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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피아]미국 마피아 - 12. 마피아와 존 에드거 후버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1.29|조회수2,205 목록 댓글 4

그러나 그래도 모든 일이 그렇게 매끄럽게 돌아간 것에 대하여는 약간의 의문을 품지 않을수가 없다. 원래 관료들이란 자기의 공적을 남에게 넘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법인데, 루이스 부챌터의 신병 인도에 대하여 FBI의 후버는 왜 그리 쉽사리 동의하였을까? 살인에 대한 죄상을 밝혀내지 못한 문책까지도 예상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존 에드거 후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때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는 뇌물 등을 통하여 수많은 당국의 관리들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던 루치아노 패밀리의 프랭크 코스텔로와 상당한 친분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후버는 갱들에게 어떤 약점을 잡혀 협박을 당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협박당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고, 따라서 그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오히려 그들과 친분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에드거 후버의 약점이란 다름아닌 동성애였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나 섹스의 취향으로는 호모섹슈얼, 즉 동성연애자로 당시에는 이러한 성향이 대외에 알려지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오늘날에도 행정부의 고위관료나 유명 정치가가 동성연애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한바탕 스캔들의 홍역을 치르기 마련인데 하물며 1930년경이라면 어떠했겠는가? 한번 상상해보기 바란다.

후버는 젊었던 시절에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에서 동성연애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FBI의 전신인 수사국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수사국의 선배이며 1920년 초까지 수사국의 감사관으로 재직하다 그만두고 나와 뉴올리언즈에서 자리를 잡은 지미 코크랜(Jimmy Corcoran)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나게 된다. 지미 코크랜은 당시 뉴올리언즈 암흑가의 멤버인 코라도 자코나(Corrado Giacona)와 연결되어 있었고 자코나를 통하여 경찰에 손을 썼던 것이다.

코라도 자코나

이때부터 후버의 동성연애 경향은 갱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몇 년 후에는 더욱 확실한 증거가 마이어 랜스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랜스키는 후버와 그의 심복인 클라이드 톨슨(Clyde Tolson)이 어느 동성연애자 파티에서 함께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진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클라이드 톨슨은 1928년에 수사국에 지원하여 근무하게 된 다음 후버의 눈에 들어 초고속으로 승진한 사람으로 기관총처럼 말을 빨리 해대는 후버와는 달리 워낙 조용하고 말이 없으며 후버의 뒤만 따라다녀 그림자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었다. 후버와 톨슨이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이 자주 사람들의 눈에 띄고는 했는데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소문은 이미 워싱턴에서는 꽤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존 에드거 후버와 그의 동성애인 클라이드 톨슨(오른쪽)

 

이와 같은 중요한 증거를 손에 넣기 위하여 갱들은 카메라 촬영을 하거나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프랭크 코스텔로는 후버의 단골인 레스토랑 스토크 클럽의 각 테이블에 마이크로폰을 장치하고 화장실에는 양면 거울을 설치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랜스키가 어떤 루트를 통하여 후버의 성행위 사진을 입수하였는가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에드거 후버는 1924년부터 1972년까지 장장 48년 동안 FBI의 국장으로 재임하였으며 1972년 현역 국장으로 있으면서 77세에 임종을 맞았다. 그가 FBI 국장으로 있는 동안 그를 거쳐 간 미국 대통령은 무려 8명이나 된다. 30대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로부터 제37대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에 이르기까지이다. 한 사람이 무려 48년간이나 미국의 최고 권력기관 중 하나인 FBI의 총책임자로 있었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그리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이다.

후버는 언론매체에 신경을 많이 쓰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언론과 신문에서 크게 다루는 은행 강도, 유명인사에 대한 납치 등의 범죄에 대해서는 총력을 기울여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고, 공산당과 공산주의에 관한 이슈라면 특히나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편이었으나 보호비 갈취, 부패 노조 등 마피아에 의해 저질러지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범죄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는 이와 같은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몰랐던 것이 아니라 슬며시 눈을 감고 모른 척,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31, 알 카포네를 감옥에 집어넣은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시카고의 언터처블, 엘리엇 네스(Eliot Ness)도 사람들이 보통 짐작하는 바와 같은 FBI 소속이 아니라 미 재무성 소속이었으며, 1939년의 루이스 부챌터 체포 건에서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후버가 직접 해낸 일은 하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1946년에 시카고를 온통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제임스 레간 사건(James M. Ragan's Continental Case)의 경우에는 후버는 오히려 부하 요원들의 수사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기까지 하였다.

엘리엇 네스

 

후버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입장은 마피아 따위의 조직화된 범죄는 미국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가 자기의 약점으로 인하여 책무를 게을리 하고 있는 동안 갱들은 그 세력을 엄청나게 넓혀가고 있었다. 그가 마피아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한참 뒤인 1963년에 이르러서였고 그것도 케네디 행정부의 범죄 척결 의지 때문에 마지못해서 인정한 것이었다.

조직범죄 수사에 있어서 FBI가 그들의 최대 공적으로 손꼽고 있는 스트로맨 작전(Operation Strawman), 도니 브래스코 작전(Operation Donnie Brasco) 등이 모두 후버가 죽은 뒤인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걸친 기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에드거 후버가 FBI의 최고 책임자로서 진작부터 자기의 할 일을 제대로 했더라면 오늘날 미국에서의 마피아의 모습은 아마도 상당히 다른 것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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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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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13.11.30 후버가 게이였다니 ㄷㄷ 충공깽;;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30 그 유명한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영화에서도 나온 사실인데.....
  • 답댓글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12.09 저도 첨 알았어요. 불독 얼굴에 동성애자라니!
  • 작성자찬이슬 | 작성시간 13.12.12 범죄의 척결자가 아니라 범죄의 방패자역활을 했던 것이군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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