 

미치나에서의 고전과 버마의 몬순기간으로 스틸웰의 진격은 한동안 지체되었고 10월부터 다시 재개되어 운남-버마의 국경에 있는 바모를 공격하여 12월 15일 점령합니다. 한편, 운남의 Y군은 5월 11일 노강을 건너 일본군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42년 5월부터 근 2년동안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충분한 식량과 탄약을 비축한 일본군 제56사단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이용해 방어전을 펼쳤고 중국군은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제2사단과 제49사단에서 일부 병력을 증원하여 방어선을 보강했습니다. 결국 9월 8일에야 등충을 함락시킬 수 있었고 남쪽에 있는 용능은 11월 3일 점령합니다.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45년 1월 27일 운남-버마 국경에 있는 몽유를 점령하여 X군과 합류합니다. 드디어 인도와 버마, 중국을 연결하는 레도 공도가 개통되는 순간이었죠.

  

 

 

 

그러나 스틸웰은 그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일본군의 이치고작전에서 중국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전적으로 스틸웰때문이라며 비난하자 쌍방의 불화가 극에 달하였고 결국 10월 19일 그는 해임되어 본국으로 송환됩니다. 송환명령을 받았을때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땅콩(장개석)은 원래 제정신이 아니지만 루즈벨트마저 나를 실망시켰다. 나는 양심껏 명령을 수행했으며 후회는 없다. 미국의 배신을 목격한 것만 빼면"이라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가 짋어지고 있었던 과중한 업무와 역할은 분리되었고 버마전역은 그의 참모장인 다니엘 설턴중장이, 동남아전구 부사령관은 병참참모인 레이먼드 휠러 중장이, 그리고 중국전구는 마운트베튼의 참모차장이었던 웨드마이어 소장이 중장으로 승진하여 각각 맡게 되었습니다. 이런 권한의 분산은 중국-버마-인도전구에 있어서 지휘계통의 복잡함으로 인해 벌어졌던 수많은 불미스러운 일들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스틸웰은 북부 버마를 탈환한다면 중국은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본격적으로 외부의 물자가 유입되어 중국은 궁핍함을 벗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X군과 Y군을 미군식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시켜 정예부대로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추진력과 결단력은 분명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승리는 일본의 임팔작전이나 이치고작전과 마찬가지로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했고 전략적으로도 무의미했습니다. 미, 영의 수뇌부에게 중국과 버마전구는 단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처칠은 일본군의 인도 침입만 막으면 된다며 버마 탈환에 병력과 물자를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장개석은 장개석대로 영, 미가 시큰둥한 이상 스틸웰의 무모한 공격에 중국군만이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서로간의 딜레마였던 것이죠. 전술적으로도 적을 과소평가하여 성급하게 시도하였고 동맹국들과의 충분한 협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영, 중과 심한 갈등을 빚어야 했습니다.

 

만약 스틸웰의 버마 탈환이 반년이나 1년만 일찍 시작되었다면, 또는 스틸웰이 버마 탈환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Y군의 투입을 고집하지 않고 대신 일본군의 남하를 저지하는데 사용했다면 중일전쟁의 마지막 장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패한후 데오도어 H. 화이트를 비롯해 미국내 스틸웰에게 동정적인 많은 인사들은 장개석의 패배는 전적으로 스틸웰의 조언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며 그의 말대로 중국군을 개혁했다면 장개석은 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스틸웰이 제시한 개혁안은 미국이 이에 소요되는 막대한 물자를 제공한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미국의 전략상 그렇게 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오히려 스틸웰은 자신의 전선만 중시한 나머지 다른 전선이 붕괴되는 것은 의도적으로 무시하였습니다. 스틸웰이 레도공도를 뚫기 위해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사이 중국은 근 7년간 큰 희생을 치루어가며 지탱해 왔던 화중과 화남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것은 적의 살을 바르기 위해 우리편의 뼈를 자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스틸웰의 독주는 결과적으로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패배하는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레도공도. 인도 레도에서 출발하여 구 버마루트를 거쳐 운남 곤명까지 총 1천km에 달하는 길이었습니다. 공사는 온갖 난관의 연속이었습니다. 공병대원들은 소형불도저를 몰고 2600m의 험준한 산악과 협곡, 정글을 뚫고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곳곳에서 일본군 저격병의 공격을 받아 130명이 사망했습니다. 총 2만8천명의 공병대원과 3만5천명의 원주민, 1억5천만달러의 비용이 소요된 이 도로는 2차대전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공사중 하나이기는 했으나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것이었고 전쟁에는 실상 별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 사진출처 : 라이프 2차대전사 "중국-버마-인도", p.197 

      

북부버마에서는 중미연합군이 레도공도를 개통했고 임팔작전의 실패로 일본군의 전력은 대폭 약화되었습니다. 스틸웰을 대신해 X군의 지휘를 맡은 설턴중장은 운남국경에서 Y군과 합류한후 계속 남하하여 중부 버마의 카우크메를 점령하였습니다. 슬림의 영국 제14군 휘하 제4군단, 제33군단은 임팔에서 패주한 일본군을 추격하여 인도-버마 국경을 돌파한후 만달레이를 공격해 45년 3월 20일 점령합니다. 또한 영국군 제15군단은 해안선을 따서 남하하여 5월 3일 랭군을 함락시키죠. 일본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소수의 병력만이 태국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근 3년에 걸친 버마에서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미, 영, 중이 주도했던 버마전역에서는 한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도 참전하여 활약하였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경의 임정은 1941년 12월 9일 제20차 국무회의에서 대일선전포고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군사적 활동을 통해 향후 자주적으로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목표로 인도 주둔 영국군과 미군과의 제휴를 추진하였고 영국군이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요청하자 광복군에서 "주인면전구공작대"를 구성하여 한지성을 대장으로 2개 지대 9명의 대원을 43년 8월 인도 캘커다의 영국군 총사령부에 파견합니다.

이들은 영국군으로부터 방송기술, 문서번역, 전단작성 등을 교육받은후 44년 1월부터 임팔전선에 투입되어 45년 8월까지 버마에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주요 임무는 심리전으로서 대적선전공작이었으며 최일선에서 일본어로 대적방송 실시, 노획한 적문서 번역, 전단제작 및 살포, 포로신문 등을 맡았으며 실제로 일본군에서 통역을 맡고 있던 조선인들을 비롯해 총 27명이 이들의 대적방송을 듣고 탈출하였습니다.

임팔작전 당시 제17인도사단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이들은 일본군의 무선통신을 감청하여 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서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버마공작대의 최대 공적으로 인정되었고 사단장이 직접 방문해 치하하였습니다. 또한 일본군 포로중에서 약 100여명의 조선인들을 귀순시켜 이들을 훈련시킨후 광복군 휘하에 편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버마 공작대는 당초 9명에서 영국군의 추가 파견 요청에 따라 20여명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이 항복한뒤인 45년 9월 10일 중경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복귀합니다.

 

 

주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pbw5169/40162832244

그들의 활약은 버마전역 전체를 놓고 본다면 비록 아주 작고 미미한 것이라고 해도 근 1년 8개월간 영국군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전쟁을 수행하였고 중일전쟁기간 광복군이 수행한 대표적인 작전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아주 큰 것이었습니다.

 

 

 


 
[출처] 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35화 < 무다구치의 실패, 레도 공도를 열다 >|작성자 욱이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튜어니즘. | 작성시간 13.09.04 여명의 눈동자 생각이 나네요..최대치가 속한 일본군 부대가 임팔작전에 참가했어죠..
    그때, 최대치가 뱀 잡아 먹는 장면이 생각나고,
    최대치의 상관이 사람을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것도 생각나고..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9.04 그 드라마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습니다. 최대치가 속한 부대는 일본군 15사단이고 그 부대는 임팔 방면에 투입되는데 드라마에서 최대치 부대가 싸우는 장소는 코히마로 나오죠.
  • 작성자신룡기2 | 작성시간 21.10.15 재미있는 글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