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가 수감될 무렵은 미국의 경제상태가 몹시 좋지 않던 대공황의 시기였다. 1929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는 취임 연설에서 ‘오늘날 미국인들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 그 어떤 나라보다도 더 빈곤에 대한 최후의 승리에 가까이 와 있다’고 말하며 미국의 경제에 대하여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는데 그로부터 불과 수개월후인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의 대폭락과 함께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1930년 여름이 되어서는 미국의 영향으로 유럽의 모든 국가들까지 역사상 가장 극심한 불경기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물가가 치솟고 금리도 천정 부지로 치솟았으며 반대로 저축률은 제로 상태로 떨어졌다. 미국에서만도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여 그날그날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게 되었다.
금주법 시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부를 축적한 갱들은 이러한 대공황 시대에 가장 많은 현금을 가진 조직이 되었다. 부도 직전에 있던 수많은 은행의 은행장들이 그들을 만나려고 줄지어 서서 기다렸고 이제 그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좋은 조건으로 합법적인 투자처를 찾게 되어 그들의 블랙 머니는 매끄럽게 세탁된 후 화이트 머니가 되었다. 실제로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미국 은행의 약 1/3에 달하는 9,000개 정도의 은행이 도산하였다. 이때에 수많은 금융기관에 그들의 돈이 흘러 들어가 그 후 그들의 영향력이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공황의 와중에서 실시된 1932년의 제3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인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는 취임 후 곧 뉴딜 정책이라는 것을 내놓았는데, 정부의 권한 강화와 간섭 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뉴딜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보여 1936년에는 경기가 회복되는 듯 하기도 했으나 다시 1937년 중반부터 또 불경기가 시작되어 1938년에는 최악의 상태를 맞는다.
왼쪽 위-1933년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VA)의 설립 법안에 서명하는 모습오른쪽 위-뉴딜 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아래-공공사업진흥국(WPA)에 고용된 미술가가 그린 공공 벽화
1938년, 드디어 미국의 실업자가 전체 노동인구의 1/5인 1천만 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그 동안 개혁 정책이 일거에 실시되어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하였지만 하나나 따져볼 때 사실 그것들은 과거의 정책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터진 2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대공황의 여파로 다시 재기하기 어려울 만큼 쇠락했을지도 모른다.
대공황 당시 늘어난 실업자들이 무료 아침식사를 제공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선전포고 없이 침공함으로써 발발했고, 1940년 6월에는 프랑스가 독일의 손에 떨어져 전운은 전 세계를 뒤덮었다. 대전 초기 미국은 중립을 표방하였으나 사실은 노골적으로 연합군측을 지원하여 엄청난 양의 전쟁 군수물자를 대서양을 통하여 영국으로 수송하고 있었고, 소련이 연합국으로 가담하게 되자 곧 소련으로도 물자를 운반하게 된다.
1941년 1월에는 정식으로 미국도 전쟁에 참여하여 미국의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전쟁 특수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2차 대전 기간 중 미국이 쏟아넣은 전비는 자그마치 총 2,45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전쟁 직전 미국 정부 예산의 장장 50배에 달하는 액수이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기간 동안 경기 침체, 대량 실업, 디플레이션과 같은 미국의 모든 경제 문제들은 깨끗하게 해결되었고, 지표상으로는 1939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동안 미국의 연방 정부 예산이 90억 달러에서 1,000억 달러로, GNP로 표시되는 국민총생산은 910억 달러에서 1,660억 달러로 각각 크게 증가하였다.
대전 기간 내내 U-보트를 주력으로 하는 독일의 잠수함대는 '대서양의 늑대 떼'라는 별명을 얻으며 연합국측의 수송선단을 무차별 격침하여 그 악명이 높았으며, 특히 전쟁 초기에는 U-보트로 인해 대서양의 제해권이 거의 독일의 추축국측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대전 초 10개월 동안에 대서양에 가라앉은 연합국 선박만도 무려 500척에 달했던 것이다. 때문에 미 해군은 미국의 연안을 방어하는 데만도 급급할 정도였다.
독일의 U-보트
독일의 잠수함은 일정 기간 작전을 수행한 뒤 음식과 물, 그리고 연료와 무기를 재보급 받으러 다시 독일의 기지로 돌아가야 했는데, 미 해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독일이 미국 연안에 비밀 보급기지를 구축하여 장기간동안 대서양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바다를 통한 선박 왕래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염려를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넘어가기에는 당시의 전황이 너무나도 심각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미 해군 당국이 걱정한 것은 미국의 항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보타지였다. 유럽 대륙을 향하여 전쟁 군수물자와 군대를 실은 수송선단이 출발하는 곳이 바로 뉴욕 항이었기 때문에 만일 이 항구에서 배가 출발하는 시각에 대한 정보가 독일측으로 유출된다든지, 아니면 정박한 배에 대하여 직접적인 테러공격이 진행된다든지 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긴박한 분위기 아래에서 1942년 2월 9일, 뉴욕의 허드슨 강쪽 부두에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의 대서양 항로 정기 여객선 노르망디 호에서 폭발로 인한 화재가 일어나 배 전체를 완전히 태워버리고 마는 사고가 발생했다. 노르망디 호는 수리를 거쳐 전투함으로 개조되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이미 새 전함의 이름까지도 <라파이예트>로 결정되어 있던 배였다. 이 화재는 뉴욕 시의 역사를 통틀어 몇 번째 안으로 손꼽히는 일대 장관을 연출한 후 결국 배를 뉴욕 항구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히고 말았다.
노르망디 호
화재가 발생한 노르망디 호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942년 6월에는 롱아일랜드의 아메겐셋에서 독일 잠수함으로부터 내린 독일의 특수 요원들이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거의 성공할 뻔하였으나 팀장인 죠지 다슈(George Dasch)가 지방 FBI 사무실을 찾아가 자수를 하는 바람에 나머지 요원들 모두가 체포되었다. 이들이 잠수함을 통하여 상륙한 독일 스파이들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 국방성에는 초비상이 걸리게 된다.
죠지 다슈
당시 뉴욕을 비롯한 모든 미국 항만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미국 해군 정보국, 즉 ONI(Office of Naval Intelligence)였다. 해군 정보국은 그들에게 할당된 인력만을 가지고는 광대한 미국 연안을 지키기는커녕 뉴욕 항 하나만을 감시하기에도 역량이 태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들의 보안 임무를 보다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조치란 다름 아니라 미국의 항구를 온통 장악하고 있던 갱들과의 협력 작전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그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이 1942년 3월 초의 일이니, 그들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아마도 1942년 2월의 여객선 노르망디 호 폭발 사건이었을 것이다.
미국 해군 정보국 ONI의 마크
고심 끝에 그들이 제일 처음으로 접촉하기로 결정한 인물은 조셉 란차(Joseph Lanza)라는 갱이었다. 조셉 란차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뉴욕의 풀튼 수산물 시장(Fulton Fish Market)을 사실상 완전히 지배하고 있던 사람으로 그는 수산물 시장의 노동조합을 통하여 뉴욕의 수산업 종사자들을 한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다. 그가 선택된 이유는 그에게 부탁하면 어부들을 통한 연안 감시가 가능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보다 쉽게 당국에 협조하리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조셉 란차
폴튼 수산물 시장
당국의 제안에 대하여 조셉 란차는, 자기는 물론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나 단, 어느 한 사람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당국자를 돕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건강에 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말하는 어떤 한 사람이 괜찮다고 한 마디 말만 해준다면 기꺼이 도울 수가 있고, 뿐만 아니라 자기는 기껏해야 몇 명 안 되는 어부들에게만 말이 통할 뿐이지만 그 사람을 통한다면 항구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한테 협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란차가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감옥에 있던 그들의 보스 중의 보스, 찰스 루치아노였다.
결국 해군 정보국은 루치아노에게 부탁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언더월드 작전(Operation Underworld)로 알려지게 되는 미 정보당국과 마피아의 합동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에 이루어진 둘 사이의 협력 관계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 1943년의 시실리 섬 상륙작전으로 이어지고, 다시 더 후일로 이어져 1963년 피그만 작전까지 연결되게 된다. 두 그룹간의 협력으로 과연 어느 편이 더 이익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둘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것이다.
루치아노 재판에서 토마스 듀이의 스텝이었던 머레이 구르펭(Murray Gurfein)은 당시 뉴욕에 있는 해군 정보국의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과거의 인연 때문에 루치아노 쪽과의 협상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1942년 4월 중순의 어느 날, 구르펭은 루치아노의 변호사인 모세 폴렉코프(Moses Polakoff)를 통하여 마이어 랜스키를 소개 받았고 랜스키로부터 협력 작전에 대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얻게 된다. 이때의 만남이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불편했던 자리였다고 나중에 구르펭은 회고하였다.
머레이 구르펭
모세 폴렉코프
루치아노의 재판이 끝난 뒤에도 해군 정보국에 배속되기 전까지 뉴욕 지방 검사실에 있으면서 주로 갱들의 보호료 갈취 쪽을 담당하여 수사하던 구르펭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루치아노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하세계의 보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랜스키를 협상의 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였겠는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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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명일 작성시간 13.12.11 조선총독부가 김두환과 주먹들을 반도정신의용대에 보낸거하고 비슷하네.근데 조양은이나 김태촌은 오래 감옥에 있으면서 권위를 상실했는데 루치아노는 어떻게 지위를 유지했지? 단기 30년 장기 50년이면 살아서 나올거 걱정 안해도 되는 장기간인데 부하들이 딴마음 안먹은게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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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12.11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두목이 빵에 가면 바로 밑에 넘버2가 바로 조직을 장악할 수 있지만 미국의 마피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마피아에서는 두목이 없어지거나 자리를 비워도 넘버2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패밀리의 주요 멤버들이 모여서 회의를 거쳐 두목을 선출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루치아노를 비롯한 미국 마피아의 두목들은 감옥뿐만 아니라 해외로 도망쳐서도 조직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두목의 핵심 두뇌와 손발들이 조직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갑자기 세력이 뒤바뀌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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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찬이슬 작성시간 13.12.12 전개가 흥미진진하군요..다음편을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