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1975년 12월 7일,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의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날 꿈에 부풀어 있던 동티모르를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인도네시아군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동티모르 전역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다. 동티모르인은 과거에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 투쟁을 선도했던 프레틸린(Fretilin,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을 중심으로 20년이 넘게 치열한 게릴라전을 전개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65만 명의 동티모르인 가운데 10만 명 내지 20만 명이 희생되었다.
프레틸린의 깃발
프레틸린 전사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양해 속에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특히 미국의 태도는 단순한 묵인이 아니라 적극적 후원에 가까웠다. 미국의 포드(Gerald R. Ford) 대통령과 키신저(Henry A. Kissinger) 국무장관이 자카르타를 공식 방문한 지 하루 뒤에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이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는 무엇을 근거로 미국을 설득했으며, 미국의 포드 행정부는 무슨 이유에서 수하르토를 확실하게 후원했던 것일까?
수하르토와 포드를 하나로 묶은 것은 반공이라는 이해관계의 끈이었다. 1975년은 미국에게 악몽과도 같은 해였다. 왜냐하면 동남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쏟아 부었던 오랫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해에 캄보디아와 베트남이 공산화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 미국에게 인도네시아는 웬만한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눈감아줄 수밖에 없는 반공의 보루이자,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지렛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대해 막대한 군사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수하르토에게도 반공은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는데 필요한 훌륭한 명분이었다. 이미 반공을 내걸어 정권을 장악한 바 있는 수하르토는, 이번에는 반공을 명분으로 삼아 판차 실라(Panca Sila,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제시한 건국의 5원칙을 가리킨다. 이 원칙에는 신에 대한 신앙, 민족주의, 국제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가 망라되어 있으나, 이 가운데 가장 강조된 것은 신앙과 민족주의였다.)의 이념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영토 팽창을 도모하는 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기 위해, 그는 목전에 와 있는 동티모르 독립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수하르토는 이미 돈독한 관계에 있던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에게, 동티모르에서 치러진 선거 결과에 따라 ‘공산주의’ 정당인 프레틸린이 집권하게 될 경우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이 커진다고 겁을 주었다.
판차실라의 다섯 가지 의미의 상징
수하르토의 주장은 일말의 진실은 담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프레틸린이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프레틸린은 공산주의와 무관한 분파들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성을 지닌 공산주의 조직은 아니었다. 프레틸린은 오랫동안의 독립 투쟁 과정에서 독립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수단에 점차 경도된 좌익 성향의 집단이라고 말해야 옳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살펴볼 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과거의 식민지 경험이다. 두 나라는 모두 오랫동안 식민지였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고, 티모르는 포르투갈의 통치 아래 있었다. 식민 지배는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문화적 단절과 의식의 종속화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의 이식과 집단 간의 분열을 통해서도 인도네시아와 티모르의 미래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짐을 남겨주었다. 이와 더불어 1915년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티모르 섬 중앙에 그어진 경계선은 60년 후 동티모르 지역에서 일어날 학살의 씨앗이 되었다. 1949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물러간 뒤 인도네시아가 서티모르를 승계하면서, 또 다른 식민지 종주국인 포르투갈이 물러갈 경우 충돌이 일어날 소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와 이런 충돌의 가능성이 현실화될 확률은 계속 증가했다. 오랫동안 독립을 염원해 온 동티모르인은 1974년에 포르투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자신들의 꿈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힘입어 프레틸린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1975년에 포르투갈은 동티모르를 독립시키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탈식민화 위원회의 감독 아래 동티모르 전역에서 실시된 지역별 선거에서 프레틸린은 55%의 지지를 획득했다. 프레틸린의 경쟁 상대로서 점진적 독립을 선호한 티모르 민주주의연합은 의외로 많은 표를 얻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주장한 군소 정당 아포데티(Apodeti)는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획득한 프레틸린도 65만 명의 동티모르 주민을 하나로 묶기는 어려웠다. 동티모르는 14개의 방언을 사용하는 30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작지만 매우 복잡한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수하르토는 동티모르가 독자적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동티모르 내의 친(親)인도네시아 정파들을 자극했다. 수하르토의 이런 노골적 언행은 선거에서 패한 민주주의연합이 8월에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민주주의연합의 쿠데타에 뒤이어 민주주의연합 지지 세력과 프레틸린 지지 세력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3주간 지속된 내전에서 패한 민주주의연합의 구성원들이 인도네시아가 지배하는 서티모르로 도주하면서,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인도네시아는 곧바로 동티모르 침공 계획을 세웠다. 9월 초에는 200명의 인도네시아군 특수부대가 동티모르에 침투했다. 이런 위협에 맞서 프레틸린은 인도네시아와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인사들을 구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와 동시에, 프레틸린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분파들 가운데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한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전면적 침공 계획이 가시화되자 포르투갈 정부는 자국 관리들을 동티모르 앞바다로 긴급히 대피시켰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프레틸린은 1975년 11월 28일, 동티모르의 독립을 공식 선언했다.
12월 7일, 줄곧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했다. 전쟁은 인도네시아의 정예 공수부대가 동티모르의 중심지 딜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동티모르에 낙하하는 인도네시아 공수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