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패밀리와 함께 미국을 양분하여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카고 패밀리이다. 뉴욕에서는 5대 가문이 활동하며, 혹은 서로 다투고 혹은 서로 연합하면서 지내온 것에 비하여 시카고에서는 1929년에 카포네 패밀리의 우위가 확립된 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직 그 한 가문이 미국의 세 번째 대도시 시카고를 지배해왔다.
뉴욕의 가문들이 뉴저지 주를 비롯하여 인근의 보스톤, 필라델피아, 뉴욕 주의 버팔로,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시카고 패밀리도 주변의 치체로, 밀워키, 디트로이트와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 캔자스 시티까지 그들의 세력을 뻗치고 있다. 이들 다른 도시들에도 자생적인 조직이 있었고 자신들의 보스가 있었지만, 중요한 의사결정 등의 문제는 뉴욕이나 시카고의 의견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캔자스 시티의 보스인 니콜라스 치벨라(Nicholas Civella)는 시카고 보스 샘 잔카너(Sam Ciancana, 닉네임은 ‘얼간이’ 또는 ‘무니(Mooney)')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된다는 식이다.
니콜라스 치벨라
알 카포네로 인한 시카고의 이미지와, 소설 <대부>에서 마리오 푸조가 야만적인 조직이라고 혹평한 것 등의 영향으로 시카고 패밀리의 지명도는 뉴욕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평가절하된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러나 시카고 패밀리의 힘은 뉴욕의 패밀리들에 비하여 결코 못하지 않으며, 가문 하나 하나를 놓고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전 미국에서 단연 첫 번째로 손꼽힌다고 볼 수 있다.
알 카포네
시카고 패밀리가 그만한 위상을 가지게 된 데에는 물론 많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였을 것이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는다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어떤 한 사람의 영향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1944년에 폴 리카의 후임으로 시카고의 액팅 보스가 된 이래 1992년에 8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시카고의 보스 중의 보스였던 사람, 약 50년간 시카고와 시카고 서쪽의 미국을 사실상 지배한 사람, 바로 토니 아카르도(Anthony Accardo, 닉네임은 ‘방망이 조’ 또는 ‘큰 참치’)이다.
토니 아카르도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지만 시카고에는 토니 아카르도가 있었다. 알 카포네의 경호원으로 경력을 시작하였고, 카포네가 수감되어 무대의 중앙으로부터 떠난 이후로 프랭크 니티(Frank Nitti, 닉네임은 ‘집행자’), 폴 리카의 뒤를 이어서 시카고의 보스가 된 후 1957년에 콘실리에리가 되어 조직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로도 시카고 패밀리가 큰 사건과 맞닥뜨릴 때마다 기꺼이 다시 지휘봉을 맡아 조직을 단합시키고 위기를 극복한 사람이다.
프랭크 니티
폴 리카
토니 아카르도는 마피아와 미국의 사법당국 모두에게 전설로 통하는 인물로, 그는 마피아 정회원으로서의 경력 66년간, 그리고 범죄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점부터 따지면 70년이 넘은 기간 동안 하루도, 그야말로 단 하루도 감옥에서 밤을 지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도 기소된 적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항상 불구속 기소, 또는 보석금 석방으로 방면되었고, 확실한 증거가 제시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항상 무죄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세간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된 적은 거의 없기에 그를 아는 일반인은 그리 많지가 않다.
토니 아카르도를 연구하는 것은 시카고 마피아, 나아가서 미국 마피아를 연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고, 토니 아카르도가 간 길을 따라가는 것은 마피아를 비롯한 조직범죄의 세계에서 보스로 올라설 수 있는 길을 찾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카르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은 알 카포네를 비롯한 시카고 마피아 역사의 초기부터 언급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일 것 같다.
알퐁스 카포네, 알 카포네는 나폴리로부터 이주한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 부부의 넷째 아들로 1899년에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고, 10살 무렵 때부터 거리에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 뒤 카포네는 당시 자니 토리오와 프랭크 예일 등이 이끌고 찰스 루치아노도 한때 그 멤버였던 뉴욕의 유력한 갱단, 파이브 포인트에 스카웃되어 보다 본격적인 길로 나서게 되며, 1919년에는 시카고로 먼저 가 있던 자니 토리오의 부름을 받고 시카고로 건너가게 된다.
자니 토리오
1900년대 말, 시카고의 매춘업계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게 된 자코모 콜로시모(Giacomo Colosimo, 닉네임은 ‘큰 짐’ 또는 ‘다이아몬드 짐’)는 이제 다른 갱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어 본격적인 보호비 상납의 강요를 받는다. 보호료의 납부는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로서 힘 있는 사람이 어떤 회사나 사업장을 일어날 수 있는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며 그 대신에 약간의 돈을 받는 풍습이다. 생각 끝에 콜로시모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당시 뉴욕의 암흑가에서 지명도를 높이고 있던 그의 조카, 자니 토리오에게 시카고로 와서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는데 이것이 1909년의 일이다.
짐 콜로시모
이때 만일 콜로시모가 갱들에게 보호비를 지불하고 안전하게 사는 쪽을 택했더라면 시카고의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자니 토리오가 시카고로 건너온 이후 콜로시모를 위협하던 세 명의 갱이 홀연히 사라지고 자코모 콜로시모의 사업에는 다른 사람의 보호가 전혀 필요 없다는 사실이 점차로 시카고의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해지면서 콜로시모는 더 이상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
이 시기의 시카고에는 많은 갱단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찰스 디온 오베니언(Charles Dion O'Banion)이 이끄는 아일랜드계의 세력이 매우 컸으나 콜로시모는 자니 토리오와의 협력관계로 인해 곧 시카고의 지하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디온 오베니언 아일랜드 갱과 콜로시모-토리오의 이탈리아 갱은 이후 계속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지만 1929년을 기점으로 드디어 이탈리아 갱의 우위가 확립되며, 1932년에 있었던 아일랜드 갱단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마지막으로 시카고에서의 독립적인 아일랜드 갱단의 세력은 사실상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디온 오베니언
1910년에 콜로시모는 ‘콜로시모의 카페(Colosimo's Cafe)’라는 레스토랑을 시카고의 중심가에 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은 유명 인사들이 자주 모이는 시카고의 명소가 되었고, 당시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던 엔리코 카루소는 공연차 시카고에 오면 항상 이 레스토랑에 들러서 와인을 마시고는 할 정도였다고 한다.
콜로시모의 카페 광고 전단지
두 살 때 가족을 따라 남부 이탈리아의 올사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온 자니 토리오는 십대에 이미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파워풀한 갱단 파이브 포인트의 중요한 멤버가 되어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아 사람들로부터 ‘리틀 자니’라고 불렸지만 잔혹함과 냉정함, 그리고 빠른 두뇌 회전으로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테러블 자니’였다. 토리오는 1909년, 27세의 나이로 삼촌 콜로시모의 부름을 받고 시카고로 가서 삼촌의 문제를 해결해준 다음부터는 시카고에 머물면서 계속 삼촌의 사업을 돕게 되었다.
1903년경의 자니 토리오
1915년에 이르러 콜로시모는 토리오에게 허름한 윤락가 한 곳을 맡겨 경영을 하도록 시켰는데 이때 토리오는 삼촌에게 그의 눈부신 사업 수완을 보인다. 그는 싸구려 같아 보이는 집을 완전히 개조하여 말끔히 단장하였고, 창녀들도 깔끔하게 화장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혀 귀여운 처녀들처럼 보이게 해서 손님을 끌었던 것이다. 이 집은 곧 매우 유명해져 콜로시모에게 새로운 수입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토리오의 능력을 인정하여 자신의 모든 매춘 사업과, 점차 다른 사업까지를 전부 맡기게 되었으며 그 자신은 토리오가 가져오는 돈으로 상류사회의 생활을 즐겼다.
콜로시모-토리오의 콤비는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18년부터 금주법이 부분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이들 둘 사이의 협력 관계는 점차 틈이 벌어지게 되며, 그 발단은 밀주사업에 대한 두 사람간의 견해 차이에 있었다. 갱 조직이 보다 큰 규모의 조직범죄단으로 도약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금주법이라는 점이 이미 설명하였다. 술의 제조와 판매가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오늘날의 생각으로는 실로 터무니없게 들리는 이러한 주장은 이미 1800년대 중반부터 미국 내에서 존재해왔다고 하는데, 곡절 끝에 드디어 일반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금주법이 1920년 1월 26일부터 발효하게 된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일을 금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비밀 주점, 주류 밀매 등 술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강제로 억압한다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로마 시대 때부터 집에서 와인을 만들어 마셔왔고, 선천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아일랜드 인들 역시 옛날부터 가정에서 위스키를 만들어 마시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 등 술을 마시는 것을 법으로 막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멍청한 발상이었던 것이다.
금주법이 의회를 통과하였을 때 토리오는 콜로시모의 매춘 조직과 200군데가 넘는 윤락가를 이용하여 밀주업에 뛰어들기를 원하였으나 콜로시모는 새로운 사업의 잠재력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였고, 지금까지의 사업만 가지고도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사업 영역을 넓혀야 할 아무런 까닭을 발견할 수가 없어 기존의 사업에만 안주하고자 하였다. 그때 다른 조직들은 이미 밀주사업을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초조해진 쟈니 토리오는 마침내 보스이자 동업자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삼촌인 콜로시모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이탈리아 인은 누구보도 친족을 매우 사랑하지만, 사업에 방해가 될 때에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며, 토리오는 이점에 있어서 그들 사업의 원칙을 고수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20년 5월 11일, 부탁한 물건이 도착했다는 토리오의 전화를 받고 자신의 카페로 나온 콜로시모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 카포네와 그의 동료 프랭크 예일(Frank Yale)로부터 머리에 총격을 받아 그의 영혼은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된다. 알 카포네는 이보다 1년 전인 1919년에 자니 토리오의 부름을 받고 시카고로 와서 토리오가 오픈한 레스토랑 ‘포 듀스(Four Deuces)'의 경비원 겸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다. 카포네는 뉴욕에서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은 갱으로, 바텐더 따위나 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지만 토리오의 원대한 계획에 의해 미리 시카고로 건너왔고, 주변으로부터의 의혹의 눈길을 무마시키기 위해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해된 콜로시모
프랭크 예일
자코모 콜로시모의 장례식에는 시카고 시의회 의원과 판사 등 수많은 유력 인사들이 참석했다. 자니 토리오는 밀주사업이 향후 거대한 부를 가져다 줄 황금의 사업, 미래의 사업임을 알고 그의 삼촌이기는 하나 시대에 뒤떨어진 감각을 가진 보스, 자코모 콜로시모를 어쩔 수 없이 제거하였고 콜로시모의 사업 조직을 인수하여 이제 시카고에서 가장 유력한 보스로 부상하게 되었다.
‘여우’라는 별명을 가졌던 자니 토리오는 자기의 사업에 대하여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아일랜드 갱, 유태계 갱, 폴란드 갱, 또 다른 이탈리아 갱(젠나 형제가 대표적) 등 다른 조직들도 모두 새로운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바, 밀주사업은 한두 사람의 부리를 적시고(Wet one's beak, 이 표현은 갱들의 은어로 수입을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다) 말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컸기 때문에 서로들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각 갱단에게, 각자가 기존의 구역을 유지하며 사업을 하면서, 서로 싸우지 않고 오히려 긴밀히 협조를 하면 모든 사람이 함께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다들 웬만한 위협이나 협박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위인들이었으나 토리오의 논리 정연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리오의 제의를 승낙하였다.
안젤로 젠나
그리하여 그는 마치 상장 회사의 뛰어난 경영자와도 같이 지하세계의 사업을 진정으로 조직화하고 합리화시킨 첫 번째의 인무로 꼽힌다. 그는 그의 뛰어난 사업 능력과 콜로시모를 제거할 때에 보여준 것과 같은 완벽한 기획력으로 곧 콜로시모가 휘하에 두었던 것 보다도 훨씬 더 큰 사업 제국을 거느리게 되며, 그 영역은 엄청난 이윤을 보장하는 밀주사업을 중심으로 그밖에 매춘, 도박, 경마도박, 하이재킹, 고리대금업, 보호비 수금 등 수익을 남기는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의 사업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이들은 알 카포네와 면담을 하고 나면 생각을 바꾸고는 했다. 사업을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가와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토리오는 주지사와 시장 선거, 지방 선거 등에서 협조적인 정치인이나 당파를 위하여 표를 모아주는 등 외곽 사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