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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역사]학살의 역사 25. 아르메니아 인 - (4) 가해자의 기억, 희생자의 기억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4.09.15|조회수1,428 목록 댓글 1

아르메니아인 학살 소식이 알려지자 연합국은 1915년 5월 24일, “이와 같은 반인도적이고 반문명적인 범죄”에 관련된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개인적으로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오스만 제국에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평화 조약에는 학살 책임자들을 재판하기 위한 국제 법정이 열려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이 요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묘사한 그림

 

터키 국내에서는 1919년 1월부터 시작해서 400명에 가까운 통일진보 위원회 관련 인사들이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군사법정은 통일진보 위원회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 세 명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지 인물 중 일부에게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학살에 대한 최종 책임을 져야 할 세 명의 최고 책임자는 이미 해외로 도주한 상태였다. 또한 강경한 성향의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법정의 판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해 보복성의 학살을 자행하기까지 했다. 3두 지배 체제의 핵심 인물로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주도했던 탈라트 파샤는 독일의 베를린에 숨어 지내다가 1921년에 암살되었지만,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버젓이 케말(Mustafa Kemal)이 주도하는 터키 신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해서 법망을 피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될 때까지, 터키 땅에서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3,000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의 역사적 터전이었던 아나톨리아 지방은 아예 ‘아르메니아인 없는 지역’이 되어버렸다.

무스타파 케말

 

탈라트 파샤와 그를 암살한 아르메니아인 소고몬 테흘리리안

 

오늘날에도 매년 4월 24일이 되면 전 세계 20여 개 국가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선조들의 비극을 추념하고 있지만, 터키 정부는 이 비극을 학살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오스만 제국 영토 안에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인 관료, 군대, 헌병대, 준 군사 조직, 일반 시민과 쿠르드 유목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생자의 수, 강제 이송의 동기, 사전 계획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첫째, 희생자는, 아르메니아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150만 내지 200만 명이 아니라 30만 명 정도였다. 둘째, 강제 이송은 절멸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러시아군과 치열하게 교전하는 상황에서 이적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을 후방으로 몰아내야 한다는 군사적 판단에서 이루어졌다. 셋째,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은 사전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 아무도 예기치 못한 불상사였다. 터키 정부의 대응은 이와 같이 방어적 수준에만 머물지 않고,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터키인 학살 사례들을 지적하는 가운데 일종의 양비론(兩非論)으로까지 발전했다.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의 선전 선동가들이 불가피했던 과거의 참사를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그들이 터키인에게 저지르고 있는 테러 행위를 변명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에 대해 1984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영원한 인민법정(Permanent People’s Tribunal)은 몇 가지의 핵심 쟁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① 반 주에서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봉기는 청년 터키당에게 학살의 빌미를 제공했다. ② 1915년 4월 24일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엘리트 650명의 강제 이송과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시발점이었다. 이날을 시작으로 오스만 제국 정부는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일정표에 따라 이미 러시아군에 점령된 반 주를 제외한 나머지 동부 지역의 아르메니아인을 강제 이송시켰다. ③ 강제 이송 과정에서 범죄자들로 구성된 ‘특수 조직(Teshkilati Mahsusa)’이 청년 터키당 핵심부의 지휘 감독 아래 국가 기구의 지원을 받으며 아르메니아인을 대량 학살했다. 이 조직은 1914년 8월에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의 명령에 따라 통일진보 위원회에 예속된 부대로서, 이 부대의 본래 임무는 방첩과 국경 수비였다. 그 뒤 학살 임무를 전담하면서부터 이 부대에는 사면을 약속받은 범죄자들이 대량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예산뿐만 아니라 조직과 무기 편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는 ‘국가 안의 국가’였다. ④ 헌병과 일반 관료 조직도 학살 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아르메니아인 피난민

 

아르메니아인 학살 특수 조직

 

영원한 인민 법정

 

이와 같은 사실 확인에 근거해서 ‘영원한 인민법정’은 터키 정부가 주도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 범죄라고 판결했다. 이 법정의 판결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제노사이드 협약이 제정되기 훨씬 전에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그 협약에 제시된 구성요건에 부합하는 행위를 당시의 국제법과 관습법도 명확하게 범죄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제노사이드로 인정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인민법정은 터키 정부에,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학살의 책임을 승계할 것을 권고했다. 민간 법정에 불과한 이 법정의 판결은 법적 구속력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 판결은 제3자적 입장에서 사건의 추이와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계속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던 가해자와 희생자의 소모적 논쟁을 일단락 지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검은 리본으로 학살을 추모하는 아르메니아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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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기 | 작성시간 14.09.15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된 System of down 이란 밴드가 부른 chop suey 가 이 학살에 대해 노래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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