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네가 보스가 된 후에도 다른 갱들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1926년 9월 20일에는 아일랜드 갱들이 시카고 인근 도시 치체로의 호돈 호텔(Hawthorne Hotel)에 자리하고 있던 카포네의 지휘본부를 직접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는 히트맨들이 7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와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카포네를 향하여 기관총으로 수천 발의 사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포네를 비롯한 그 아무에게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였다. 이날 카포네를 몸으로 감싸 안고 굴러, 바닥에 눕혀 그의 목숨을 보호한 경호원이 바로 토니 아카르도이다. 이후 토니 아카르도는 카포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치체로의 호돈 호텔
카포네를 공격할 때 쓰였던 M1928 톰슨 서브머신 건
오베니언의 뒤를 이은 조지 모란은 다른 이탈리아 갱인 조셉 아이엘로 그룹과 연합하였고 그들은 카포네를 독살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카포네의 개인 요리사를 매수, 그의 음식에 독을 타려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돌아선 요리사가 카포네에게 눈물을 흘리며 음모를 고백하여 독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얼마 후 조셉 아이엘로와 조지 모란 등이 자신의 목에 5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카포네는 드디어 인내가 극에 달하여 그들의 사형 선고를 부하들에게 내리게 된다. 당시 갱단간의 유혈 사태는 훗날 시카고의 ‘맥주 전쟁(Chicago Beer War)’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모든 혼란은 마침내 1929년 2월 14일의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로써 알 카포네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며, 드디어 시카고에서 아일랜드 계에 대한 이탈리아 계의 주도권이 확립된다. 일설에 의하면 아일랜드 갱을 이끌고 있던 조지 모란은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이 있은 후 카포네에게 진저리를 치고 고개를 가로로 내흔들며 시카고를 떠났다고 하고, 마지막 남은 그의 부하들이 아일랜드 갱의 옛 영화를 재현해보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패퇴하게 된다.
발렌타인 데이의 히트는 그전 해 10월부터 면밀하게 계획되었다. 목적은 자니 토리오의 피격에 대한 복수와 아일랜드 갱 조직을 괴멸시키기 위함이었고 목표는 죽은 오베니언의 뒤를 이은 조지 모란, 테드 뉴베리(Ted Newberry) 등 이었다. 카포네의 일급 부하인 잭 맥건(Jack Mcgurn, 원래 이름은 빈센초 데모라, 닉네임은 ‘기관총’)이 작전의 플롯을 짰다. 타겟에 대한 철저한 탐색을 시행하여 그들의 본거지, 하루 일과 등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고 한편으로는 사업상 관계가 있는 다른 도시의 동료에게 연락하여 믿을 만한 히트맨을 충원했다. 카포네의 부하들도 모두 만만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얼굴이 상대편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잭 맥건
지원조 선정, 작전에 쓸 차량과 탈출 시에 사용할 차량 확보, 번호를 통한 추적이 불가능한 무기 조달 등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카포네는 디트로이트의 조직을 통하여 모란에게 최근에 하이재킹한 대량의 술이 있으니 사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도록 한다. 모란은 제의를 수락하였고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클라크 거리 2122번지에 있는 그들의 창고에서 만나 거래를 하기로 한다.
조지 모란의 부하 7명은 14일 아침, 약속한 대로 그들의 맥주 창고 앞에서 디트로이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차를 타고 나타난 일단의 정복 경찰과 사복 형사로부터 검문을 받게 된다. 경찰이나 검찰 등 사법 기관과는 충돌을 피하는 것이 갱들의 원칙이었으므로 이들도 별 반향 없이 검문에 응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창고 앞에 일렬로 세운 다음 벽을 향하여 돌아서도록 했으며, 통상적인 무기 검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이들이 모두 뒤로 돌아선 순간 경찰로 위장한 히트맨들은 기관총으로 1,000여 발의 사격을 가하여 이 아일랜드 갱들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 사건
이들은 일이 끝난 후에는 정복 경찰이 갱들을 연행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현장에서 빠져 나왔다. 이때의 경찰과 건맨은 모두 7명으로 세인트 루이스와 브루클린에서 온 히트맨들이었다. 이때 알 카포네는 마이애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변호사와 함께 앉아 이곳 저곳으로 바쁘게 전화를 걸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다.
당시 그들의 연기가 얼마나 자연스러웠던지 다음날 시카고의 유력 신문들은 실제로 경찰이 갱들을 사살한 것이라고 발표할 정도였으며, 사용된 총기의 확인을 위해서 경찰 무기 창고가 수색을 당하여 전문가에 의한 총기 화약 반응 검사가 시행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발렌타인 데이의 처형은 마피아의 작전 중에서 가장 일반에게 잘 알려진 히트가 되었는데, 사실은 그것은 그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작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계획의 1차 목표였던 조지 모란을 놓쳤던 것이다.
2월 14일 아침, 모란은 그의 부하 윌리 마크스(Wily Marks), 테드 뉴베리와 함께 막 그들의 창고에 도착하려던 찰나였는데 경찰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걸음을 늦추었다. 의례적인 순찰인 줄 알고 잠시 몸을 숨겨 기다리고 있던 모란과 일행은 총소리를 들었고, 다시 잠시 후 경찰이 떠나는 것을 본 후 몸을 피하기 위해 현장에서 빠져나갔다.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로 이들은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조지 모란을 잡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이 사건은 지하세계에 있어서의 카포네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만드는데 뚜렷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알 카포네는 충직한 경호원인 루이스 캄파냐(Louis Campagna), 토니 아카르도, 필립 단드레아(Philip D'Andrea), 다고 로렌스 망가노(Dago Lawrence Mangano), 프랭크 리오(Frank Rio)를 비롯하여 프랭크 니티, 폴 리카, 잭 맥건, 머레이 험프리스(Murray Humphreys, 닉네임은 ‘낙타’) 등 그의 명령이라면 즉시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는 1,000명 가까운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시카고 밖으로도 미쳐, 1929년에는 그의 제창으로 각 지역 보스들의 모임이 처음으로 아틀랜틱 시티에서 열리게 될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모임의 기조 연설을 맡았으며, 유선 통신이 경마 도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역설하며 당시 시카고에서 유선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던 사업가 모세 아넨버그를 다른 지역의 보스들에게 소개하기도 한다.
루이스 캄파냐
필립 단드레아
다고 로렌스 망가노
프랭크 리오
머레이 험프리스
바야흐로 그의 조직은 시카고와 치체로 등 인근 도시에서 6,000군데의 밀주집과 2,000군데의 마권판매소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밖에도 매춘, 보호비와 거리세 갈취, 고리대금업 등과 노조 개입으로부터 얻는 부당 수익까지 합하여 1주일에 자그마치 6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1주일에 6백만 달러의 수입이란 도저히 믿기에 힘든 액수이나 이 숫자는 당시 시카고 데일리 뉴스 지의 평가에 의한 것이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카포네 조직은 1927년 한해에만도 1억 5백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카포네는 또 뉴욕의 대부 마세리아의 후원까지 받고 있어 시카고에서 10년 남짓 밖에는 살지 않았으나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카포네는 떠들썩한 언론의 조명을 받기를 즐겨 했고, 또 대중들은 계속되는 갱 전쟁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로 다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비난의 여론이 들끓어 마침내 그의 시대에도 황혼이 오게 된다. 끊이지 않는 갱들 간의 유혈 전쟁은 사법기관의 직무 유기에 대한 시민들의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힘입어 시카고에는 소수의 정의로운 시민들에 의하여 시카고 범죄 위원회라는 단체가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시카고의 사법당국이 범죄 조직으로부터 매수되어 전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려 들지 않는데 분노하여 위원회의 의장과 회원인 몇몇 기업가들이 워싱턴으로 가, 직접 대통령 허버트 후버에게 호소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알 카포네는 시카고 범죄 위원회에 의하여 공공의 적 제1호로 지목되었고, 대통령의 특별 명령에 따른 특수 수사팀이 결성되어 이 팀의 활동은 결국 1931년에 카포네를 탈세 등의 혐의로 기소하게 된다.
법정에 출석하는 알 카포네
이때의 특수 수사팀은 ‘언터처블(The Untouchables)'로 잘 알려져 있고,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되었다. 가장 최근의 영화에서 케빈 코스트너가 분했던 이 수사팀의 책임자는 재무성 소속의 엘리엇 네스이다. 이 수사팀의 활약을 가지고 조직범죄 척결에 대한 당시 수사당국의 의지와 노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일반에게 홍보되고 있으나, 사실 이때 시카고의 사법당국은 완전히 카포네 조직에 의하여 매수되어 있었다. 즉, 갱으로부터의 언터처블이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부터의 언터처블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알 카포네가 체포될 당시는 갱 조직이 일로 번창하고 있었다. 뉴욕의 찰스 루치아노를 중심으로 제2의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때이다.
영화 '언터처블스'
알 카포네를 기소하기까지는 국세청 탈세 단속반의 노력이 컸다. 그들은 방대한 서류 조사와 실사 끝에 카포네가 1924년 한 해 동안에 12만 달러의 수입이 있었는데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고, 1925년에서 1929년에 걸쳐서는 총 1백만 달러가 넘는 수입에 대하여 역시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액수는 카포네의 실제 수입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나 그들이 서류상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액수 뿐이었던 것이다.
카포네의 사건을 맡은 판사는 제임스 윌커슨(James H. Wilkerson)이라는 사람으로, 몹시 청렴하여 카포네의 돈에 매수되지 않았고 배심원들도 매우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카포네는 용케 배심원의 명단을 입수하여 부하인 필립 단드레아를 시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써서 전 배심원을 매수하려 하였으나 이 사실은 막바지에 새어나가고 말았고 단드레아가 체포되면서 배심원도 공판 직전에 전원이 교체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카포네의 탈세 혐의에 대하여 유죄가 선고되자 윌커슨 판사는 최대의 형량을 내려 5만 달러의 벌금과 함께 11년의 복역을 선고하였고, 카포네는 아틀랜타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다.
제임스 윌커슨
법정을 떠나는 알 카포네
카포네는 이렇게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스토리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전설로 전해지고 있으며, 남은 시카고 사람들은 그 다음의 이야기를 엮어가게 된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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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명일 작성시간 14.01.27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전국급이 아니라 시카고급 보스였던 알카포네가 제일 유명한듯.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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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1.27 매스미디어 덕분이죠. 알카포네 자신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좋아한데다 그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뉴욕의 5대 패밀리 보스들은 그런 알카포네를 보며 '제 명을 재촉한다'며 비웃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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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목 작성시간 14.06.17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