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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피아]미국 마피아 - 2. 뉴욕 마피아의 역사(2), 카스텔라마레세 전쟁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27|조회수3,225 목록 댓글 0

1930년에서 1931년 사이는 살바토레 마란자노와 귀제뻬 마세리아(Guiseppe Masseria, 닉네임은 Chinese, 후기의 닉네임은 Joe the Boss)라는 두 시실리 인이 뉴욕 지하세계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때이다. 이 전쟁을 일컬어 카스텔라마레세(Castellammarese) 전쟁'이라 하는데 이 명칭은 살바토레 마란자노가 시실리 섬의 작은 마을 카스텔라마레 출신이었던 데에서 비롯된다.

귀세뻬 마세리아

 

살바토레 마란자노

 

시실리 지도의 일부이다. 팔레르모 서쪽으로 카스텔라마레 마을이 보인다.

 

19201월부터 공식적으로 발효된 미국의 금주법은 1933년까지 13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법으로 인해 번창하게 된 밀주 사업은 수많은 갱 조직을 모두 먹여 살리고도 남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자 금주법이 곧 폐지될 것이 누구의 눈에도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밥그릇의 정리가 필요하게 된 것이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제적인 측면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쨌든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이 일어나게 된 까닭은 앞에서 말한 두 사람이 일으킨 뉴욕 암흑가 주도권 다툼이었다.

갱들의 주 사업, 즉 갱 조직들에게 돈벌이가 되는 사업은 절도와 강도를 비롯하여 매춘, 도박, 고리대금업, 거리에서의 보호비 갈취, 그리고 여러 가지 청부업과 밀주사업 등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것은 역시 밀주사업이었다.

알콜의 수요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부터 시작된 금주법 아래에서 미국인들의 알콜 수요는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금지된 것을 더욱더 찾으려하는 사람들의 심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된 점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일어났던 알콜 수요의 증가에는 그 이상의 사정이 있었으니 그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다.

1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변모하였고 국내산업의 규모도 매우 커지게 되었다. 노조파업, 인종폭동 등 소요사태도 있었지만 이 나라는 최대의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고 이 호경기는 1929년에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때의 미국은 지구상에 최초로 형성된 소비사회로, 부자들뿐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의 가전제품을 어렵지 않게 가질 수가 있었다. 보통 여성들의 미니스커트 유행이 경기의 좋은 지표가 된다고 말하는데, 미국에서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단 3년 동안에 여성의 내의 목록에서 코르셋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때의 호경기가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이때의 미국인들은 청교도적인 절제를 19세기의 잔재로 여겨 그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도덕 관념은 해이해졌고,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려고 마음먹은 듯 거리를 헤집고 다녔다. 이와 같은 분위기로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대도시들은 타오르는 활화산과도 같은 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에서 알콜의 섭취를 금한다는 것은 사실상 넌센스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금주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이 나라의 대통령인 웨렌 하딩(Warren G. Harding)까지도 사적인 파티에서는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셔댔으며, 백악관 안에 개인 바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미국 도회지에서 술을 마시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일과 술을 파는 일은 엄연한 불법 행위임에 틀림이 없었으므로 수천 군데에 달하는 비밀 술집들을 영업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경찰 등 사법관리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워런 G. 하딩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가 있었던가? 대체 어떤 경로로 이 금주법이 제정되었을까?

술의 제조와 판매를 법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실로 바보 같은 이러한 주장은 이미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 내에서 존재해왔다. 당시 미국사회의 번영을 이룩한 원동력은 자유 방임적, 개인주의적 경제 체제였고, 이러한 체제를 지지한 사람들은 기업가와 보수적인 정치가들, 그리고 주로 개신교도인 백인 중산계급들이었는데, 원래 이들은 음주란 매춘, 범죄 등을 일으켜 사회를 타락시키는 아주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미국의 대도시들이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이민인구로 들끓고 있는데 대해서도 점차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방인들의 낯선 풍습과 종교로 미국이 잠식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로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들 백인 중산계급층에서는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며 전통적인 미국정신의 가치를 숭상하는 윤리가 뿌리 깊었고, 따라서 이들에 의한 금주 운동은 이민 배척운동과도 자연스럽게 관련을 맺게 되었다. 이들은 도시의 외국인들과 술이 미국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하는 미국 사회 안에서 옛날의 미국을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은 드디어 1917년에 이르러 성과를 거두게 된다. 거기에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한 국가 전체의 전시 분위기에 힘입은 바가 매우 컸다. 1917년 말에 금주법이 미국 상원에 상정되었을 때에 그것은 불과 13시간의 논쟁 끝에 일방적인 투표로 통과되었던 것이다. 수개월 후 다시 하원에서 단 하루의 심의 끝에 법안이 통과된 후, 금주법이 미국 헌법의 일부가 된 것은 1919116의 일이었다.

미 의회는 금주법의 실시를 집행하기 위한 예산도 함께 통과시켰으나 그 액수는 겨우 500만 달러에 불과하였다. 국내의 밀주는 차치하고라도 연장 총 18,700마일에 달하는 미국의 해안선과 국경을 통한 술의 밀수입까지 모두 적발해내는데 연간 500만 달러의 예산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적은 액수였다. 아무래도 의원들은 미국 국민들의 도덕성에 너무나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국민들이 내핍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1차 세계대전의 전시 분위기가 연장된 것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금주법이 이렇게 쉽게 통과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금주법은 당시 미국 전체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헌법 수정 제 18조인 금주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면 미국 내에서 알콜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결국 1920126일부터는 헌법 수정 제18, 금주법이 효력을 가동하여 술의 제조와 유통, 판매 뿐 아니라 술의 수입과 수출까지, 술에 관한 모든 것이 미국 내에서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밀주사업은 떠오르는 황금의 사업이 되었다. 수천 군데의 펍(Pub)과 살롱 등 술집이 폐쇄된 대신에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비밀 술집이 생겨났다. 이전에 절도, 매춘, 도박, 보호비 갈취 등을 주업으로 삼고 있던 갱들은 즉시 새로운 사업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알아채고, 곧 너도나도 그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한 갱이 아니면서도 술을 마시는 것에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밀주업에 손을 대어 큰 돈을 벌기도 하였는데 점차 이들의 사업도 갱들의 그것을 닮아가게 된다. 그래서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지하세계는 수많은 그룹들이 활동하게 되었다.

술을 만들어내고 최종 소비처까지 배달하는 모든 유통과정은 필연적으로 네트워크의 형성을 필요로 했고, 이때부터 갱들의 사업은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전에도 그들에게 소규모의 조직이 존재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야말로 이 1920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갱들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 즉 본격적인 범죄조직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 밀주사업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이윤이 존재하여, 그 돈을 가지고 매수할 수 없는 경찰관이나 판사는 거의 없었다.

사업은 조직화되고, 조직은 점점 거대해졌다. 이러한 추세를 타지 못하고 탈락한 그룹들은 은행털이, 하이재킹 등 절도로 연명하다가 당국에 체포되어 일간지의 제1면을 장식하고 하였다. 기관총 켈리, 딜린저, 보니와 클라이드 등이 바로 그러한 경우로, 진짜 갱들은 뇌물로 만들어진 보호벽 뒤에서 안전하게 사업을 계속하며 돈을 세고 있었다.

기관총 켈리

 

존 딜린저

보니와 클라이드

 

살바토레 마란자노와 귀제뻬 마세리아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당시 뉴욕의 지하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사람들로는 찰스 루치아노와 루이스 부챌터가 가장 먼저 손꼽혔다. 그 다음으로 프랭크 예일, 프랭크 코스텔로, 죠 아도니스, 죠셉 프로파치, 빈센트 망가노, 오우니 매든, 프랭크 에릭슨, 잭 다이아몬드, 덧치 슐츠 등이 있었다. 이중 아일랜드계인 잭 다이아몬드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이탈리아-시실리계와 유태계였지만 애초부터 암흑가에서 이들 이탈리아 갱과 유태계 갱들이 다수였던 것은 아니었다.

찰스 러키 루치아노

 

루이스 부챌터

 

프랭키 예일

 

덧치 슐츠

 

조셉 프로파치

 

오우니 매든

 

최초에 영국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후, 그 다음으로 이주해온 이민은 아일랜드계가 많았다. 그들은 남유럽과 동유럽인들이 이주해오기 저에 자리를 잡았고 따라서 이민자 거주구역의 주도권도 이들 아일랜드계 갱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세력을 키워 활동지역을 거주구역 밖으로 확장시키자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그 자리를 점차 유태계, 그리고 이탈리아계 갱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오히려 이들의 세력이 앞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때는 주로 유태계와 이탈리아-시실리계 갱들이 도시 암흑가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마세리아와 마란자노 이전 세대에서는 뉴욕의 이탈리아 갱의 주도권은 이냐치오 사이에타(Ignazio Saeita)와 살바토레 다퀼라(Salvatore D'aquila, 닉네임은 토토)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냐치오 사이에타는 위조지폐를 만들다가 검거되어 30년형의 유죄 판결을 받았고, 살바토레 다퀼라는 마세리아에게 제거당하여 그 이후 뉴욕의 암흑가에서는 귀제뻬 마세리아가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다.

이그냐치오 사이에타, 닉네임은 '늑대 루포'

 

살바토레 다퀼라

 

마세리아는 1903년에 살인 혐의를 피해 시실리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왔고, 뉴욕의 강자였던 살바토레 다퀼라를 제거한 후 타고난 교활함과 난폭성으로 곧 뉴욕의 보스로 군림하게 된다. 거친 매너와 함께 자기의 앞길에 걸리적거리는 사람을 없애는 일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잔혹함이 바로 마세리아의 평판이었다. 그는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뚱뚱한 몸집으로 얼굴에도 살집이 많아 눈이 작아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중국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당시 많은 뉴욕의 갱들로부터 상납금을 거두고 있었다.

마세리아가 신대륙에 건너온 이후에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보스의 반열에 올라선 것에 비하여 살바토레 마란자노는 시실리에서부터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던 사람으로, 그는 시실리의 보스 중의 보스인 돈 비토 까시오 페로(Vito Cascio Ferro)의 밀명을 받고 1927년에 미국으로 건너온 시실리 마피아의 직계였다. 마란자노의 임무는 미국의 형제들을 돈 비토 까시오 페로의 깃발 아래 조직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뉴욕에 살고 있는 100여 명의 카스텔라마레 출신 시실리인들을 규합하여 마세리아에게 상납금을 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업을 해나갔다.

돈 비토 까시오 페로

 

마란자노는 여타 마피아 조직원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규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대화로써 남을 설득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와 마주하면 저절로 그의 열정과 권위를 느낄 수 있어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5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특히 자신이 좋아하던 줄리어스 시저의 문헌을 읽을 때에는 라틴어로 된 원본으로 읽었다고 한다.

소설 <대부>에 실명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마란자노는 미국식 갱이라기보다는 지중해 풍의 매너를 가진 클래식한 분위기의 갱이었다고 여겨진다. 젊은 시절에는 한때 카톨릭의 신부가 되려는 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로 미루어 짐작되는 그의 성격과는 상반되게 같은 카스텔라마레 출신이며 그의 제일가는 심복 부하였던 죠셉 보나노(Joseph Bonanno, 닉네임은 바나나)는 그를 타고난 투사라고 평가하고 있다.

조셉 보나노

 

마란자노의 독립적 사업운영에 대하여 관망하고 있던 마세리아는 드디어 마란자노에게 상납금을 요구해 왔고 그 요구가 거절되자 즉시 마란자노의 카스텔라마레 동지가 한 명 살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마세리아의 상납금 요구를 마란자노가 거절했다는 소문이 거리로 퍼지자 뉴욕의 지하세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란자노가 항복하지 않고 전력을 강화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전운은 더욱 깊어갔다. 1929년경의 일이었다.

마세리아와 마란자노의 대립은, 초기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게임처럼 보였으나 점차 한판의 승부가 되기 시작하였다. 죠셉 보나노, 죠셉 프로파치 등 카스텔라마레 사람들의 철통같은 단결 때문이었다. 마란자노의 보호비 상납 거절에 대하여 마세리아의 즉각적인 대응이 있었지만 마란자노 그룹은 위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세리아 쪽의 밀주운반 트럭을 하이재킹하는 등 더욱 마세리아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고 다른 군소 조직들도 점차 양측 모두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였다.

마란자노와 마세리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고, 술집이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이들 사이의 총격전은 신문의 머리기사로 보도되기 시작했으며 이젠 경찰들도 아무리 뇌물을 많이 받아먹었다 할지라도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사법당국의 체면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검거선풍이 불면서 갱들은 운신의 폭이 좁아졌고 사업에 차질이 오게 되었다. 갱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빚어낸 마세리아와 마란자노 두 사람을 비난하기 시작하였으며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였으나, 두 사람은 전혀 양보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완고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한편 다른 조직들은 마세리아와 마란자노 두 그룹 중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를 밝히도록 강요받았다.

1930115, 마세리아의 방문예정지를 미리 알아낸 마란자노는 그것이 전쟁을 끝낼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알고 수하의 정예 히트맨 3명을 그 앞에 매복시켜 저격을 시도하였다. 예정된 시각에 마세리아는 부하 2명과 함께 나타났고 히트맨들은 세 곳에서 동시에 발포하였는데, 부하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나 정작 제1목표였던 마세리아는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고 살아났다.

분노하여 이성을 잃은 마세리아는 그의 모든 부하들을 소집하여, 카스텔라마레 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남자라면 전부 다 죽여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려 상황은 게릴라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젠 톰슨 기관단총을 든 갱들이 급정거한 검정색 승용차로부터 뛰어내려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더 이상 뉴욕 시민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바로 후일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는 생사의 결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톰슨 기관단총

 

대화나 화해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고,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이 사라져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두 보스에 대한 경호는 더욱 엄중해졌고 일선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사업이 거의 마비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뉴욕의 갱들 중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으며, 경찰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 전쟁을 끝내는데 수훈을 세우는 사람은 갱과 경찰, 양쪽으로부터 훈장을 받게 될 터였다. 그리고 역사는 그 영광된 자리에 오를 사람을 찰스 루치아노로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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