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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중일전쟁 중기(39년~41년)의 전황과 양측의 전략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07|조회수576 목록 댓글 1

37년 7월 7일 북경 교외 노구교사변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은 개전과 동시에 화북과 화동전역에서 쌍방 수십만을 동원한 대규모 접전이 벌어집니다. 일본군부는 예비사단을 동원하고 현지에 병력을 여러차례 증원하며 적극적으로 공격해 나감으로 중국군은 큰 희생을 치루었지만 "3개월만에 끝장내겠다"라는 스기야마 육군대신의 호언과 달리 전쟁은 장기화되고 교착화됩니다.

 

30년대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적 구조는 아직 국가총력전에 대비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치밀한 전략적 준비조차 없이 거의 우발적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일본군은 초반에 압도적인 화력과 기동성, 제공권을 통해 전술적, 국지적으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병참의 한계와 예비병력의 부족으로 전과를 확대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바바롯사작전당시 독일군과 같은 기동전과 적주력에 대한 대규모 포위섬멸전을 구사하지 못한채 중국군을 단지 서부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밀어내었을 뿐이죠.

 

이후 지나파견군을 100만까지 증강하여 전개했으나 광대한 중국 대륙에서 점령지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단지 대도시와 주요철도, 항만을 중심으로 점과 선으로 근근히 유지하게 됩니다. 일본 육군의 경우 평시 17개사단, 전시 30개 사단을 동원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개전 2년만에 41개 사단으로 확대되었고(이중 지나파견군이 24개 사단) 병력도 거의 10배나 증가됩니다. 잘 훈련된 간부와 하사관의 확보없이 무턱대고 머리수만 늘려댐으로서 되려 전체적인 질적 저하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물론 중국군의 타격 역시 적은 것은 아니었는데, 37년부터 38년 10월 무한 함락까지 350개사단 450만명에 달하는 그들의 거대한 보병군단을 투입하여 중요도시에 대한 거점 방어와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때로는 대규모 반격을 적극적으로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7년 8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의 상해전역에서 보듯 치밀한 준비없이 성급하게 추진된 반격은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중앙군과 군벌군간의 협조결여와 기동성의 열세로 종심방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채 병력을 축차투입하여 적을 격파하지 못한채 단지 큰 희생만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특히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상해, 무한 등) 대규모 병력을 집중함으로서 다른 전선의 약화를 불러와 일본군에게 허를 찔리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38년말까지 1년 5개월간 적어도 전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200만명이상을 상실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공업, 발전시설, 병기창이 있는 평진지구와 양자강 하류지역, 무한지구를 상실함으로서 공업능력의 92%, 농업생산의 40%, 전력생산의 90%이상을 상실합니다. 따라서 전쟁 수행에 큰 타격을 받죠.

 

어쨌든 37년 7월부터 38년 10월까지 일본은 중국에게 여러번의 강펀치를 먹였으나 결정타라고하기에는 힘이 부족했고 어쨌든 중국은 버티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충분히 싸울 여력 또한 남아 있었습니다. 전술적 승리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속전속결전략은 사실상 실패했으며, 전선의 교착화와 장기화, 소모전화로 변화하게 됩니다.

 

38년 10월 26일, 임시 수도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한구가 함락되고(중경으로 이전) 화남에서도 21일에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가 함락된후 38년 11월부터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가 됩니다. 12월 6일 도쿄의 대본영은 금후 방침으로 "점령지역 확대를 기도하지 않고, 기 점령한 지역에 대해 치안확보와 항일세력 궤멸에 치중한다"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는 사실상 "조기결전 실패"와 "전쟁의 장기화"를 인정하는 것으로, 소련과의 외교관계 악화로 인한 관동군의 증강이 절실해짐에 따라 병력의 추가증원이 어려워지고 광대한 내지에 대한 병참선 확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의 중국 전황도. 전쟁 막판까지도 큰 변화가 없이 지루한 소모전만 반복됩니다.

※ 출처 : 현대중국전략의 기원, 플래닛미디어

 

한편, 38년 11월 25일, 호남성 남악에서 열린 남악군사회의에서 장개석은 "초반의 패배는 패배가 아니라 장기전에 대비하여 최후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배치"라고 말합니다. 또한, 개전이래 지금까지 보여준 전략, 전술상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군의 재편과 전투력 개선에 대한 대책을 논의합니다.

 

우선, 전군을 재편성한 다음 4개월단위로 1/3은 전방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1/3은 적 후방에서 유격전을, 1/3은 재정비와 훈련을 실시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현재 중앙군과 지방군 합해 241개 사단과 40개 여단에 대해 전국을 8개 전구 및 적 점령지에 대한 2개 유격전구(화북지구, 강소-산동지구)로 나누고 32개 집단군 97개군으로 재편성합니다. 그래서 38년 12월부터 39년 11월말까지 1년간 총 66개군을 재편성 및 훈련을 마칩니다. 이는 수많은 계파로 나눠어져 있는 반봉건적인 군대를 "국군"으로서 지휘계통과 명령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물론 현실적인 문제로 국공내전때까지도 100% 실현하지는 못했으나) 

 

특히 주목할 것은 대규모 유격부대 육성을 통한 적 후방에 대한 유격전 전개인데(대체적으로 유격전은 공산군의 전매품인양 기술되지만), 기존에 중국군이 대도시와 철도를 중심으로 진지전과 거점 방어에만 치중했던 것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것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원칙적으로 "장기 소모전"을 꾀했으나 정작 전술적으로는 정면대결을 고집함으로서 압도적인 화력과 제공권을 가진 상대에게 큰 희생만 치루고 방어 역시 실패하였습니다.(물론 일본군도 상응하는 댓가를 치루었지만) 따라서, 30년대 초중반 장개석의 "초공"에 맞섰던 홍군은 지역 방어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까지 지속적으로 후퇴하면서 또한 병참선을 공격하여 적이 공격 한계점에 다닿았다고 판단했을때 사면에서 포위 반격함으로서 승리를 거둔 예를 참고하여 장개석은 보다 적극적으로 광범위한 유격전 전개를 지시합니다.

 

이를 위해 군사위원회 직속으로 제31집단군 사령관 탕은백을 주임으로, 팔로군 참모장인 섭검영을 부주임으로 간부 훈련반을 구성하여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 사령부 참모들을 3개월간 훈련시킨뒤 훈련 종료후 유격부대를 조직토록 하여 적 후방에서 수행토록 합니다. 총 7기까지 5,659명이 훈련을 이수하죠. 또한 40년 1월에는 유격작전을 총괄할 유격구 총지휘부를 설치합니다. 전국에 유격부대는 적어도 100만이상에 달했고 전쟁기간동안 이들의 작전규모와 횟수 역시 공산측을 훨씬 능가하였습니다.(이후 국공관계가 악화되자 유격지구에서 국공 양측의 요원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도 많아집니다.)

 

무한함락이후 일본의 공세가 주춤해지자, 중국군은 39년 4월부터 기존의 수세적 입장을 바꾸어 국지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합니다. 특히 39년 6월에 만주국경에서 벌어진 노몬한전투에서 관동군이 소련군에게 여지없이 아작나자 이에 고무된 장개석은 11월부터 40년 1월말까지 40여일간 총 60~80개사단을 동원해 중일전쟁 최대의 반격인 이른바 "동계공세"을 실시하죠. 이 작전은 북으로는 내몽고부터 남으로는 중월국경에 이르기까지 수천km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제2전구, 제3전구, 제5전구의 화중, 화남일대가 작전의 주공이었고 나머지 전구에서는 적병력의 분산을 위해 주공보다 선행하여 작전이 개시됩니다.

 

 

 

39년 12월 중국군의 동계공세(출처 : 중일전쟁 중기 국민정부의 항일전략과 실체, 국방대학교 기세찬교수 저)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작전 자체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고 전세를 역전하지도, 실지 탈환도 미미했습니다. 특히 작전결행 직전에 일본군이 중월국경의 요충지이자 최대의 해외보급로로서 중국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남녕을 장악하자 남녕 탈환을 위해 병력의 1/3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문에 공세 능력 자체가 약화됩니다. 게다가 제공권의 열세와 각 부대간의 협조 결여, 지휘관들의 미숙함으로 인한 병력의 축차투입 등으로 공격은 큰 희생만 치룬채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 공세는 일본군에게도 막대한 희생과 심리적인 충격을 줍니다.

 

"중국군의 공세는 이전에 없는 대규모로 집요하게 실시되었다. 이 시기 아군 일선 부대는 대부분 소규모(소대, 중대단위)로 분산되어 적에게 이중 삼중으로 포위 고립되었다. 식량과 탄약은 고갈되었고 사상자가 많았다. 적의 의지는 전에 없이 적극적이고 완강했으며 그 전투력은 경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야습을 통해 은밀히 접근한후 아군의 거점을 포위하였고 수류탄으로 근접공격을 수행하였다" - 중국군 동계작전에 대한 제11군의 보고

 

당시 일본 육군 중앙 통수부에서는 노몬한전투의 패배로 만소국경의 강화와 대소전 대비가 절실하여 중국에서 일부 병력을 만주로 유용할 계획이었으나 이 공세로 전략적인 방침 자체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충격은 태평양전쟁 발발이후에도 중국 파견군을 남방으로 빼내지 못한채 오히려 병력을 증강시키지 않을 수 없었죠.

 

중국군의 동계공세 외에, 일본은 39년부터 41년까지 화중과 화남에서 여러차례의 제한된 공격을 감행합니다. 대표적인 전투가 39년 3월~4월의 호남성 남창작전, 39년 9월~10월의 제1차 장사작전, 40년 5월~6월의 의창작전, 41년 9월~10월의 제2차 장사작전 등입니다. 이 전역에서 중국군의 전술은 공격군을 최대한 안쪽으로 유인하면서 지연전을 펼치고 유격부대가 적 후방과 병참에 대한 교란을 수행하고 일본군이 공세한계점에 도달했을때  예비대로 적의 측면을 포위 공격함으로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빼앗긴 영토를 탈환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전투에서 제공권과 기동성에서 열세인 중국군은 적보다 몇배의 희생을 치루기 일쑤였고 기대했던 것만큼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하기는 어려웠으나 일본군에게 지속적으로 소모전을 강요하고 병참선을 위협합니다. 따라서 일본군은 중국군을 추격해 내륙 깊숙히 진격할 수가 없었죠.

 

 

제1차 장사작전당시 중일 양군의 전황도. 장사를 방어하던 제9전구 사령관인 설악은 장사까지 일본군의 예상경로에 청야작전을 펼쳐 식량을 후방으로 운송하고 도로를 파괴하였습니다. 또한 지속적인 매복전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둔화시키고 손실을 강요합니다. 결국 일본군은 장사를 일시 점령했으나 곧 손을 털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죠.

 

국방대학교 기세찬 교수는 자신의 논문("중일전쟁 중기 국민정부의 항전전략과 실체")를 통해 이 기간 중국군은 개전초의 수동적인 진지전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효과적인 대일 전략, 전술을 개발하여 유격전을 병행한 종심방어와 기동방어를 통해 적을 포위격멸하려고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물론 이것은 전과면에서 본다면 지나친 과찬일 수도 있습니다. 비교적 성공적인 작전이었던 제1차 장사전투만 해도 중국군은 2만이상의 사상자를 낸 것에 반해 일본군은 5천명에 불과했습니다. 의창전투에서는 제33집단군 사령관인 장자충이 전사하였죠. 영토의 탈환은 적을 포위섬멸하거나 격퇴했다기보다 병참한계에 직면한 일본군이 스스로 퇴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군은 공산군처럼 효과적으로 군의 주력을 보존하면서 지구전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국군의 대규모 유격전과 결전회피전략때문에 일본군은 중국군 주력을 조기에 섬멸하지 못했고 점령지가 확대되면 될수록 치안을 위해 병력이 분산되어 공격능력이 약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진격은 37년~38년까지 일일 8km였으나 39년은 3.2km, 40년에는 1.6km로 급속히 둔화되죠. 전술적으로 중국군은 큰 댓가를 치루었지만 전략적으로는 열세한 전력으로 적을 지치게 하는데 성공하였죠. 결국 일본은 미국에 대한 파멸적인 전쟁을 시도하고 말죠.

 

서로 결정타를 먹일 수 없게 된 중일전쟁은 점차 인내심 대결이 됩니다. 먼저 뻗는 쪽이 지는 것이었죠. 내륙침공이 어려워지자 일본은 무한과 의창, 운성 등지에서 폭격기를 출격시켜 중경에 대한 대규모 무차별 전략폭격을 감행합니다.(이른바 101호 작전) 40년 5월부터 9월까지 총 2000여회에 걸쳐 중경에 1400톤의 폭탄을 퍼부었고 중국공군기에 대해서도 200여기를 격추시켜 거의 말살시킵니다.

 

 

  

중경을 폭격중인 미쓰비시 G3M폭격기

(사진출처 : http://airwar.hihome.com/airwar/ww2-pacific/part-1/ww2-pac-1-2.htm)

 

또한, 국제정세가 장개석의 예상과 달리 점점 중국에게 불리해집니다. 동남연안의 항구들을 상실하고 봉쇄당한 중국은 버마와 홍콩, 인도차이나를 통해 해외에서 식량과 물자, 무기를 수입했는데 40년 7월 일본의 압박에 굴복한 영-프는 이 루트를 차단시킵니다. 최대 원조국이었던 소련 역시 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자 원조를 중단시킵니다. 국공 양자간의 충돌도 점점 격화되죠.

 

일본은 41년중에 재차 총공세를 감행하여 중국을 끝장낼 것을 계획했으나 결국 남방작전을 선택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공격은 미루어집니다. 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은 장개석이 꿈에도 그리던 것이었으나 미국의 참전이 중국에게 구원이 되는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루즈벨트는 통크게 5억달러의 원조를 제공했으나 사면이 고립된 중국으로서는 그걸로 필요한 것을 살 방법이 없었죠. 스틸웰은 부임하자말자 버마에서 완전히 실패한채 인도국경으로 쫓겨갑니다. 게다가 44년 일본의 대륙타통작전으로 호남과 광서성에서 파멸적인 패배를 당함으로서 장개석은 국제적으로 완전히 망신을 당합니다.

 

7년에 걸친 항전에 지칠대로 지친 중국의 숨통이 열리는 것은 45년 1월 인도 동북부의 레도와 운남 곤명을 연결하는 레도공도(이른바 "스틸웰 공도")가 열리면서 대량의 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면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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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10.07 근데 레도공도가 효과가 아주 없던것은 아니었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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