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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국민당군은 왜 약했나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9.28|조회수2,199 목록 댓글 3

1937년 일본이 개전을 결정했을때 그들은 3개월, 적어도 6개월 안에 중국에 대해 매우 유리한 위치에서 강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개석의 북벌과정에서 서로의 필요에 의해 뭉친 군벌연합체는 독일식으로 훈련된 총통직속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훈련도, 장비, 보급등 모든 면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1931년 만주에서 이미 장학량의 동북군을 상대로 그들은 간단하게 승리를 거둔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의 저항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대규모 결전을 회피하면서도 화북에서, 서주에서, 화중, 화남을 거쳐면서 도처에서 중국군은 격렬한 저항을 벌이며 일본군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타격을 입혔다. 1937년부터 1941년에 이를때까지(진주만 기습전까지) 양측의 피해는 격렬한 것이었다.

 

연도    일본군 사상자    중국군 사상자
1937    256,100           367,362
1938    444,890           735,017
1939    410,095           346,543
1940    341,636           673,368
1941    181,045           299,483

 

1939년 무한이 함락되었을때 장개석은 자랑스럽게 "드디어 우리의 싸움이 방어전에서 공격전으로 전환점이 왔다. 이것은 결코 전략적 패배도, 후퇴도 아니다."라고 격려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한낱 허세로 보였을 터이지만, 일본군은 분산되었고 중국에 쏟아붙는 자원과 병력의 소모는 끝이 없었다.

 

일본군도 장개석의 전략을 깨달았고 곧 방법을 바꾸었다. 무의미한 추격전보다는 중국의 목줄을 죄는 쪽을 택했다. 남창을 점령하고 남녕을 함락시켜 중국의 해안가를 봉쇄하고 불령인도차이나에 무력 진주하여 중국의 해외원조루트를 차단하였다. 또, 중경, 계림, 곤명, 서안등 대도시들을 무차별로 폭격하였다. 이제 중국과 일본간의 "누가 먼저 나가떨어지는가"라는 인내심 대결이 되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군의 전력은 점점 약해졌다. 1941년의 국민당군의 전투력은 1년전보다 20~30%나 약화되었다. 일본군이 남방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전의 또한 약해졌다. 어차피 미국이 전쟁을 끝내줄 것이기 때문에 더이상 중국인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4년 1호작전은 국민당군이 얼마나 무기력해졌는가를 절절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중국은 소련군과 소련인민이 보여주었던 영웅적인 투쟁을 재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국민당군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1. 국민당군은 "중국 국군"이라는 단일화된 군사조직체가 아니라 서로 반목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뭉치게 된 다양한 군벌들로 구성된 이질적인 연합체였다.

약 300만이 넘는 중국군중에 약 30만정도가 황포군관학교출신으로 구성된 중앙군이었다. 이들은 장개석에 대한 충성도는 높았으나 훈련이나 장비면에서 1차대전수준이었다. 그 중에서 8만 가량의 최정예부대는 30년대초반 독일 군사고문단에 의해 빈틈없이 훈련되어 근대전에 걸맞았다.(이들이 가진 독일제 37mm 대전차포는 일본군전차의 천적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지방군의 상태는 매우 형편없었다.(산적, 비적들로 구성된 군대도 있었다.) 그들은 중국과 중국인민보다도 자기 고향, 직속 상관만을 위해서 싸웠다. 최고 사령부의 명령은 간단히 무시되었고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조차도 필요에 따라서는 회피되었다. 이래서는 조직적인 전투는 고사하고 통일된 움직임조차 무리한 것이었다.

 

2. 국민당정부의 통치력은 너무나 약했고 전쟁은 그것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는 무엇보다도 조세능력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곧 전쟁수행능력에 이어졌다.

개전초반 상해, 남경등 근대화된 해안가 대도시들은 모두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서부오지는 영토는 넓었지만 전근대적이고 공업보다 농업중심이었다. 따라서 조세는 토지의 생산력에 의해 정해졌다. 화폐에 의한 징수보다 원시적인 현물징수에 의지함으로서 흉년이냐, 풍년이냐에 따라 양곡 징수량은 천차만별이었다.

여기에 국민당정부의 통치력이 가장 확고하다는 지역조차도 지역 유지의 협조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을 거치면서 조세로 거둔 양곡은 점점 줄어들어 중앙으로 향하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는 전쟁은 고사하고 군대를 먹이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소전초기에 소련도 똑같은 일을 겪었지만 미국과 영국의 원조를 통해 부족한 것을 메꿀 수 있었다.(물론 스탈린식 특유의 강제노동을 통한 공업증대도 묵과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은 서방의 원조에서 우선순위가 뒤였고 1943년이후의 미국의 원조도 험난한 험비공도를 거쳐 부족한 항공기로 어렵게 공수되어 왔다. 소련의 원조는 그보다 좀 더 큰 것이었지만(적어도 독소전까지는) 역시 서부 오지에서 마차로 운송되었다. 중국의 군수품 생산력은 군대를 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3. 국민당정부의 부정부패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농민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현물이었으므로 아주 간단하게 부패한 관리와 유지들을 거치면서 줄어들었다. 농민이 부담한 조세는 실제 징수액의 2배이상이었다. 징집은 더더욱 기피되는 부담이었고 확실하게 죽음으로 향하는 편도편 지옥 행군이었다. 무작위 추첨으로 징집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부자들은 돈으로 빠질 수 있었고 가난한 자만 끌려 갔다.

 

물론 국민당정부도 여러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을 현장에서 즉결처분하고 기근으로 수백만명이 아사직전에 놓이자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한 성에 수십만씩 주둔하는 군대에 보급할 식량도 부족하고, 그나마 운송할 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행위는 군대를 군대가 아닌, 메뚜기떼로 변하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군대는 가는 곳마다 말그대로 싹쓸이를 했다. 그래도 식량은 부족했고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수백명의 굶주린 병자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1942년 감숙성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반란은 시작일뿐이었다. 국민당군은 일본군보다도 이들을 진압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1944년 1호작전때 수만명의 농민군은 패주하는 탕은백군 5만명을 무장해제하고 수천명을 학살, 생매장하였다.

 

4. 국민당군 지휘관들은 대체로 너무 무능했다.

장개석은 자신의 최고 참모들과 지휘관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내밑에서 군사령관이나 군단장, 사단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남들이 너희보다 더 무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나라였다면 연대장감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더 나은 인간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쥐꼬리같은 능력으로 그런 큰 책임을 맡고 있을 뿐이다."

최고 지휘관들은 서구와는 달리 육군대학에서 훈련받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북벌기간중 얻은 경험만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했다. 전략은 주먹구구였고 적을 연구하는 일도 심지어 자기편을 연구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관심사는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쪽이었다. 군내의 차량은 군대의 수송보다 사단장이나 군단장이 암거래하는 데 사용되었다.

영관급 이하의 중간 지휘관들은 그들보다는 좀 더 잘 훈련되고 유능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 초반에 이들 대다수가 전사했고 끝까지 이들의 빈자리를 메꿀 수 없었다. 전쟁동안 전체 장교중 단지 20%만이 정규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개전전에는 80%에 달했다.

 

물론 유능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개석의 신임을 받지 못하거나 파벌싸움에서 밀렸다. 백숭희는 가장 유능한 장군중 하나로 스틸웰이 장개석에게 참모총장에 임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지방군벌출신으로서 그는 1920년대 말에 쿠테타에 참여한 경력때문에 장개석에게 철저하게 경원시되었다.

진성도 유능했지만 국방장관 하응흠과의 파벌대결에서 졌기 때문에 중요한 보직에 맡겨지지 않았다. 버마에서 미식 사단을 이끌고 일본에게 승리를 거둔 중국원정집단군 사령관 송희렴도 파벌싸움에 희생되어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5. 진주만기습이후 중국의 전의자체가 점차 약해졌다.

서안사건이전 장개석은 "대륙 통일이 먼저, 항일은 그 후"라며 항일전에 소극적이었으나 사건이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그러나 중앙군은 개전초반 60%이상의 타격을 입었다. 이는 장개석과 용운등의 지방군벌간의 균형을 후자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특히 1939년말 대규모의 겨울공세는 참담한 것이었다. 따라서 장개석은 대규모 공세를 자제하고 소극적, 방어적으로 바꾸었다.

 

일본이 남방으로 눈을 돌리자 장개석은 항일전보다 자신의 중앙군을 재건하는 쪽에 힘을 기울였다. 지방군벌들의 전의도 약해졌다. 그들은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장개석을 위해 애써 싸워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설령 이긴다해도 자신들은 약해지고 그만큼 장개석만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보다 국민당에게 위협적인 것은 공산군이었다. 서안사건만 없었다면 그들이 파멸할 것은 틀림없었으나 일본군의 침입은 그들에게 구사회생의 기회가 되었다. 공산군은 서북, 만주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착실히 세력을 키워갔다.

만약 흔히 말하는대로 항일전에서 국민당군보다 공산군의 역할이 더 지대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진리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택동이 "우리 힘의 10%를 일본군에, 10%를 국민당군에게, 나머지 80%는 세력 확장에 쏟아야 한다"라는 지시에 공산군은 철저히 따랐다. 국민당군과 공산군은 항일전내내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그 전투력을 일본군에게 쏟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지만) 그 피해는 같은 기간에 일본군에게 입은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6. 결국엔 근본적으로 가장 큰 책임은 장개석과 국민당 그 자체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중국 근대사에서 장개석의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군벌 토벌을 비롯해 중앙은행설립, 화폐개혁으로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구시대적인 통행세폐지, 공업육성, 농촌개혁등으로 사회를 안정시켰다. 특히 관세 자주권을 찾음으로서 아편전쟁이래 불평등한 국제관계와 민족 자주권을 찾아온 것은 그의 큰 업적이다.

그러나 그는 독재자였고 민중에 의한 정치보다 소수의 측근에 의지했다. 민중운동은 비밀경찰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그는 항상 "인재 없음"을 한탄했지만 정작 인재의 참여를 막은 것은 바로 장개석 자신이었다.

국민당정부의 노회화는 더욱 심각했다. 장개석이 "이따위 당은 애초에 쓸어버려야 했다"라고 말한대로(그는 이 말을 1948년 1월에 했다.) 국민당은 부패하고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파시스트적인 청셔츠단 창설, 삼민주의 청년단, 이른바 "혁신운동"까지도 국민당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었다. 반대로 장개석은 그가 증오했을 공산당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철저하게 연구하고 토론할뿐만 아니라 계획을 완전히 실현한다. 우리는 우리의 조직을 강화하고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들을 열심히 따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장개석이 아무리 한탄하고 절망해도 그 자신부터 바뀌지 않는 이상 국민당이 혁신될 리는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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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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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Ir.Focus | 작성시간 13.09.28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인 역량의 부족이었다는 거네요. 장개석 ㅠㅠ.
    그나저나 중일전쟁 사상자는 의외네요. 보통 중국은 더 많이 죽고도 물량으로 민다라고 인식되어 있는데 39년은 오히려 일본군 사상자가 많네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9.29 1939년 중국군의 동계 대공세에서 일본군의 손실이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작전이 1939년 12월에 시작되었기에 초반에는 일본군이 많은 피해를 입어 1939년의 사상자 수가 일본이 더 많았지만 1달뒤인 1940년 1월에 일본군의 반격으로 중국군은 이때 사상자를 많이 내게 돼죠. 그래서 1940년에는 중국군이 일본군과 비교했을 때 두배 가까이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Ir.Focus | 작성시간 13.09.29 아아. 그렇군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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