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인이고 (민족이) 나의 명령권자이다.
나는 모든 명령에 아무런 이의 없이 복종한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내 임무를 수행한다.
-괴칼프(Ziya Gokalp. 터키의 정치가, 군인)
지야 괴칼프
기원전 6세기경부터 흑해, 카스피 해, 지중해 사이의 지역에서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은 기원후 4세기에 세계 최초로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14세기에 아르메니아 왕국이 무너진 후 아르메니아 영토의 대부분은 터키, 즉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고, 동부의 남은 지역은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그 후 19세기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위치.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기독교 국가이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서 아르메니아인은 정교를 신봉하는 소수로서 공식적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이등 시민의 대우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들은 공직에 취임할 수 없었고, 특별세까지 납부해야 했지만,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오스만 제국이 급속도로 쇠퇴했지만,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들은 위험이 따르는 분리나 독립을 도모하기보다는, 술탄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함으로써 자율성과 권익의 증진을 얻어내는 소극적 노선을 택했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 정치적 자치권을 부여해달라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온건한 요구도 오스만 제국 실권자들의 눈에는 불온한 움직임으로 보였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젊은 엘리트들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내정 문제에 대한 서유럽 국가들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자, 술탄 압둘 하미드(Abdul Hamit) 2세는 통치권의 안정을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학살하는 것도 불사했다.
술탄 압둘 하미드 2세
1895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의 통치 기간에 동부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발생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1895년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국지적, 간헐적으로 지속되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1908년에 청년 터키당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청년 터키당의 한 분파인 통일진보 위원회(Ittihad ve Terakki Jemiyeti)가 1913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처음에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였던 당의 노선은 강경한 민족주의로 완전히 바뀌었다. 3두 지배체제로 정착된 통일진보 위원회는 유럽 국가들의 간섭과 영토 침탈에 저항하고 왕정복고주의자들의 쿠데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배타적 국수주의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술탄 통치 시절과 같은 다민족, 다종교 국가가 아니라 문화적, 종교적으로 동질적인 새로운 터키 국가를 꿈꾸고 있던 이들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의 상황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청년 터키당의 지도자 엔베르 파샤(가운데)와 제말 파샤(오른쪽)
통일진보 위원회의 3지도자. 왼쪽부터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내무장관, 수상),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전쟁장관), 아흐메드 제말 파샤(해군장관, 시리아 총독)
그 다음 해인 1914년에 일어난 1차 대전은 이런 위협이 현실화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1914년 8월에 독일과 비밀 동맹을 체결한 터키는 영토 확장을 위해 러시아를 공격했고, 연합군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듬해에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에 터키에 직접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 직면한 터키의 극단주의자들은 아르메니아인을 속죄양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이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강경책 채택을 놓고 주저하는 같은 당 동료들을 지금이야말로 터키의 골칫거리인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때라고 설득했다.
갈리폴리에 상륙한 영국군
갈리폴리전투에서 당시 연합군과 맞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터키군의 '케말 무스타파' 대령(왼쪽 네번째 쌍안경을 걸고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