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일전쟁사]장학량은 정말 항일애국투사인가?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9.22|조회수1,109 목록 댓글 2

장학량에 대해 중국인들의 시각은 "민족의 애국자"입니다.

 

일본 관동군의 음모로 아버지 장작림이 폭사한후 장개석에게 투항하였고, 이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때 "일본군보다 공산당 섬멸이 우선"이라는 장개석때문에 항일을 포기하고 관내로 철수했으며 이후 장개석의 명령으로 공산군과 싸우지만 같은 동포와 싸우기보다 일본과 싸울 것을 장개석에게 건의했으나 장개석이 거부하자 부득이 "서안사변"을 일으켜 중국이 하나가 되어 항일에 나서게 한 인물, 이런 것이 장학량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장학량은 장개석때문에 어쩔수 없이 일본에 항거하지 못한채 자신의 본거지를 포기하고 관내로 철수했던 것일까요.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왜곡된 시각입니다.

 

1928년, 장개석이 북경을 장악하고 장학량이 동북역치를 선포하여 일단 중국 군벌시대는 종식되고 통일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른바 "편견회의", 즉 군벌 군대의 대폭 축소와 장개석 일인 통치 강화에 염석산-풍옥상-이종인이 반발하였고 반장개석연합전선이 결성됩니다. 그리고 29년~30년에 걸쳐 양측 100만이상이 동원되는 군벌시대 역사상 최대의 전쟁인 "중원대전"이 벌어집니다.

 

양측의 세력은 팽팽했지만 장학량은 동북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어느쪽이 유리한가 추를 재어보고 있었습니다. 장학량의 군사력은 여러 군벌중 장개석 다음으로 강력했기에 그가 어느 쪽에 가세하는가에 따라 전황이 결정되기에 양측 모두 서로 장학량을 끌여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장개석은 와이프인 송미령을 보내 장학량을 설득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사실 장학량은 "동북역치"라고 중앙(남경정부)에 귀속되었음을 형식상 선포했으나 실제로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중앙에 의해 자신의 세력기반이 흡수될 것을 매우 우려했습니다. 이때문에 장개석과 상당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염석산-풍옥상이 산동으로 진출하고 북평-천진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은 장학량의 세력권을 위협하기에 더 큰 위험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장학량은 아버지를 이어 관내로 진출해 화북일대로 세력을 넓히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장학량이 저울질하다가 장개석을 선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입니다. 그럼에도 장학량은 실제로는 장개석의 출병을 계속 거부하다 염석산의 산서군과 풍옥상의 국민군이 중앙군에 의해 패퇴가 거의 결정되었을때야 약 7만의 병력으로 산해관을 돌파해 뒷치기를 합니다. 즉, 장학량의 개입은 장개석의 요청때문이라기 보다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이었죠. 이후에도 병력을 지속 증강하여 15만까지 늘립니다. 바로 일본의 군사적 위협이 점점 팽창되고 있었던 그때였죠.

 

장학량의 동북군 약 30만명중 장학량의 직계군이 그 절반정도이고 나머지는 사실 동맹관계라 할 수 있는 방계였습니다. 장학량은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직계군위주로 관내에 출병합니다.

 

한편, 29년 8월에는 장학량군과 소련군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있었는데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받아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만, 장학량은 자신의 직계군은 전투에 내보지 않고 주로 마점산, 정초등 방계에 속하는 길림군, 흑룡강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일본의 만주침공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장학량으로서는 주력 부대가 산해관 이남에 주둔하고 있는데다 동북에 잔여한 부대들은 대부분 전투력을 상실한 상황이기에 일본군의 침공을 제대로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세력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력부대를 다시 동북으로 이동시켜야 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어렵게 획득한 북경-천진과 화북일대의 신지반을 모두 포기하면서 일본군의 전면에 자신의 부대를 투입하는 모험이었습니다. 장학량으로서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가 없었죠.

 

장개석이 "일본을 자극하지말라"라고 한 것은 만주사변이 발발한 직후가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나카무라사건(일본군 스파이인 나카무라대위를 현지 중국군이 즉결사살한 사건), 만보산사건(길림성 만보산에서 조선-중국 농민들간에 일어난 농토분쟁)을 때였습니다. 당시 장개석은 제3차 초공으로 한창 공산군을 패배직전까지 몰아붙일 때였고 따라서 일본의 의도적인 정치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라는 말이었지, 전면적인 만주 침공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장학량은 장개석의 지시와 상관없이 내부적으로 "일본의 도발에 대해 저항하지 말 것"라는 방침을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즉 장학량이 항일하지 않은 것은 장학량 본인의 오판과 사정때문이지, 마치 장개석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싸우지 않았다, 라는 것은 그야말로 책임 회피에 불과하죠.

 

이후 일본군의 지속 공격을 받아 장학량의 금주정권이 무너지고 와해되어 화북에서도 세력을 잃게 됩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약 10만정도 남은 동북군을 이끌고 서안으로 이동했고 양호성의 제17로군과 연합해 공산군과 싸우게 됩니다만,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게 됩니다. 또 공산군의 공격으로 2개사단이 괴멸하는 등 공산군과의 전쟁에서 자신의 남은 세력마저 모두 잃을 상황에 이르자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 싸우자, 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장개석 입장에서는 어이없죠. 애초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주력부대를 북평-천진 일대에 주둔하는 사이에 일본의 뒷치기를 당하여 필사적으로 싸우기보다 싸우지도 않고 관내로 철수하고서는 이제와서 공산군과의 싸움에도 아무 도움이 안되는 주제에 중앙의 도움을 받아 일본과 싸우자, 라는 것은 실로 뻔뻔한 요구였습니다.

 

장개석은 서안으로 와서 장학량에게 "공산군과 싸워 이기든지, 복건성으로 이동하든지 양자 택일할 것"을 강요하자 장학량은 말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됩니다. 결국 양호성과 짜고 서안사변을 일으키죠.

 

결론적으로, 장학량의 서안사변은 실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적인 이유였습니다. 애초에 동북에서 전력을 다해 일본에 대항해 싸웠어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화북일대의 세력을 지키고 자신의 주력부대를 온존하기 위해 철수했죠. 그의 일생은 군인이라기보다 상당히 정략적이었습니다.

 

실상은 이와 같은데도 왜 장학량이 "국가와 민족의 영웅"이 되었나. 바로 공산정권의 포장과 선전때문입니다. 장학량을 민족애국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구체적인 자료와 연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장학량 본인의 회고록과 중공정권의 의도적인 사실관계의 왜곡에 의한 것입니다. 서안사변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이 공산군이며 그들에게 장학량은 구세주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서안사건으로 중국은 사실 전략적으로 가장 불리한 시기에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13.09.23 그냥 군벌요.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9.23 흠 아버지보다는 못한것 같군요;; 근데 대만에서의 평가는 어떤가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