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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역사]학살의 역사 끝. 보도연맹 - (3) 누구의 책임인가?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4.11.17|조회수1,256 목록 댓글 3

계속 이어지는 패전 소식에 초조해 있던 이승만 정권에게 보도연맹은 엄청난 부담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이유에서 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활용 가능한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 검속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예비 검속은 군이 지휘하고 검찰과 경찰이 집행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소집되거나 검거된 보도연맹원들은 곧바로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뒤에는 학살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학살 집행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와 절차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저 국가와 안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생존 때문에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학살 가담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보도연맹원 중 다수는 안보의 위협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희생된 연맹원 가운데 상당수는 만들어진 공산주의자였던 것이다.

2002년 2월 6일 진도군 의신면 갈매기섬에서는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씻김굿이 열렸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대부분의 학살에서 그런 것처럼, 보도연맹원 학살에서도 권력의 최고위층이 내린 살인 명령을 확인할 수 있는 공문서나 직접적인 내부 증언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엄청난 사태가 최고위층의 명령이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또한 이런 대규모 참사가 뚜렷한 계획 없이 지역 수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도 인류의 역사 경험에 비추어 설득력이 없다. 의도와 계획을 드러내주는 적극적인 문서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권력이 깊이 개입된 가운데 민간인 학살이 전국적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앙 정부의 명령이 존재했음을 입증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학살의 책임 소재를 파악하는 작업은 현장에서 학살을 집행하는데 직접 가담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상급자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아직은 전국적 차원의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희생자와 직접 접촉했던 일선 책임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는 일은 <부산일보> 김기진 기자의 노력을 통해 밝혀진 부산 경남 지역의 사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학살이 진행될 당시 부산과 경남에서는 동원가능한 일반 군부대가 모두 전방에 투입된 뒤였다. 경찰도 전투 경찰은 모두 전선에 투입되고 치안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학살은 CIC와 G-2 등 군 특수부대의 지휘 아래, 잔류하고 있던 군과 경찰에 의해 주로 자행되었고, 서북청년회, 대한청년단, 민보단 등의 우익 단체도 학살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학살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특수부대의 지역 책임자들과 경찰의 서장 및 지서장, 그리고 군의 하급 지휘관들에게 돌아간다. 지역에 따라서는 지방 공무원들과 유지들의 가담 사례도 발견된다.

그렇지만 전쟁 발발 이전부터 각급 기관의 공조가 아무리 활발했다고 하더라도, 각처에서 일어난 학살이 전적으로 지역 책임자들의 지휘와 협조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학살의 현장에서 방아쇠를 당기도록 지시한 것은 특무대 지구대장이나 경찰서 사찰계장이었지만, 이들이 학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중앙에서 내려온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소신에 따라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학살 대상을 줄여보기 위해 노력한 경우도 있었다. 문경, 사천, 삼천포 지역이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학살을 명령한 국가와 그 명령을 받은 각급 부서의 지역 책임자들 사이에는 일정한 자율적 공간이 있었다. 비록 이 자율적 공간의 크기가 각 지역 책임자가 속한 부서 내의 권위주의와 강도, 지역 정서와의 역학 관계, 책임자 개인의 교육 정도, 사상적 지향, 양심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어떤 경우도 조직의 일원으로서 국가의 강압적인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역 책임자 밑에서 활동했던 말단 책임자와 말단 집행인의 경우 자율 공간의 크기는 훨씬 작았을 것이다. 조직 내에서 강제의 정도가 특히 강했던 특무부대 대원들이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군과 의견이 대립될 때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던 하급 경찰의 경우는 개인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어쨌든, 학살 명령을 받은 군경과 우익 민병대 대원들은 대체로 명령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충북 영동군 용화면 민주지산 아래 용화마을 어귀에 있는 '지서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오른쪽)와 1952년 11월11일 당시 영동경찰서 용화지서 이섭진(왼쪽) 주임. 그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마을 주민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3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켜 살렸다.

 

그러나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전체를 놓고 볼 때, 더 중요한 인물은 현장에서 살인 명령을 집행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엄청난 결정을 내린 중앙의 고위층이었다. 만약 이들이 보도연맹원들을 국민의 일원으로 생각했다면, 그래서 학살 명령을 내리기 전에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면, 각 지역의 사정과 정서가 어떠했든지 간에 대규모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살에 가담한 여러 기관 가운데 가장 주도적인 부서는 어디였으며, 최종 책임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보도연맹원 학살의 경우, 나치 시기에 히믈러가 이끌었던 친위대 및 경찰의 통합 조직과 그 휘하에 있던 제국보안국과 같은 학살 전담 부서가 명확하게 따로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살과 마찬가지로, 학살을 주도하면서 관계 기관 사이의 이견을 조율하고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앙의 기관이나 그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 주변의 군소 권력자들이 존재했던 것만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창립 당시부터 보도연맹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조직의 성격상 보안 문제에 직접 개입해 있었던 중앙의 부서는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부(장관 조병옥, 최초의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진 7월 1일에 내무부 장관직은 백성욱이 맡고 있었으며, 조병옥이 이 자리에 새로 취임한 것은 7월 17일이었다), 형무소를 총괄하는 법무부(장관 이우익), 그리고 군을 지휘하는 국방부(장관 신성모)였다. 이 가운데 어느 부서가 전체적인 주도권을 행사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근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국방부보다는 경찰을 지휘 감독했던 내무부의 역할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경찰국장이 수신한 보도연맹원 예비 검속 명령의 발신자가 내무부 치안국장(장석윤)이었던 점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미 전시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어서 군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군과 관련된 국방부가 학살을 주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예비검속은 내무부가, 학살은 군이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승만과 신성모. 신성모는 이승만의 친위부대인 대한청년단의 초대 단장 출신이다. 이승만의 지시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으며 전방을 순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낙루장관, 즉 눈물의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승만 하야 직후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공식 계통뿐만 아니라, 최고 통치권자의 돈독한 신임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배후 조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식적인 행정 기구가 효율적으로 가동되지 않던 상황에서, 그리고 여러 세력의 견제와 저항이 존재했던 상황에서, 이승만에게 결정적인 힘이 되어준 조직은 군 내부의 특무대였다. 특무대장 김창룡은 명령 계통상으로는 국방부 장관의 지휘를 받는 일개 부대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이승만의 직속 기관처럼 움직이던, 권력의 실세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역할은 터키인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서 특수 부대의 최고 책임자가 담당했던 역할에 비견될 수 있다. 김창룡과 더불어 또 하나 주목할 인물은 경남을 비롯한 여러 지구에서 계엄 사령관을 역임한 김종원이다.

김창룡.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8·15해방 후 일본도를 차고 고향에 갔다가 치안대에게 구금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탈출하여 월남했다.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로 군생활을 시작하였고,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좌익 색출과 검거에 앞장서서 여수-순천10·19사건 이후의 군부내 좌익숙청작업을 주도했다. 이로써 이승만의 신임을 얻게 되어 특무대장 및 육군 소장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지나친 월권행위 및 사건 조작으로 군 내부에 적을 만들게 되어 중장 강문봉, 대령 허태영 등에 의해 암살된다.

 

김종원. 일본 관동군 하사관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군 검거에 종사하였고, 조선경비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교. 성적이 낮고 태도가 불량하여 퇴교대상자였으나, 같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 생도들이 적극 비호하여 간신히 졸업하였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직접 포로들을 일본도로 참수하면서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참수한 용의자의 목을 자루에 담아 미군 고문관에게 선물하여 대경실색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거창양민학살 사건시 사건을 조사하는 국회조사단을 습격한 일이 들통나 군복을 벗고 경찰이 된다. 경남경찰국장 시절에는 참모회의 중에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 신성모, 김창룡, 김종원으로 이어지는 명령과 집행의 사슬이 존재했는지, 아니면 단일한 명령 계통 없이 ‘각하’ 주변에서 권력을 위해 서로 경쟁하던 몇몇 개인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느슨한 학살의 네트워크 같은 것이 존재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이제까지 드러난 소량의 문서 증거들만 가지고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학살 사건, 그리고 그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양태상의 공통점, 학살 지역의 전국적 분포를 통해 우리는 문서가 말해주지 않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단일한 명령 계통이 존재했든, 최고 권력자의 개인적 신임을 얻기 위해 몇몇 경쟁자들이 서로 과잉 경쟁을 했든, 아니면 최고 권력자 자신이 직접 구상하고 명령하고 감독했든 간에, 서로 갈등하는 여러 기구들로 구성된 군과 전국적 감시망을 갖고 있었던 경찰, 각종 준 군사 조직들과 형무소 관계자들을 비롯한 지방의 관료들을 움직이게 만든 강력한 힘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위로부터의 강제가 없었다면, 학살로 인해 얻게 될 혜택에 대한 기대감과 학살을 거부할 경우에 닥쳐올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아무리 전시 상황이었다 해도 지역의 하급 책임자들과 그 밑의 말단 집행인들이 사상적 확신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 또는 사적인 증오감 같은 것만으로 과연 그렇게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전쟁 발발 후 서울과 경기 일부를 제외한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예비 검속과, 검속된 사람들에 대한 학살 명령의 책임이 궁극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귀속된다는 주장은 제4대 국회에서 박상길 자유당 의원을 통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보도연맹원들을 적시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 측의 비밀 문건도 전쟁 발발 직후 수주일 동안 경찰에 의해 자행된 수감자 학살이 남한 정부의 최고위층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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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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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레이* | 작성시간 14.11.17 사방에 친일파가 없던 곳이없군요ㅡㅡ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1.17 특히 군과 경찰은 친일파가 완전히 장악한 곳이었죠.
  • 작성자우라 | 작성시간 21.06.12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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