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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역사]학살의 역사 49. 동티모르 - (3) 재연된 학살 (혐)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4.11.01|조회수6,581 목록 댓글 0

인도네시아군이 딜리에 입성하자, 민주주의연합의 지지자를 비롯해 그동안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주장해온 동티모르인들은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성난 인도네시아 군인들은 이들에게도 발포했다. 침략자가 된 수하르토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집권 세력인 프레틸린에 대립하는 정파의 도움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동티모르 정복이 눈앞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1976년 1월에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내에 있는 모든 정당의 해산을 명령했고, 7월에는 동티모르 합병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방침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동티모르 인사들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웠다.

포릍투갈 깃발을 끌어내리는 인도네시아군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은 수하르토의 계획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프레틸린은 5,000명의 병력으로 3만 2,000명의 인도네시아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렇다고 해서 동티모르 전역에서 게릴라전이 활발하게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티모르인이 인도네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지역과 부족에 따라 크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동티모르인 가운데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게다가 프레틸린 지도부도 이념 면에서 상당히 분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동티모르인들은 줄기차게 투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77년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군이 완전하게 장악한 지역은 전체 영토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1979년 말에는 인도네시아의 외무장관조차 동티모르 인구의 절반만이 인도네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시인할 정도로 수하르토의 계획에는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제 인도네시아는 신속한 승리를 위해서 어떤 방법이든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려 있었다.

침공한 인도네시아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티모르인들

 

동티모르 여성 반군

 

훈련중인 동티모르 반군

 

동티모르인들의 시위

 

동티모르인에 대한 학살은 인도네시아군이 침공하던 바로 그날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1975년 12월 8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들어온 인도네시아군은 곧바로 500명의 화교를 색출해 살해했다. 다음 날에는 무장하지 않은 티모르인 40명을 딜리의 남부에서 살해했다. 처음 며칠 동안 딜리에서 살해된 사람만 해도 화교 700명을 포함해서 모두 2,000명을 넘었다. 학살은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아일류에서는 5,000명의 주민 가운데 산으로 대피한 1,000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대부분 살해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3~4세 미만의 어린 아이들뿐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외무장관이 밝힌 공식 통계에 따르더라도,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1975년 12월부터 1979년 11월까지 살해된 동티모르인은 모두 12만 명에 이르렀다.

살해된 동티모르인들의 잘려진 머리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인들

 

인도네시아 특수부대에 의해 의도적으로 살해된 5명의 호주 언론인

 

인도네시아군의 만행

 

다른 지역의 모든 학살 사례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인의 동티모르인 학살에서도 언제나 생물학적 비유와 농업적 비유가 널리 동원되었다. 1976년 초에 레멕시오와 아일류에서 3살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학살되었을 때, 인도네시아군은 그곳의 주민들이 모두 ‘프레틸린의 씨앗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1981년 9월에 라클루타에서 일어난 민간인 집단 학살에 가담했던 어느 인도네시아 군인은 단호한 어조로, “당신이라면 들판을 청소할 때, 크든 작든 간에 모든 뱀을 죽이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주장했다. 학살을 독려했던 인도네시아군의 고위 장교들은 프레틸린에 속한 사람들처럼 저항할 소지가 있는 자들이라면 증손자까지라도 절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곳이 학살지임을 알리는 나무 십자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로스팔로스에서 실려 온 사람들은 이 강물에 던져졌다. 어떤 사람들은 차에 갇힌 채 던져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몸에 쇠덩이나 바위를 달아야했다. 학살은 어린아이나 노인, 임산부 등을 가리지 않고 자행됐으며, 사람들은 악어의 먹이가 되거나 산채로 수장됐다.

 

학살된 사람만이 피해자의 전부는 아니었다. 오랜 전쟁으로 대부분의 농지가 황폐해져서, 학살을 피한 사람도 생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기근은 전쟁이 발발한 1979년부터 이미 시작돼 있었다. 인도네시아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농토가 파괴된데다, 인도네시아군의 위협을 피해 주민들이 숨어든 곳은 대부분 경작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다. 고향에 남은 사람도 전체 가옥의 80%가 파괴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고문을 가하는 인도네시아군

 

학살과 강간 등의 만행은 인도네시아군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티모르인에 의한 티모르인 학살과 탄압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전쟁이 예상보다 훨씬 오래 계속되자, 인도네시아군은 티모르인으로 구성된 보조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들을 모태로 해 나중에 조직된 민병대는 1990년대 이후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집단 학살의 주범이었다. 그들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군 예하에 편성된 보조 병력 가운데 모두 52명으로 구성된 제1라일라칸(Railakan) 부대는 1982년 1월과 2월에 8명의 동티모르 반군을 사살하고 32명을 체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9월에는 나중에 동티모르의 대통령이 되는 구스마오(Xanana Gusmao)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를 공격해 9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동티모르투쟁군 총사령관 조아오다 실바 타바레스(가운데 선글라스 낀 사람)가 민병대원들이 집결한 가운데 사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를 돕는 동티모르인 민병대

 

친인도네시아 팔렌틸 민병대

 

'할리린탈' 민병대

 

반군 지도자 구스마오

 

보조 병력의 활용은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1983년 이후에 훨씬 두드러졌다. 인도네시아군의 줄기찬 소탕 작전에도 불구하고 게릴라 활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인도네시아의 정책을 비판하는 국제 사회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수하르토는 1983년에 게릴라 지도자 구스마오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하르토의 전략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실질적 지배를 굳히는 데 있었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정규군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티모르인으로 구성된 보조 전력을 저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26개 주와 동등한 지위를 동티모르에 부여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국제 사회의 비판적 눈초리를 의식해서 취한 행동들이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이런 공식적인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민간인 대 군인의 비율이 38대 1일 정도로 동티모르 전역에는 언제나 군사적 긴장과 위협이 존재했다. 그런 가운데 1991년 11월 12일 산타크루즈 공동묘지에서 발생한 집단 학살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전 세계의 여론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딜리 시내에 있는 이 공동묘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민간인 가운데 300명을 학살한 현장이 한 언론인에 의해 비밀리에 촬영되어 전 세계로 전송되자 수하르토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이제 동티모르에서 철수할 수도 없고,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기도 어려운 처지에 빠져버렸다. 그동안 수하르토를 지지해온 미국도 악화된 국내 여론 때문에 그와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정규군 대신 민병대의 수를 늘려 화력을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산타크루즈 묘지. 인도네시아 군대는 1991년 11월 12일 산타크루즈 묘지 앞에서 평화행진을 하던 동티모르인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했는데, 이 때 약 270여명이 사망하고 약 250명이 실종되었다.

 

상황의 변화는 외부에서 찾아왔다. 1998년에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 위기의 여파로 수하르토가 실각하고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하비비(Bachruddin Jusuf Habibie)가 권좌에 오르게 되자, 자카르타에서는 동티모르인이 그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도록 주민 투표를 허용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졌다. 반면 동티모르에서는 새로운 민병대가 속속 창설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도래하는 가운데 1998년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75년에 발발한 내전에 참여했던 5개 정당들이 뜻을 모아 티모르 민족저항평의회를 결성한 것이다. 의장에는 이미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되어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구스마오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독립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1999년에 동티모르의 운명을 주민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결정하는 주민 투표가 치러질 수 있게 되었다.

하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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