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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피아]미국 마피아 - 16. 루치아노의 가석방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2.29|조회수1,310 목록 댓글 0

해군 정보국으로부터 또 한번의 부탁을 받았을 때 찰스 루치아노는 부하들을 시켜 시실리 섬의 상황과 지리적 특성을 해군측에 알려 주도록 하였고, 부하를 통하여 시실리의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여 아직도 시실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팔레르모의 마피아 보스, 칼로제로 비지니(Calogero Vizzini)를 연합군측과 연결시켜 준다. 이때 해군 정보국이 미리 수집한 시실리 섬에 대한 정보는 그 중 대략 40% 정도가 유용한 정보였던 것으로 나중에 판명된다. 실로 엄청난 적중률이 아닐 수 없다.

칼로제로 비지니

 

 

1943710, 드디어 시실리에 상륙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미군과 영국군의 연합군은 칼로제로 비지니의 부하를 만나 그들의 안내로 험한 에트나 산의 준령을 어렵지 않게 넘어 진격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적군 동태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었다. 만일 마피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시실리 상륙작전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많은 연합군 장병의 희생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시실리의 산길을 이동하는 셔먼 전차

 

 

마피아의 협조로 쉽게 시실리를 점령하게 된 연합군은 시실리의 군정 기간 내내 계속 마피아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연합군 사령부는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에 의하여 감옥에 투옥된 정치범들을 거의 모두 풀어주었는데, 사실은 이들의 대부분이 마피아들이었다. 점령군은 주변의 조언을 얻어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 중 유력 인사들을 각 도시나 마을의 시장, 읍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리하여 파시스트 때문에 괴멸되다시피 하였던 마피아들은 순식간에 다시 시실리 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들은 전쟁 후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암시장의 이권을 장악하는 등 곧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뒤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이들의 세력은 오늘날의 이탈리아 정국으로까지 연결된다.

연합군의 군정 포고문을 발표하는 시실리 경찰

 

 

1945,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측의 승리로 끝나자 찰스 루치아노는 다시 가석방 심의 위원회에 탄원을 넣었는데, 해군 당국이 루치아노의 협조 사실에 대하여 확실한 언급을 해주지 않는 등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결국 그의 가석방 탄원은 위원회의 허락을 얻었고, 뉴욕 주지사의 최종 승인을 거쳐 마침내 암흑가의 황제 루치아노는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가석방 위원회의 석방 결정의 근거는 그가 2차 세계대전 중 당국의 전쟁 수행 노력과 관련하여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석방에는 단, 루치아노가 국외로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가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이것은 자유의 대가로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었다.

이때 루치아노의 가석방에 대하여 최종 승인을 허락한 사람은 바로 지난 1936년에 루치아노를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넣었던 토마스 듀이 그 사람으로, 그는 1942년의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여 이때는 뉴욕 주의 주지사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하여 체포한 뒤 수감시켰던 루치아노의 가석방을 그렇게 쉽사리 듀이가 동의한 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의 하나로 그가 1942년 선거 때 마피아, 특히 프랭크 코스텔로로부터 9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는데 꽤 설득력을 가진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루치아노는 1946210, 맨해튼을 떠나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향하는 여객선 로라 킨 호를 탄다. 그가 떠나던 날 부두에는 항만 노조에 소속된 많은 노동자들이 나와 사람의 바리케이트를 쳐서 기자나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프랭크 코스텔로, 마이어 랜스키, 알버트 아나스타샤, 론지 즈윌먼, 마이크 라스카리 등 수많은 동료들이 직접 나와 루치아노를 전송하였다. 작별의 자리에서 코스텔로와 랜스키는 그들의 사업으로부터 나오는 이윤을 계속 확실하게 분배할 것을 루치아노에게 약속한다. 이날 뉴욕 시장 윌리엄 오드와이어(William O'Dwyer)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자그마한 소방선을 타고 나와서 여객선으로 건너가, 루치아노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

윌리엄 오드와이어

 

 

허드슨 강의 여객선 노르망디 호 폭발사고로부터의 모든 일이 대부분 마이어 랜스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루치아노는 1946년에 미국을 떠나면서 랜스키를 절대적으로 따르라는 말을 동료들에게 남겼다. 자신이 건설한 제국의 더 큰 번영을 미처 직접 다 보지 못하고 미국을 떠나야 했던 것은 루치아노로서는 더 없는 유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도 그는 시실리와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미국으로의 마약 운송에 계속 관여하였고, 1946년 말에는 쿠바로 날아가 신디케이트의 모임을 직접 주재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과 1957년에는 미국의 동료들을 소집하여 시실리에서 회합을 가지기도 하여 1962126, 65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나폴리의 카포디치노 공항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신디케이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러키'찰스 루치아노가 미국에서 추방당한뒤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측근들과 함께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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