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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피아]미국 마피아 - 15. 오맬타의 서약과 무솔리니의 마피아 탄압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2.22|조회수1,486 목록 댓글 4

시실리는 현재 이탈리아의 영토로 되어 있으나 과거에도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시실리 섬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구두코 끝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치는 정확하게 지중해의 중앙으로 지중해 해상교통로의 최고 요충지이다.

 

시실리의 위치

 

섬이 자리한 위치의 전략적인 중요성과 그곳의 풍부한 농산물 때문에 시실리는 계속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 역사를 통해서 항상 시실리는 외국 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멀리부터 따지자면 예수가 태어나기 700년 전부터 시실리 섬은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세력 각축장이었고, 그 후 포에니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가, 다음 로마에 정복되어 수백 년간 로마의 식량 창고 역할을 했으며, 다시 비잔틴 제국의 소유물이 되었다가, 9세기 경에는 아랍인들이 쳐들어와 11세기가 끝나기까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시실리 섬은 이슬람 교도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노르만 민족이 아랍인을 몰아내고 시실리 왕국을 건설한 것이 서기 1130년이다. 이때 시실리 왕국의 왕은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의 왕까지 겸하는 세력을 누렸다. 그 후 권력 계층의 복잡한 혈연 관계로 인하여 시실리는 독일인, 프랑스인의 지배를 받다가 그 다음에는 스페인의 아라곤 왕의 지배하로 들어가게 되며 이때부터는 시실리 왕국은 아라곤 왕이, 나폴리 왕국은 프랑스의 앙주 가문이 각각 나누어 다스리게 된다. 스페인의 세력은 15세기가 되면서부터 다시 나폴리에까지 미쳤으며 16세기부터는 또다시 시실리 왕이 나폴리 왕을 겸하게 되었다.

1713년부터는 이탈리아의 사보이 가문이 시실리 왕국을, 오스트리아가 나폴리 왕국을 지배하다가, 1738년에 양 지역 모두 다시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가 1816년에는 시실리 왕국과 나폴리 왕국이 통합된 양 시실리 왕국이 건설되게 된다. 그 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지배의 영향으로 유럽 전역에 혁명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어 마침내 가리발디에 의하여 1861년에 통일 이탈리아를 이루게 되기까지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시실리 주민들은 계속 타 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된 뒤에도 시실리는 공업화된 북부 이탈리아의 국내 식민지 취급을 받았다.

수많은 지배민족을 겪으면서 시실리 인들의 동질성은 같은 피지배계급이라는 사실과 같은 한 섬의 주민이라는 연고성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시실리 인들은 현실주의자들로 변하게 된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겪으며 그들은 민족의 자주성이나 시실리의 독립 따위를 주장하는 일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소용도 없으며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노르만 족, 게르만 족, 아랍 민족, 스페인 왕조 등 시실리를 다스리던 이들은 수십 년간 또는 백여 년간 시실리를 지배하다가는 또 다시 타민족으로 교체되곤 하였으므로 시실리 인은 그들에게 기대어 권력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 시실리 인들은 그들의 정부를 완전히 불신하고 있었으며,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지배층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시실리 인 중 더 현명하고,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한 마을에 한두 사람 정도 있었으며 이런 사람이 한 마을의 실질적인 대표자 역할을 하였다. 물론 마을에는 정부로부터 임명된 읍장 또는 시장이 분명히 존재하였지만 시실리 인은 그들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시실리에서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나 그로 인하여 일어나는 범죄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정부나 또는 그에 속한 기관인 경찰 등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문제를 경찰 등 나라의 관리들에게 가지고 가서 호소하는 사람은 바보 천치의 취급을 받던지, 아니면 겁쟁이로 취급받아 공동체 생활에서 완전히 매장되기 일쑤였다. 시실리 인들간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알아서 해결하였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마을의 실력자에게 가지고 사서 웬만한 해결을 부탁하는 것이다.

시실리 인들은 이들 실력자들을 ‘Men of Respect' 또는 ’Honored Society'라 불렀는데, 이들은 주민들의 갈등을 중재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해주는 역할을 주로 맡아서 했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받아 챙기기도 하였다. , 마을의 원로로서 권위를 가진 해결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해결 사업에는 약간의 폭력도 추가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비즈니스가 후일에는 보호비를 걷는 사업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실리 인들은 세금의 성격을 띤 돈을 그들의 정부에게 바치지 않고 실력자들에게 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실력자들을 외부에서는 마피아라 칭하였다.

세기가 바뀔 무렵 이들 실력자들 중에서도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생겨 이들은 보호비를 걷는다는 개념의 사업을 처음으로 미국 사회에 소개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미국에서 보호비 사업을 펼친 사람은 전설적인 시실리 마피아의 보스인 돈 비토 카시오 페로라고 전해진다. 시실리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난 카시오 페로는 28살이 되던 1900년에 자유와 기회의 나라인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정착하였다. 그는 시실리에서 했던 것처럼 뉴욕의 이민 사회를 대상으로 보호비를 걷는 비즈니스를 곧 시작하였는데 그의 철학에 따르면 보호비라는 것은 돈을 내는 사람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사업을 계속하면서 낼 수 있을 만한 정도로 그 액수가 적당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돈 비토 까시오 페로

 

 

그 뒤에 사업상 사람을 죽이게 된 카시오 페로는 뉴욕 경찰의 추적이 심해지자 시실리로 돌아왔고 사람들로부터 신대륙에서 성공하여 돌아온 영웅의 대접을 받게 된다. 카시오 페로를 검거하고자 시실리까지 따라온 뉴욕 경찰의 조셉 페트로시노(Joseph Petrosino)가 그의 정보원을 기다리다 허망하게 팔레르모의 한 피자집에서 피살되고 만 일은 그 후로 두고두고 시실리의 젊은이들이 미국 경찰을 비웃는 이야기 거리가 된다.

조셉 페트로시노

 

 

정부의 관리들을 비웃고 그들과 내통하는 사람을 혐오하는 성격은 시실리 인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이다. 시실리 주민들과 지배계급 사이에 쌓인 벽이 점차 두터워져 이제는 그 어떤 정보도 당국자에게 누설하는 것은 그들의 실력자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들의 친구들, 즉 실력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행정 당국에 가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들의 실력자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며, 권위를 무시한 것에 대하여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실리 인은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바로 오맬타의 법이다. 시실리에서 가장 천대받고 조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권력자에게 말하는 사람, 정보를 당국에 누설하는 사람이다. 시실리 인이라면 자기 아버지의 피살을 직접 목격하였다 하더라도 살인자를 당국에 고소하지 않고, 아버지가 칼에 찔렸다는 사실조차 신고하지 않는다. 그만한 배짱이 있다면 스스로 복수에 나설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실력자를 찾아가는 것이다. 만일 그가 온전히 자기의 힘만으로 아버지의 복수를 해낸다면 그도 또한 존경받는 사람들의 반열에 들게 될 것이다.

시실리 인은 너무나 침묵에 익숙해져 오늘날에도 팔레르모나 시라쿠사와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시실리의 내륙이라면 관광객이나 외지인은 길을 묻거나 하는 그들의 질문에 오직 침묵의 답변만을 들을 수 있을 따름이다. 해군 정보국의 찰스 헤픈던은 권위를 가진 사람의 허락이 없이 시실리 인으로부터 시실리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다시 마피아와 접촉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19세기 말엽 가리발디와 그의 붉은 셔츠단이 시대가 지나자 시실리에서는 권력의 공백 상태가 오게 되었고, 그 후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탈리아의 사정은 매우 궁핍하게 되어 시실리는 중앙 정부의 중심 관심사로부터 차츰 멀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마피아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여 1920년경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마피아가 거의 전 시실리 섬의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실리에서 실질적인 정부의 역할을 하던 마피아는 1920년대에 들어와 무솔리니가 집권하게 되자 그 동안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심한 핍박을 경험하게 된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당은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권력을 굳히는데 마피아의 세력이 큰 방해가 됨을 알고 그들 조직을 아예 뿌리채 뽑아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파시스트의 군대가 대규모로 시실리에 건너왔고 개혁 조치를 하나 하나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베니토 무솔리니

 

 

원래 시실리는 화산섬으로, 용암으로 인해 생성된 바위와 돌이 많아서 돌로 쌓아 만든 돌담이 많았다. 그런데 이것들이 총을 겨눌 때의 엄호물로 사용된다 하여 이 돌담들을 전부 어른의 허리 높이로 낮추도록 하라는 명령도 파시스트로 내려졌다. 그리고 각 도시와 마을에서 실력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이유 없이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기 시작하였다. 물론 마피아들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고 무기를 들어 맞서 싸우기도 하였으나 워낙 파시스트들의 진압이 폭압적인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시실리를 탈출하여 이웃 섬, 이웃 나라 또는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때 파시스트와 대결하여 싸운 것은 마피아들뿐만이 아니라 전 시실리 인 모두였으며, 이 전쟁에서는 시실리 인 한 집안 또는 한 마을의 사람 거의 전부가 몰살당한 경우도 많아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를 향한 마피아의 적개심은 이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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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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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노르망디공 | 작성시간 13.12.23 시실리 인들과 마피아에 저런 사연이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12.23 그렇군요... 지금도 저런 상황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2.23 지금도 시실리는 이탈리아 안에서 고립된 지역에 속합니다.
  • 작성자한량도령 | 작성시간 13.12.27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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