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중국군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물론 중국군은 워낙 잡다한 무기를 사용했기에 제가 그 모두를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단지 대표적이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요 무기 몇가지만 겉핱기로 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일본군이 중국전선에서 사용했던 무기들을 마찬가지의 순서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일본군 역시 8년의 기간동안 매우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으며 이 모두를 다루기는 무리가 있고 제 판단에 대표적인 것 몇가지만 언급토록 하겠습니다.
일본군은 메이지 유신 이래 기술 후발국으로서 서구의 무기를 수입한 후 이를 복제하여 국산화하는 식으로 기술을 축적하였습니다. 따라서 자국산이라고 해도 엄밀히 말하면 100% 독자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독일, 영국, 프랑스, 체코 등 기술 선진국의 무기를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중국전선에서 노획한 서방제 무기가 자신들의 것보다 월등히 우수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한편 신무기 개발의 샘플로도 활용했습니다.
1차대전 때만 해도 일본 육군의 보병무기는 서구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1930년대 이후부터 점점 기술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기초 기술이 취약한데다 재정적 열악함, 군 수뇌부의 인식 부족, 당장의 돈벌이에만 급급한 기업가들, 1930년대 이후 서구와의 관계 악화로 인적 교류가 끊긴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죠. 따라서 중일전쟁이 발발했을때 일본 육군의 주요 무기는 1차대전에서 약간 개량된 수준이었고 군 수뇌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해결할 도리가 없었기에 도리어 물질적인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주장합니다. 중국전선에서도 서방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 중앙군과 싸울 때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특히 장고봉, 노몬한전투에서 자신들의 취약점을 톡톡하게 절감합니다. 그래서 대소강경파들의 목소리는 쏙 들어가고 대신 자기들 생각에 좀 더 만만하다 싶은 "영미귀축"에게 싸움을 걸게 되는 것이죠.
아리사카 38식 보병총. 1905년(메이지 38년)에 일본 육군의 제식 소총으로 채택되어 기존에 사용되던 무라타 단발총이나 30년식 보병총을 대체합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주력 소총으로 사용되었으며 도쿄, 고쿠라, 나고야, 인천 등 주요 병공창에서 총 380만명정이 생산되어 메이지 이래 일본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소총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아리사카는 설계자이자 육군 기술부장이었던 아리사카 나리아키라(有坂成章, 1852.4.5 ~ 1915.1.12) 소장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영화 "놈놈놈"에서 일본군이 들고 있던 총도 이 총.
38식 소총은 러일전쟁 당시 30년식 소총에서 지적되었던 문제점을 개량하여 조작성이나 명중률에서 많이 개선되었으나 탄두가 6.5mm였기에 중국군이 사용한 한양식 소총보다도 위력과 관통력에서 열세였습니다. 탄두가 작은 만큼 반동이 작고 명중률은 높아진 것에 반비례하여 위력은 떨어진 것이죠. 일본군 소총은 중국군을 맞혀도 치명상을 주기 어려운 반면, 일본군은 바위뒤에 엄폐하고 있는데도 중국군 소총탄은 바위를 뚫고 일본군을 관통시켜 죽거나 부상을 입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유사한 사례가 총에 몇발이나 맞고도 좀비처럼 뛰어오는 이디오피아 병사에게 경악했던 이탈리아군의 카르카노 M1891 소총. 사람에도 이런데 하물며 장갑차량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죠.
또한 만주의 혹독한 기후에서 고장이 잦았으며 총신 길이가 127.6cm에 달하여 동시기 여러 소총들 중에서도 특히 길기로 유명한 모신나강 소총(130cm)과 맞먹을 정도라 휴대도 불편했습니다. 착검할 경우 무려 1.7m에 달해 평균 160cm가 될까말까하던 일본인 신장보다도 길었습니다. 뭔가 20세기판 파이크부대? 보병의 착검 돌격이야 말로 일본군의 생명이라고 생각했던 그들답다 할 수 있죠. 또한 부품이 규격화되지 못하여 어느 병공창에서 생산되었느냐에 따라 치수가 조금씩 달라 똑같은 소총인데도 부품이나 총탄이 안 맞는 경우도 많았으며 전쟁말기로 가면 갈수록 그야말로 날림이 되어 명중률은 고사하고 안전성은 어느 누구도 보장 못하는 물건이 됩니다.(일본식 국민돌격소총. 하긴 일본 본토 방위대에게 지급된 진정한 국민소총은 죽창이었으니.)
일선 병사들은 자신들의 소총보다 중국군의 한양식 소총이나 중정식 소총에도 밀리자 중국군 소총을 대거 노획해 약실만 6.5mm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으며(반대로 중국군 역시 일본군 소총을 노획하여 약실을 7.92mm로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화력을 강화한 99식 소총을 급히 개발하였으나 생산량이 부족해 38식 소총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 제원 : 구경 6.5mm, 길이 1,276mm(착검시 1,663mm), 포구초속 762m/s, 유효사거리 460m, 장탄수 5발
※ 사진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4%B8%89%E5%85%AB%E5%BC%8F%E6%AD%A9%E5%85%B5%E9%8A%83
아리사카 99식 보병총. 중일전쟁에서 38식 소총의 형편없는 위력이 문제되자 38식 소총을 베이스로 개량하여 1939년(황기 2599년)에 제식화되었습니다. 탄약을 6.5mm에서 7.7mm로 바꾸어 위력을 강화하는 한편, 부품을 간소화하여 생산성을 높였고 가늠자와 가늠쇠, 내구성에서도 개선되었습니다. 또한 구시대적인 착검 돌격에만 집착한 나머지 숏다리 일본인들의 현실은 망각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총신길이와 무게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총의 카타로그상 스팩 자체는 동시기 열강들의 Kar98k나 모신나강, M1903 스프링필드 등과 비교했을때 결코 뒤진다고 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문제점으로 인해 오히려 일선에서는 "改惡銃"이라고 불리었습니다. 7.7mm로 탄두가 커진 만큼 위력은 강해졌어도 체격이 작은 일본군 병사들이 감당하기에는 반동이 너무 커 명중률이 되려 낮아졌습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예전같으면 면제대상이 되었을만큼 체격과 체력이 형편없는 사람까지 징집되면서 이런 문제점은 더욱 부각되었죠.
또한 부족한 생산량에다 기존의 6.5mm 탄약과 호환이 되지 않아 가뜩이나 열악한 병참에 심각한 부담만 주었습니다. 그나마 태평양전쟁 이전에 생산된 초기형은 품질이 비교적 우수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대충 만들다보니 심지어 강선이 없거나 사격중에 총신이 폭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총신의 내구력도 약해서 백병전중에 미군이 M1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면 총이 두쪽으로 갈라지기도 했으며 탄의 위력은 여전히 형편없어 7.7mm인데도 7.62mm탄을 사용하는 미군의 3/4에 불과할만큼 약했습니다.
전쟁기간 총 250만정이 생산되었으며 전쟁이 끝나면서 대부분 폐기되었으나 해방후 국내에 남겨진 99식 소총들은 미군 탄약에 맞추기 위해 7.62mm로 약실만 개조한 후 초창기 우리군경들이 사용합니다. 미군은 M1소총과 M1카빈 소총을 딱 5만정만 주었기 때문에(미국이 허가한 한국군의 규모가 5만명) 부족분은 99식 소총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었죠. 또한 일본의 경찰예비대(자위대의 전신)도 이 소총을 사용했으며 중국군은 이 소총을 노획하여 마찬가지로 약실을 개조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인민해방군과 북한군, 2차대전 끝나고 동남아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해방전쟁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 제원 : 구경 7.7mm, 길이 단총 1,118mm, 장총 1,258mm, 무게 단총 3.8kg 장총 4.1kg 포구초속 730m/s, 유효사거리 500m, 장탄수 5발
※ 사진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4%B9%9D%E4%B9%9D%E5%BC%8F%E5%B0%8F%E9%8A%83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전선이 점점 확대되고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원해야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격렬한 소모전이 벌어져 가장 기본적인 소총의 재고조차 부족해집니다. 특히 육군의 수요에 해군이 밀리자 일본 해군은 삼국동맹이 체결된 것을 이용해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소총을 대량으로 주문합니다. 특히 이탈리아제 카르카노(Carcano) M1891 소총은 구경이 38식 소총과 동일한 6.5mm였기에 탄약이 호환된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M1891 소총을 완제품으로 수입한 것이 아니라 38식 소총의 제작을 의뢰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제 38식 소총, 이른바 이식소총(イ式小銃)이었습니다. 말이 38식이지 노리쇠를 비롯한 주요 부품은 M1891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으니 실상 외형이나 성능에서 M1891 소총과 크게 다를바 없었으나 M1891은 6발 장전이 가능했지만 이식소총은 5발 장전이었습니다. 1938년에 주문하여 1940년까지 총 6만정이 수입되었습니다. 주로 해군 육전대에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 구경 6.5mm, 길이 1,280mm 무게 3.95kg 포구초속 765m/s, 유효사거리 450m, 장탄수 5발
※ 사진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3%82%A4%E5%BC%8F%E5%B0%8F%E9%8A%83
2차대전중 독일 육군의 제식소총인 Kar98k소총. 일본은 イ式小銃이외에도 モ式小銃이라는 이름으로 독일로부터 Kar98k소총을 5만정을 수입했습니다. 또한 중국군의 한양식 소총과 중정식 소총과 같은 독일제 마우저 소총을 베이스로 한 소총들은 성능이 우수했기에 이를 노획한 후 약실을 6.5mm로 교체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봉천, 장춘과 한양, 금릉, 광주 등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의 주요 군수공장은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대량으로 생산하였습니다. 여기다 중국군에게 노획한 독일제 Gew98 소총을 카피하여 46식 소총이라고 이름을 붙인후 태국에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 구경 7.92mm, 길이 1,100mm 무게 3.9kg 포구초속 760m/s, 유효사거리 500m, 장탄수 5발 ※ 사진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3%83%A2%E5%BC%8F%E5%B0%8F%E9%8A%83
일본군 주력 기관단총이었던 百식기관단총. 1939년 독일로부터 MP18을 수입하면서 이를 베이스로 개발하였으며 1942년부터 생산에 들어갔으나 자원이 빈약한 일본의 국력상 가뜩이나 병참에 부담도 큰데 이런 총을 일선에 대거 보급했다가는 탄약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군 수뇌부의 보수성으로 고작 1만정이 생산되었고 주로 공수부대(挺進団)에 보급되었습니다. 게다가 기관단총이 기관총과 뭐가 다른지 구분할 줄 몰랐던 수뇌부는 여기에 기관총처럼 양각대를 달수 있도록 하고 착검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구조가 더욱 복잡해져 생산력을 더욱 떨어뜨렸습니다. 또한 위력이 형편없기에 유명했던 남부식 8mm 권총탄을 사용하였습니다.
○ 구경 8mm, 길이 900mm 무게 4.22kg 포구초속 335m/s, 유효사거리 30m, 발사속도 초기 450발/분, 후기 800발/분 장탄수 30발
※ 사진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100%EC%8B%9D_%EA%B8%B0%EA%B4%80%EB%8B%A8%EC%B4%9D
패망직전인 1945년초 본토결전계획에 따라 모든 남자들을 총동원합니다. 약 300만명이 소집되었는데 이들에게 지급할 무기가 있을리 없었죠. 따라서 학교의 책걸상을 재료로 간이 소총이랍시고 조잡한 물건들을 만들어 냅니다. 강선도 없고 단발총이라 한발 장전한후 발사하고 다시 장전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총알도 없어서 흑색화약과 못이나 볼트, 돌맹이를 넣어 마치 화승총처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로서는 다행히도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 이런 장난감들을 실전에 쓸 일은 없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gun&no=3893
[출처] [중일전쟁] 중일 양군이 사용했던 무기들 7.일본군 소총|작성자 욱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