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30일 오후부터 사이공 시내에는 북베트남군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겁에 질린 채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창문을 통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북베트남군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일부 동조 시민들과 지하활동 요원들이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북베트남군 병사들도 어리둥절하였다. 미제의 압제하에 있었던 남반부를 해방시켰는데 환영하는 열기는 찾아볼 수도 없고 시민들의 눈초리는 경계의 빛이 역력하고 차가왔다. 일부의 병사들은 호텔을 이용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텅빈 거리에서 야영을 하여야 했다.
남베트남의 항복방송이 나오자 사이공과는 대조적으로 하노이에서는 열광이었다. 수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폭죽을 터뜨리며 환성을 지르고 노래 부르며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울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사이공 전선 사령부에서는 5월 1일 승리를 자축하고 노동절을 기념하는 경축연이 벌어졌다. 샴페인을 터뜨리며 그들은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였다. 총사령관 반 티엔 둥(Van Tien Dung)은 사이공 지역 일대의 각 부대 순시에 들어갔다. 거리에는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남베트남군 포로들이 줄 지어 연행되고 있었다.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에는 모든 비밀문서, 지휘관 명단, 컴퓨터에 수록된 100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군 명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반 티엔 둥
포로가 된 남베트남군들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캠프 데이비스(Camp Davis)에서 북베트남군 각 군단장들과 정치장교들이 모여 남베트남군의 유기장비와 포로 처리, 각 부대 시설 등의 처리문제를 논의하였다. 남베트남군 부대마다 “명예, 책임, 조국”이라고 쓴 구호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탄손누트 공항 정문을 조금 지나서 “연합군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은 영원히 기억될 것(The Noble Sacrifice of the Allied Soldiers Will Never be Forgotton)”이라고 새겨진 연합군 전몰 장병 추모비도 있었다. 이런 것은 다 지워지고 호치민 어록으로 대치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5월 7일 남베트남의 점령 통치를 위하여 남베트남혁명위원회(COSVN) 군사위원장이며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트란 반 트라(Tran Van Tra)를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 행정위원회가 남베트남의 독립궁에 설치되었다. 이 기구의 실권은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인 보 반 키에(Vo Van Khiet)가 장악하고 있었고 모든 지시는 당 정치국으로부터 내려왔다. 정치국원인 레 둑 토(Le Duc Tho)와 팜 훙(Pham Hung)은 현지에서 계속 지도하였고, 정부의 각 부서, 경찰서, 은행 등 주요기관은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보 반 키에 왼쪽에서 2번째
레 둑 토
팜 훙
북베트남은 민족해방전선(NLF), 임시혁명정부(RPG)의 핵심요원들은 공세에 아예 참여시키지도 않고 하노이에 있게 하였고, 남베트남을 점령한 후에도 이들을 즉각 사이공으로 보내지 않고 5월 13일에야 사이공으로 보냈다. 그것은 5월 15일 전승 축하식이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의 수뇌들이 줄 지어 사이공으로 내려왔다. 레 두안(Le Duan)과 보 구엔 지압(Vo Nguyen Giap)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환영나온 인사들을 포옹하였다.
5월 15일 사이공 독립궁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동원된 가운데 승전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북베트남의 명목상 국가원수인 주석 톤 둑 탕(Ton Duc Thang), 민족해방전선과 임시혁명정부를 대표하여 구엔 후 토(Ngyuen Huu Tho) 민족해방전선 의장, 북베트남 노동당을 대표하여 팜 훙의 축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승리를 찬양하고 패자는 미 제국주의자들뿐이며 전 베트남인이 승자라고 말하였다.
톤 둑 탕
구엔 후 토
이어서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청년, 학생, 각 종교단체, 사이공 시의 모든 단체와 모든 계층의 대표자들이 북베트남 기, 임시혁명정부 기,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 지나갔다. 북베트남군도 뒤따랐다. 보병, 포병, 전차, 대공화기, 대공미사일 등이 위용을 자랑하였고 수많은 비행기 편대가 축하비행을 하였다. 제일 후미에 초라한 복장의 엉성한 베트콩 몇 개 중대가 행진하였다. 이미 베트콩 사단은 해체되었던 것이다.
남베트남 패망이후에 남베트남군 장비인 v-100 보병수송차를 노획해서 시가행진을 하는 북베트남군
5월 20일부터 달라트(Da Lat)의 호텔에서 북베트남의 수뇌들과 민족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각계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종결 회의가 열렸다. 지금까지의 승리를 회고하고 차후의 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였으나 이는 노동당 정치국에서 지시된 내용을 전파하는데 불과한 것이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한 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위 반동분자들의 처치와 사회체제를 공산사회로 전환시키는 부의 재분배, 국유화, 집단화였다.
모든 반동분자들에 대하여는 일정기간 재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의 죄과를 씻게 하고 새로운 공산사회 건설에 참여시킨다는 지령이 내려졌다.
대상자별 교육기간과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 교육기간 및 대상자
• 3일 : 병사와 하급공무원
• 10일 : 하급 장교, 정부기관, 정당의 중견 간부
• 30일 : 고급 장교, 경찰 간부, 정부 고관, 각 정당 지도자
○ 교육 내용
• 각자 저지른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
• 미국 측이 저지른 범죄
• 공산 혁명 영웅의 전기 학습
• 혁명 정부의 시책
• 노동의 존엄성 인식
재교육 장소는 각 지역 별로 전에 베트콩들이 기지로 이용했던 지역이었다. 사이공 지역의 재교육 수용 소는 타이닌(Tay Ninh) 省으로 지난 날 자기네들의 본거지였다. 재교육 해당 인원은 각자 식량을 지참하고 신고하도록 하였고 재교육 인원은 전투 간에 포로가 되었거나 항복 후 즉각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약 30여 만명으로 집계되었다.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신고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정해진 기간 내에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며칠 분의 식량만 준비하라고 하였지 기간은 정하지 않았다고 발뺌하였다.
최근에 북베트남의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일부 장기 재교육자들을 석방하였으나 아직도 수용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티우(Thieu) 정부의 고위관리, 미 제국주의자에 빌붙은 자,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자, 인민의 고혈을 빤 자 등이라는 것이다.
베트남의 재교육 수용소
재교육의 실상은 정말 가혹한 것이었다.
• 주거시설은 전에 자기들이 사용하던 움막같은 곳에 50여명 단위로 집어넣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 1일 식량은 1인당 200그램 정도이고 국은 소금 국 정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영양부족에 의한 각기병 같은 것이 만연하였다.
• 피복은 6개월 만에 검은 파자마 1벌이 지급되었고 물은 일주일에 한 초롱 정도가 보급되었다.
• 엄격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이 행하여 졌고 태도가 불손하거나 비타협적인 인사를 고문하고 현장에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 2개월에 한번씩 가족과 간단한 편지를 교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편지의 형식과 내용은 사전에 규정되어 그대로 쓰지 않으면 보내지도 않았다.
• 작업은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위험한 일을 시켰다. 변소 치우는 작업은 벌로 행해졌고 각 지역에 수없이 매설된 지뢰 제거작업은 주로 이들을 이용하였다. 지뢰 제거요령에 대한 교육이나 제거장비도 지급하지 않고 그대로 작업을 강행시켜 희생자가 많았다. 노동의 신성함을 인식시키는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 사이공 근처의 경찰관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로 거동이 불가능한 자들을 생매장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자체조사에서 밝혀졌다.
• 재교육 시작 1년이 되는 1976년 6월에 북베트남이 비공식적으로 인정한 바에 따르면 재교육 수용소에 남아 있는 약 20여 만명을 12개 부류로 성분을 분류하여 재재교육 단계로 들어갔다.
다음은 사회체제의 전환이었다. 1975년 6월부터 전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4개월 후에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1인당 균등하게 미화 40달러에 상당하는 돈을 바꾸도록 하였다.
도시 인구를 그들이 통제 가능한 범위로 줄이기 위하여 1차로 사이공의 20여 만명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50만 명을 그들의 신 경제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들은 1980년까지 총 500만 명을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노동자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각 직장, 공장들은 상위 직위자와 하위 직위자들이 서로 교체하여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모든 신문이 사라지고 내용이 비슷한 2개의 당 기관지만 발간되었다. 모든 서적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금서 목록이 작성되었다. 서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소장한 모든 서적들도 몰수되어 역사, 종교 서적을 불문하고 소각되었다.
영화, 음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작품들은 모두 사라져야 했고 혁명의 영웅, 할당률을 초과달성하는 모범 집단농장 등을 찬양하는 영화나 음악, 군가로 대치되어 갔다. 20가구 당 1개의 스피커가 사이공의 거리와 골목에 배치되어 요란한 군가와 지시사항, 성명서가 방송되었다.
점령 후 몇 달 동안은 그대로 감시하고 있었으나 티우 정권하에서 반정부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카톨릭, 불교에 대한 조치도 시작되었다. 자기들의 혁명과업 수행에 정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이들을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방해자인 것이다. 그대로 두면 자기들이 당할 차례인 것은 뻔한 일인 것이다. 반정부 활동의 중심지였던 안쾅(An Quang)사는 폐쇄되었고 트리쾅(Tri Quang), 티엔 민(Tien Minh) 등의 유명한 승려들이 체포되어 갔다. 티우의 부정 규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트란 훈 탄(Tran Hun Thanh) 신부, 호앙 퀸(Hoang Quinh) 신부 등 수백 명의 신부들이 투옥되었다. 이들의 죄명은 미국 CIA의 첩자라는 것이었다. 이 유명한 승려, 신부들은 재교육이 필요 없는 인사들로서 다시는 베트남 사회에 나타나지 못하고 옥사해야 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들이나 유명한 미 상원의원들이 이들을 면회할 수도 없게 되었고, 언론들이 이들의 구속을 대서특필할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1976년 12월 미국의 반전 운동가들이 북베트남에게 그렇게 약속하고 보장한다던 인권문제에 대한 조치를 공개하라고 메아리 없는 독백을 하기는 하였었다.
트리쾅 승려
티엔 민 승려
트란 후 탄 신부
식량, 생활 필수품의 판매가 통제되어 암시장에서 그 가격은 부르는게 값이었다. 80피아스타이던 쌀 1㎏이 500피아스타, 200피아스타이던 휘발유 1ℓ가 1,600피아스타로 뛰어 올랐고 닭 1마리의 값이 노동자 월 평균수입의 절반이었다.
자본주의의 퇴폐를 상징하는 장발과 헐렁한 바지들은 거리에서 단속되었다. 반대로 북에서 온 관리나 병사들이 헐렁한 바지를 입고 머리를 길렀다. 또한 TV, 냉장고, 녹음기, 전축, 카메라, 오토바이 등이 압수되거나 뇌물로 또는 암시장에서의 거래로 북베트남의 관리나 당 간부, 군인들에게 엄청나게 흘러 들어갔다. 부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소위 부르조아지들의 호화스러운 별장들은 계속 주인이 바뀌어 갔다. 그것은 하노이에서 내려오는 간부들의 직위가 계속 올라감에 따라 별장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장, 사무실, 인민공사, 부락 집단농장에서는 목표 초과달성 운동이 전개되었다. 호치민 생일, 당 창건일, 노동당 전당대회 같은 무슨 기념일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전개되는 공산사회에서의 목표 초과달성 운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남베트남 패망 후 보트 피플로 알려진 남베트남인들의 대탈주극은 보도를 통하여 전 세계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가까운 타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오스트레일리아까지도 이 보트 피플들이 떠내려 갔다. 탈출 중에 사망한 사람을 제외하고도 남베트남 패망 후 2년간 수십만 명의 남베트남인들이 탈출에 성공하였고 지금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해안에 도달한 보트 피플. 배가 침몰 직전에 놓였다.
북베트남은 점령 후 2년간 현존 또는 잠재적인 반동분자들을 제거한 후에 사회, 경제 분야에서 그들의 이상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건설하려고 계획하였다. 1976년 12월에 북베트남은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이의 추진을 서둘렀으나, 남베트남 정부와 군대의 해산에 따른 350여만 명의 실업자, 혼란과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사회, 경제시책, 공산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와의 접목 갈등, 20여년 동안 분단되어 각기 다른 체제하에서 형성된 엄청난 이질성 등으로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통일의 형식을 갖추는 작업도 가속화되었다. 민족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민족민주평화세력 연맹 등의 단체와 몇 번의 협의 형식을 거쳐 1976년 4월 25일 남북 총선거가 실시되어 통일 베트남 국회가 구성되었다. 인구 10만 명 기준으로 1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선거를 기권할시는 배급표가 몰수되기 때문에 투표율은 99% 이상이었고 민족해방전선, 임시혁명정부 등의 인사는 4~5명이 지명되었을 뿐이었다.
6월 24일에 통일 국회가 열렸고, 7월 2일에 통일국가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국가주석 톤 둑 탕, 당 제1서기 레 두안, 수상 팜 반 동(Pham Van Dong), 부수상 겸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 등의 북베트남 권력구조는 그대로이고, 통일국가라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구엔 후 토 민족해방전선 의장을 부주석으로, 7명의 부수상 중 3명을 남부출신으로 교체한 것 뿐이었다.
팜 반 동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점령하고 난 후부터 소련이나 중국의 무상원조는 삭감되었다. 혁명전쟁의 성공에 대하여 칭송하는 말은 많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상원조를 해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전후의 복구사업에 많은 자본이 필요했던 베트남은 미국에게 신호를 보냈다. 미끼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831명의 미군 실종자였다. 미국도 응해 왔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탄 손 누트 공항 공격시 죽은 2명의 미 해병 유해를 송환하라고 촉구하였다. 1975년 12월에 몇 명의 미 하원 대표가 비밀리에 하노이를 방문하였고 키신저 전 장관도 비밀 교섭을 시작하였다. 하노이는 휴전 협정에 북베트남이 응하면 42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비밀협상 최초단계에서 닉슨이 약속한 것을 실천한다면 실종자 수색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였다. 미국이 이에 응하지 않자 12명의 확인된 실종자 명단을 주면서 회유하였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카터 미 대통령이 들어선 이후에도 하노이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파리에서 양국대표가 만나기도 하였다.
5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군 장비를 노획한 베트남은 군사강국이 되어 그들의 오랜 꿈이었던 인도차이나 지배의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크메르 루즈(Khmer Rouge) 군의 폴포트 정권과 소규모 분쟁이 있었으나 베트남은 자제하여 오다가 1977년 9월 24일부터 타이 닌 성 일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1978년 12월까지는 내륙지역 공격을 하지 않았다.
폴포트
크메르 루즈군
베트남군은 25개 보병사단, 45개 독립보병연대, 60개의 방공연대, 20~30개의 전차대대 등의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는 군대가 되었다. 전에는 북베트남이 중국 고문관의 지도를 받아 미군 항공기를 공격하였으나 이제는 크메르 군이 중국 고문관의 지도하에 F-5 등의 노획 항공기로 공격하는 베트남에 대하여 공격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노획한 F-5E 전투기를 사용하는 북베트남군
그러나 크메르 군은 베트남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25일부터 1979년 1월 15일까지 베트남군은 크메르의 헹 삼린(Heng Samrin) 군과 함께 12개 사단으로 크메르 전역을 점령하고 헹 삼린 정권을 수립하였다. 라오스도 모든 부대에는 베트남군 고문관이 파견되었고 5만명의 베트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프놈펜을 공격하는 베트남군
헹 삼린
1978년도에 베트남이 화교를 축출하고 크메르를 점령하자 중국이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1979년 2월 17일부터 15개 사단을 동원하여 국경에 연하여 있는 5개 지역을 공격하였고 베트남도 즉각 병력을 전환하여 반격하였다. 양국의 피해는 베일에 가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중국군은 내륙 깊숙이 진격하여 베트남이 더 이상의 침공을 못하도록 견제하였다고 말하였고 베트남은 즉각 반격으로 심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말하였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 경로
교전중인 베트남군
교전중인 중국군. 중국은 초반 전투에서 병력과 기갑 전력에서 숫적 우세를 유지했으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대부분 험준한 산악 지형이라 이러한 잇점을 발휘하지 못했다.
베트남군의 포로가 된 중국군
베트남에 투입전 사열중인 중국군
통일 후 베트남은 국민소득 200달러 수준의 최빈국으로 전락되었다. 공산화 이후 지금까지 150만 명 이상이 베트남을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고 지금 베트남은 이데올로기보다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조류를 타고 베트남도 1987년부터 개방정책을 폈다. 1986년 12월 제6차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노쇠하고 완고한 혁명 1세대의 당 지도부가 실용주의적 경제 개혁파로 교체되었다. 개혁파의 주도인물은 당 제1서기에 임명된 구엔 반 린(Nguyen Van Linh)이다. 린은 1985년 7월에 사망한 당 제1서기 레 두안의 측근인물로서 1975년 4월 사이공 점령 후 사이공 군사 행정위원회 부위원장이었고 이후 사이공 시당 서기장, 노총연맹 의장, 정치국원을 역임한 바 있다.
구엔 반 린
베트남은 14만명의 캄보디아 주둔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동남아 각국들과 경제관계를 모색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었으며 우리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는 등 이제는 본격적인 빈곤탈피 전쟁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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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10.07 지금은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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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열혈청년 작성시간 13.10.05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로 끝났는데 북조선 김씨 왕국은 아직도 그 체제를 못버리고 있다능.....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농토를 농민에게 분배해야 할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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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3.10.07 아직도 김씨 왕조 빠는 사람들은 북 베트남의 승리를 대단하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에 눈을 닫고 귀를 닫는 것을 보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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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레이* 작성시간 13.10.07 기껏 통일했더니 결국엔 거지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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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centurion 작성시간 13.10.25 인도차이나 깡패 베트남의 근성은 버리질 못하는구만 ㅎㅎ 통일하자마자 옆나라 후려치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