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제부터는 1963년 11월 22일에 일어났던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한번 재구성을 해보고자 한다.
작전의 실무는 거의 모두 마피아의 팀이 맡고 있었을 것이며, 그에 대한 백업은 CIA와 FBI가 담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전의 명칭은 아마도 피그만 작전이라고 불렸을 것 같다.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체포되도록 미리 수배해놓은 인물은 소련에 망명까지 한 적이 있는 좌익 성향의 리 하비 오스왈드였고, 다시 오스왈드의 처치는 공산당의 소행에 분노한 우익 인사의 짓으로 만들기로 최종 디자인 되었다.
그 우익 인사의 역할로는 시카고 아우트피트의 쿠바 오퍼레이션 책임자였던 잭 루비가 선발되었는데, 잭 루비로서는 그와 같은 제안, 아니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을 것이다. 이 작전과 같은 초극비작전에서 그러한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것이므로, 잭 루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보스들이 그에게 한 약속을 지켜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그도 제거되고야 만다.
1963년 11월 21일, 대통령이 죽기로 예정된 날보다 하루 전, 달라스에서는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스왈드는 전체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음 날 낮 12시 정각부터는 달라스 중심가의 TSBD 빌딩(Texas School Book Depository Building) 2층에서 꼼짝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만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오스왈드는 소련에서 돌아온 이후로 계속 달라스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었다.
TSBD 빌딩
현지 작전의 총감독을 맡은 것은 마이어 랜스키의 심복 부하인 유진 헤일 브레이딩(Eugene Hale Brading)이었을 것으로, 또 구체적인 실무의 총책임을 맡은 것은 잭 루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브레이딩은 CIA로부터 백악관 비밀 경호원의 신분증명서를 건네받아 작전에 참가한 마피아의 히트 팀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CIA쪽 사람인 하워드 헌트(Howard Hunt Jr), 버나드 파커(Bernard Parker), 프랭크 스터지스(Frank A. Sturgis) 등이 마피아쪽의 유진 헤일 브레이딩, 잭 루비 등과 함께 내일의 일을 위한 정지 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브레이딩은 작전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때 달라스 현지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이루부터 5년이 흐른 뒤인 1968년,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현장에도 같은 시각에, 같은 도시에 그가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유진 헤일 브레이딩
하워드 헌트
프랭크 스터지스
오후쯤에는 히트 팀이 도착하였을 것이다. 히트 팀은 각각 저격수와 조수로 구성된 3개 팀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트맨들의 이름에 대하여는 오늘날까지 밝혀진 사실이 없으나 유력한 용의자로는 시카고쪽 사람인 찰스 니콜레티(Charles Nicoletti)와 조수 제임스 파일(James Files)의 콤비가 있다. 3개 팀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팀이 가장 중요한 포스트인 그래시 놀(Grassy Knoll)에 자리잡게 된다. 그래시 놀은 대통령의 퍼레이드가 지나가기로 되어 있는 딜리 광장(Dealey Plaza)이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가 약간 높은 둔턱이었다.
찰스 니콜레티
제임스 파일
그래시 놀. 사건 직후의 사진으로 추정.
또 한 팀은 오스왈드가 있는 TSBD 빌딩의 6층에 위치를 잡기로 되어 있었고, 세 번째의 팀은 그 건너편의 댈텍스 빌딩(Dal-Tex Building)에서 쏘기로 되어 있었다. 이번 작전에서 목표물을 놓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저격을 위하여 그들은 목표물을 가운데에 두고 각각 다른 세 방향으로부터 사격을 하기로 한 것이다. 히트 팀은 달라스의 카바나 모텔에 여정을 푼 후 딜리 광장과 그 주변을 사전 답사하였고 빠져나갈 루트를 점검하였다.
댈텍스 빌딩
일이 끝난 후 히트맨들을 멕시코로 데려갈 조종사 데이비드 페리(David Ferrie)는 휴스턴에서 대기 중이었다. 비행기는 휴스턴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인 갈베스턴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데이비드 페리는 강제로 국외 추방되었던 뉴올리언즈의 카를로스 마르셀로가 미국으로 돌아올 때에 이용했던 소형 비행기를 조종한 바로 그 조종사였다.
데이비드 페리
11월 21일 저녁에 휴스턴으로부터 출발한 대통령 부부가 달라스의 인근 도시 포트워스에 도착하여 숙소인 텍사스 호텔에 들어 잠을 청하고 있을 때, 대통령의 경호원들은 다음날의 퍼레이드에 대비하여 휴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근처의 나이트클럽(The Cellar Club)에 가서 밤새워 술을 마셨다. 나이트클럽의 주인은 펫 커크우드(Pat Kirkwood)라고 하는 사람으로 잭 루비와 친한 친구였다. 10명의 대통령 경호원들은 클럽이 제공한 무료 서비스의 술을 새벽 3시 30분까지 마셨는데, 이중 4명은 다음날 대통령의 차 바로 뒤편의 경호차에 타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존슨 부통령의 경호원들은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날인 11월 22일 아침, 대통령은 전직 부통령인 존 낸스 가너(John nance Garner)를 만나는 등 포트워스에서의 오전 공식 일정을 마친 후 10시 40분에 공항을 향하여 호텔을 출발한다. 달라스까지는 비행기편으로 13분 걸리는 짧은 거리였다. 이보다 약간 앞선 10시쯤 마피아의 히트 팀이 딜리 광장에 도착하여 각자 자리를 잡았다. 달라스 시내 전역은 CIA와 마피아 조직으로부터 차출된 인원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은 만일을 위하여 대통령 비밀 경호원의 신분증명서를 모두 지참하고 있었다.
존 낸스 가너
11시 40분, 달라스의 러브필드 공항에 도착한 대통령 일행은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John Connaly) 부부의 영접을 받았으며 함께 지붕이 없는 오픈카 스타일의 리무진에 타, 점심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트레이드 마트 빌딩을 향하여 시내쪽으로 출발했다. 운전사는 경호원인 윌리엄 그리어(William Greer)였고 가운데 좌석에 존 코널리와 넬리 코널리 부부가, 그리고 맨 뒷좌석에 존 케네디와 재클린 케네디 부부가 탔다.
존 코널리
케네디 부부와 주지사 부부를 태운채 운전하는 윌리엄 그리어
달라스에서의 유명 인사의 시가 퍼레이드의 루트는 원래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곧장 직진하여 행진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번의 대통령의 퍼레이드는 메인 스트리트의 교차점에서 휴스턴 스트리트를 따라 북쪽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그 곳에서 90도 이상 좌회전하여 엘름 스트리트로 가서 다시 메인 스트리트로 합류하는 루트였다. 이와 같은 루트 변경이야말로 이번의 작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변경된 루트에 의하여 휴스턴 스트리트에서 엘름 스트리트로 가기 위하여 퍼레이드 차량들이 거의 U-턴에 가까운 좌회전을 해야 할 때 차량은 매우 감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순간이 바로 사격의 타이밍이었다.
12시 25분, 시민들은 계속 환호하고 있었고 대통령 일행은 메인 스트리트와 휴스턴 스트리트의 교차점에서 우회전한다. 12시 29분, 대통령의 리무진이 TSBD 빌딩을 우측에 두고 엘름 스트리트를 향하여 천천히 좌회전하기 시작할 때 갑자기 달라스 경찰의 대통령 경호를 위한 특별 무선 채널인 채널 1번이 불통된다. 12시 30분, 리무진이 엘름 스트리트로 들어와 약 40미터쯤 전진하였을 무렵 앞쪽의 그래시 놀의 히트 팀으로부터 제1탄이 발사되었다. 대통령의 목에 명중되어 대통령이 목을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된 응급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는 정도로 치명상은 아니었다.
첫번째 탄환을 맞고 목을 움켜쥐는 케네디
곧 이어 제2탄과 제3탄이 거의 동시에 발사되었는데, 제2탄은 뒤편의 댈택스 빌딩으로부터 날아와 케네디의 오른쪽 등을 맞혔고, 제3탄은 TSBD 빌딩으로부터 발사되어 케네디의 앞좌석에 앉은 코널리 지사를 맞혀 그의 가슴을 뒤로부터 관통했다. 곧 제4탄이 또 댈텍스 빌딩으로부터 발사되었는데 이것은 완전히 빗나가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있던 한 남자에게 상처를 입혔다.
케네디의 자켓. 둥에 총알 구멍이 뚫려있다.
다음 순간 운명의 제5탄이 발사된다. 이것은 앞쪽 그래시 놀의 찰스 니콜레티가 발사한 것으로 대통령의 앞이마에 맞아 관통하며 그의 뒤쪽 후두부를 산산조각 내어 공중에 날려보내게 된다. 대통령의 옆에 있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비명을 지르며 대통령의 뇌 조각을 주으려고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니콜레티는 임무가 완벽하게 달성되었음을 느꼈다. 니콜레티는 라이플을 조수인 파일에게 넘겨주었고 파일은 총을 분해하여 케이스에 넣었다. 그들은 차로 돌아와 갈베스턴을 향하여 출발한다. 갈베스턴까지는 차로 6시간이 걸리는 꽤 먼 거리였다. 각 팀은 그 곳에서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고 거기에서는 데이비드 페리가 그들에게 지불할 보수를 가지고 그의 경비행기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탄환이 케네디의 앞이마에 명중하는 순간
케네디를 명중시킨 세 종류의 탄환
그래시 놀의 나무 울타리쪽으로부터 총연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일단의 군중들과 경찰은 그 쪽으로 뛰어가서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 경찰 두 사람(이 두 경찰 중 한 명의 이름은 Joe M. Smith로 확인된다)이 제일 먼저 도착했는데 그 장소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으며 다만 땅바닥에 많은 발자국들과 담배꽁초들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의 조사를 위하여 나무 울타리 뒤편의 주차장쪽으로 두 경찰이 움직이자, 주차장에 있던 한 남자가 자신을 대통령의 비밀 경호원이라고 소개하며 이쪽은 별일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서 조사를 하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두 지방 경찰이 그쯤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은 그 남자가 제시한 대통령 비밀 경호원의 신분증명서 때문이었다.
웅성거리는 구경 인파의 무리를 뒤로 하고 케네디는 곧 인근 파크랜드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회생의 가능성은 없었다. 톰 샤이어즈(Tom Shires) 박사가 이끄는 파크랜드 병원의 응급 수술팀은 약 20분간에 걸쳐 응급 소생술을 시행해 보았지만 케네디가 입은 상처는 워낙 치명상이었던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던 순간의 케네디의 상태는 이미 사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케네디가 카톨릭의 신부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은 것이 오후 1시 1분, 의학적으로 사망의 선고를 받은 것이 이보다 앞선 오후 12시 55분이었다.
톰 샤이어즈
그런데 한 가지 트러블이 케네디가 사망한 후에 일어나게 된다. 텍사스 주법에 의하면 아무리 대통령의 시신이라 할지라도 사망자가 숨을 거둔 바로 그 장소(당시의 경우에는 파크랜드 병원)에서 사인을 조사하는 부검을 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케네디의 경호원들은 바로 즉시 시신을 가져가기를 고집한 것이다. 총을 휘두르는 경호원들의 위협에 파크랜드 병원의 스텝들은 시신을 내줄 수밖에 없었고 케네디의 유해는 대통령 전용기 편으로 볼티모어에 있는 베데스다 해군 병원으로 옮겨져, 이곳에서 미리 CIA가 수배해둔 군의관들의 부검을 받아 사실을 왜곡한 부검 소견서가 발부된다.
당시 파크랜드 병원에서 케네디를 진료했던 의사 중 한 사람이었던 찰스 크렌쇼(Charles A. Crenshaw) 박사는, 케네디의 유해가 병원에서 실려 나갈 때에는 흰색 천에 싸인 채 청동으로 된 관에 넣어져 있었는데 나중의 베데스다 병원의 서류에는, 케네디가 베데스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시신이 회색 바디 백에 넣어진 채 청동제가 아닌 다른 재질의 관에 넣어져 있었다고 기록된 점을 1992년에 출간한 그의 책(JFK Conspiracy of Silence)에서 지적한 바 있다. 크렌쇼 박사는 이 책에서, 케네디의 머리에 맞은 총격은 케네디의 앞이마로부터 진입하여 두개골을 관통한 뒤 우측 후두부로 빠져 나온 것이었다고 기술하였다. 그의 진술이 맞는 것이라면 케네디의 뒤쪽, TSBD 빌딩에 위치하고 있었던 오스왈드는 도저히 범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나온 워렌 위원회의 보고서는 케네디의 뒤편에서 발사된 도합 1발의 총탄이 코널리 주지사에게 총상을 입히고, 케네디를 죽음으로 몰고 간 총격의 전부였다고 미 연방 정부의 이름으로 공식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ABC 방송은 케네디 대통령의 시신이 처음 넣어졌던 최초의 청동제 관이 미 동부 델라웨어 해안 인근 3,000미터 깊이의 바다 속에 수장되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대통령을 운구하였던 관을 그런 방식으로 폐기 처리하는 것은 미국 정부가 취하는 통상의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찰스 크랜쇼
찰스 크렌쇼 박사의 주장은 케네디의 유해가 달라스를 떠나 워싱턴을 거쳐 볼티모어에 도착하기까지 약 6시간 동안 누군가에 의하여 그 시신이 손대어져, 라이플 총격에 의하여 날아가버린 케네디의 뒤쪽 두개골이 원형으로 수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베데스다 해군 병원의 군의관들이 조금 덜한 양심의 부담을 가지고 거짓 부검 소견서를 발부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베데스다 병원 측이 발표한 케네디의 공식 부검 사인에 의하면 시신의 목 아래 부분에 총상으로 보이는 상처가 한군데 있을 뿐, 후두부를 포함한 거의 머리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크렌쇼 박사의 주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소견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케네디의 피격 장면을 녹화했던 저 유명한 재프루더 필름(Zapruder Film, 이 필름은 라이프 지에 넘겨졌는데, 암살 사건 뒤 약 5년간 라이프 지의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그 후에야 공개되게 된다. 재프루더의 유족들은 1,600만 달러라는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이 필름을 국가에 귀속시켰다고 한다. 필름의 일부 내용은 영화 <JFK>에서 인용되기도 하였지만 이 필름의 원본 내용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에 나타난 내용과도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재프루더 필름이란 그날의 구경꾼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의류업자 에이브러햄 재프루더(Abraham Zapruder)가 자신의 소형 녹화 카메라로 케네디의 퍼레이드를 찍은 필름으로, 케네디의 피격 순간이 그대로 포착되어 있는 기록 자료이다. 여기에는 피격 순간, 케네디의 머리가 총에 맞아 후두부가 부서지며 뒤로 확 재껴지는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담겨져 있다.
에이브러햄 재프루더(오른쪽)
케네디가 저격된 지 불과 1시간 20분 후인 22일 오후 1시 53분, 달라스 시내의 한 극장에서 오스왈드는 케네디 암살 혐의자로 체포된다.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대통령 살해 용의자가 누군인지, 또 그가 어느 곳에 나타났는지를 알 수 있었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그처럼 귀신같은 수사 기동력을 가지고 어째서 암살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궁금함을 감출 수가 없다.
자기가 체포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오스왈드는 당황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경찰의 명령에 순순히 응하였다. 달라스 경찰은 오스왈드가 대통령 저격 혐의로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다음날인 24일 오전 11시 17분, 그가 잭 루비에 의하여 피살될 때까지 아무런 진술 조서도 만들어놓지 않아 음모자들의 일처리를 쉽게 만들어 주었다. 서면으로 된 진술 조서를 만들어놓지 말라는 고위층의 특별 지시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스왈드는 교도소로 이감되기 위해 호송차를 타러 가던 24일 아침에 권총을 빼어 든 잭 루비와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매우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미국의 적인 소련까지도 무사히 다녀온 적이 있었던 오스왈드가 그의 상급기관에서 내린 지령을 100% 믿고, 무조건 복종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스왈드를 저격하는 잭 루비
잭 루비는 24일 오전, 주 교도소로 이감되기 위하여 오스왈드가 달라스 시청의 지하 주차장에 나타날 때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그곳에 나타나 권총을 겨누어 그를 향해 쏘았다. 그 자리에서 절명하지 않은 오스왈드는 이틀 전 케네디가 치료받았던 파크랜드 병원으로 다시 이송되었으나, 한번 더 톰 샤이어즈 박사 팀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망하고 만다. 그의 죽음이 선고된 시각은 오후 1시 7분이었다. 오스왈드가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잭 루비는 억류되어 있던 경찰서에서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초조한 모습이었으나 그가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점차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