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일전쟁사]국민정부군과 독일군사고문단에 대해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08|조회수440 목록 댓글 0

20년대 초반 국민혁명군은 소련의 막대한 원조를 받았고 황포군관학교의 생도들은 소련군사고문단에 의해 소련식으로 육성되었습니다. 무기와 장비는 물론 전술에서도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손문 사후, 반공성향의 장개석은 보로딘을 비롯한 국민당내 소련인들을 모조리 추방합니다. 당연히 소련과의 관계가 급냉하죠.

 

장개석이 소련을 대신해 택한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당시 1차대전으로 몰락했던 독일은 중국인들이 보기에 영, 프, 미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덜 제국주의적이라고 판단합니다. 1928년 11월, 구 제정독일군의 원로인 루덴도르프원수의 추천으로 중국에 온 것이 바로 막스 바우어대령였습니다. 이후 중독합작이 히틀러에 의해 완전히 깨지고 독일 군사고문단이 소환될때까지 총 5명의 군사고문단이 초빙됩니다.

 

 이름

계급 

 재직기간

비고 

 막스 바우어

대령

28. 11 ~ 29. 4

 

 헤르만 크리벨

중령

29. 4 ~ 30. 4

 

 조지 베첼

중장

30. 4 ~ 34. 5

 

 한스 폰 젝트

대장

34. 5 ~ 35. 3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대장

35. 3 ~ 38. 7

 

 

막스 바우어는 1차대전 당시 루덴도르프의 작전 참모였고 포병과 공병, 화학에서 전문가로서 오스트리아, 소련, 스페인 등에서 군사고문역을 담당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산업화와 군조직의 축소 및 정예화, 공군의 육성을 조언합니다. 또한 남경 중앙정치군사학교 설립에도 기여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온지 반년도 안되어 한구에서 천연두에 걸려 상해에 있는 병원에 입원한지 얼마안되어 사망합니다.(천연두 무섭군요 덜덜)

 

그의 뒤를 이어 부고문단장인 크리벨이 대리를 1년간 맡은후 그 다음으로 온 사람이 조지 베첼중장이었습니다. 그가 왔을때는 한창 중원대전이 진행되고 있을때였는데 베첼중장은 머릿수만 많을뿐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은 미약한 중국군의 개혁을 위해 우선 중앙직속의 엘리트 부대 창설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최초로 3개 사단이 독일식으로 무장하고 훈련됩니다.(제36사, 제87사, 제88사) 또한 포병전력의 확충과 공군력 강화를 주장하죠.

 

그 다음으로 온 양반이 베르사유조약에서 망가진 독일군을 재건하여 "독일군의 아버지"라 불리운 한스 폰 젝트 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장개석에게 조언하기를, "군은 규모가 작더라도 정예하여야 하며, 고도로 숙련된 장교들에 의해 지휘되어야 하며, 협동작전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장교들은 총사령관에게 복종해야 하며 어떤 지위의 고위장군이라도 독단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당시 각 지방에 할거하는 반독립된 상태의 군벌들을 비판하고 중국군의 현대화와 중앙집권화를 원칙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이었죠.

 

30년대 초반 반장전쟁이 끝났을때 중국군은 전국에 약 200개 사단과 250만에 달하는 잡다한 군대가 있었는데 젝트는 이들을 60개 사단으로 축소하고 점진적으로 현대화할 것을 주장합니다. 우선 1개 교도사단을 창설하여 이들이 다른 부대의 훈련을 맡도록 한다면 점진적으로 중국군은 근대적인 군대가 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또한 중국이 자체적인 무기생산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독일과 무역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합니다. 따라서 34년 1월 24일 "공업산품상무공사"가 설립되어 독일과의 무역을 총괄하고, 34년 8월에는 중독 양국간 상호 교류조약을 체결해 중국은 독일에게 텡스텐 등 각종 광물을 제공하는 대신, 군수물자를 받게 됩니다.

 

젝트 다음으로 온 폰 팔켄하우젠대장은 중국군의 개혁과 근대화, 병력이동을 위한 철도, 도로 등 수송로 정비, 공군 강화를 주장합니다. 특히 장강의 군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장강 연안에 철도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여 독일에 자재와 차관을 요청하여 공사를 진행합니다. 팔켄하우젠은 공산당 토벌에 대해서도 제4차와 제5차 초공전에서 선무활동과 토치카전술을 제안하여 결국 모택동 일당들이 영토를 버리고 대장정에 나서도록 만듭니다.

 

독일군사고문단은 최대 100명까지 늘어날만큼 그들의 역할은 당시 신생 국민정부군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장개석은 이들을 통해 독일로부터 각종 최신 장비를 도입할 수 있었고 총 20개 사단을 독일식으로 무장, 훈련시킵니다. 비록 시간상 모든 군대를 근대화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노력덕분에 대일전쟁에서 그나마 중국군이 대항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서안사변직전 장개석은 그의 일기에 "5년에서 7년의 시간만 있다면 일본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라고 적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일본과의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팔켄하우젠은 장개석에게 "지구전"을 통해 군의 주력을 보존하면서 적에게 최대한의 희생을 강요할 것을 제안했으나 장개석은 정면승부를 고집하여 상해와 남경에서 큰 희생을 치룹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공업시설과 병기창은 물론 육군과 공군의 최정예부대 80%를 상실하였고 서남쪽으로 쫓겨갑니다. 장개석에 이에 대해 "자신의 오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아비판합니다.

 

더욱이 히틀러는 새로운 동맹국으로서 중국 대신 일본을 선택합니다. 군과 재계에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38년초부터는 중국으로 향하던 모든 군수물자 수출은 엄금되고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군사고문단들 역시 모두 본국으로 소환됩니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의 일원이 된 중국은 정식으로 대독선전포고합니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장개석의 장남인 장경국을 비롯해 많은 행정, 군사 고관들은 독일에 유학생으로 가서 교육을 받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