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따르더라도 2만 5,000명 내지 3만 명에 이르는 목숨을 앗아갔다. 민간 학자들은 대부분 희생자의 수를 3만 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셈이다. 그러나 만약 이 정도의 희생자 수가 20세기 학살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유태인 학살이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비해 약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주의 학살이 명실상부한 내전이나 국가 간의 전면전 중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모르는 두 개의 무장 정치 집단이 각각의 확고한 근거지를 바탕으로 격전을 치르는 내전 상황이라면 ‘상당함’의 기준도 어느 정도 상향 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 4.3 봉기를 주도한 세력이 좌익인 남로당이었고, 그 세력의 중핵이 무장을 했다고 해도, 무장대의 수나 무장 수준으로 볼 때 내전을 이야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4.3당시 경비대에 의한 총살 장면
2008년 11월 제주국제공항(옛 정뜨르 비행장)에서 발굴되는 4·3사건 희생자 유해
많은 학자들은 최초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무장대에 참여한 인원이 1,500명을 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적게 보는 경우는, 그 당시 토벌대 측의 자료를 토대로 500명 정도로 보고 있다. 물론 토벌군이었던 제9연대 병사 가운데 일부가 무장대에 합류하고, 토벌 기간 동안 약간의 주민이 무장대 대열에 가세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측의 G-2 보고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무장대와 토벌대의 사망자 비율이 150대 1에 이르렀고, 무장대가 노획한 무기가 매우 적었다는 사실은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대치를 교전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19세기 초반 식민지 개척기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과 영국인들이 충돌했을 때도 희생자 비율이 10대 1정도였던 점을 생각하면, 제주의 경우는 교전 상황이었다기보다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4.3사건 당시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들
분명한 사실은, 희생자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 가운데는 어떤 이유로도 그들에 대한 살인이 정당화될 수 없는, 10세 이하와 61세 이상의 주민이 10% 이상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의 참사가 대부분의 다른 학살들과 달리 동일한 민족 구성원을 대상으로 벌어졌다는 점, 그리고 집단을 파괴하는 방법 면에서 원거리 강제 이주 같은 방법이 아니라 직접적인 학살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을 되새겨볼 때, 이 희생자 비율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주 4.3의 본질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집단 학살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토벌대와 무장대 모두 가해자였지만,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가해자의 84%는 토벌대, 11.1%는 무장대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대부분의 학살은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와 더불어,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다. 이 점 역시 봉기로서의 4.3이 아닌 학살로서의 4.3은 이승만 정권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도모한 국내 평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한 의도된 희생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4.3사건 당시의 희생자들
토산리 주민들을 표선 백사장에서 학살하는 진압군(토벌대)
어떤 사건을 두고 학살에 해당하는지를 판별할 때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기준은 희생자 집단의 구심점인 엘리트에 대한 제거 기도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희생의 정도는 미미하지만 지도층에 대한 주도면밀한 절멸이 시도된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 또한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48년 가을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던 제주농업학교에는 “이곳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 인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제주도를 대표하는 법조, 행정, 교육, 언론계 인사들이 끌려와 감금돼 있었다. 확인된 명단만 보더라도 법조계에서는 제주 지법 법원장(최원순), 독립유공자인 제주 지법 서기장(송두현), 제주 지법 검사(김방순), 교육계에서는 초대 제주중학교 교장(현경호)과 현직 교사인 그의 아들(현두황), 제주도 학무과 장학사(채세병), 제주남초등학교 교장(김원중), 언론계에서는 <제주신보> 사장(박경훈), <서울신문> 제주 지사장(이상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고, 그중 상당수는 살해되었다.
토벌대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여론 지도층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대중에게서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저항의 소지를 제거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당시의 제주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을 지도층으로 볼 것이며, 그 가운데 얼마가 죽었는지를 완벽한 자료를 가지고 말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학살이 끝난 후 제주도민들 사이에 “몰명(어리석고 우둔하다는 뜻)한 우리만 살아남았다”, “똑똑한 사람 다 죽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엘리트 제거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