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 작전은 1938년에 시작되었다. 그해는 두 명의 독일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원자를 분열시키면서 20세기 과학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해였다. 세계의 모든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과학자들 역시 독일의 실험이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전에 없는 위력을 지닌 도시 하나를 한 방에 완전히 날려버릴 수도 있는 ‘경이적인 무기’인 핵무기가 이론상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세계의 정치권도 그 파장을 인식했고, 소련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연구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주요 정보기관인 GRU와 NKVD도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과학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뛰어난 정보기관이라면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이들은 서구의 적국 가운데 어떤 나라가 이 높은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정보기관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해졌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소련의 방어능력을 벗어나는 무기로 무장하지는 않았는지, 그 상황 파악에 총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의 정보기관은 그에게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 해결책은 예상하지도 못한 정보원에게서 나왔다. 바로 영국이었다.
소련 군사정보국 GRU의 문장. 1918년 10월 21일 붉은 군대의 창설자이자 최고위원이던 레프 트로츠키가 창설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KGB의 전신인 체카로 부터의 독립을 보장받은 이후로 총참모부 산하 기관으로 자리잡아 점차 조직을 불리며 군사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냉전 기간 동안에는 요원파견, 위성이미지, 도감청 등의 수단을 활용한 정보수집임무 이외에도 독립된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 GRU를 훈련, 운용했다.
영국과 그 동맹국인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영국은 튜브 앨로이스 프로젝트(Tube Alloys Project)라는 코드명의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이는 독일의 많은 과학자가 원자폭탄을 준비 중이라는 망명 독일 과학자들의 경고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코드명 아래 비슷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우려하는 편지를 쓴 이후 시작되었다.
튜브 앨로이스 프로젝트의 상징휘장
영국 튜브 앨로이스 계획의 책임자인 제임스 채드윅(좌)과 미국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준장(우)
영국 정보기관은 이 게임 초반에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에 상관없이 원자폭탄 합동개발계획의 실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미국은 영국이 독일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미국이 정보의 확실성을 위해 정보원을 추궁해도 영국은 이를 밝히지 않았다. 독일 내에 있는 자국의 정보원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정보기관은 이 모든 상세한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절대 밝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영국이 미국에게 독일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때도 미국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61년 미국 물리학회에서 테이트 메달(Tate Medal)을 수여받는 파울 로스바우트(右). 1930년대 독일을 대표하는 물리학자였는 그는 1차대전 때 병사로 참전했다가 영국에 포로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영국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유태인 아내를 둔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영국을 위해 기꺼이 스파이가 되었으며 그리핀이라는 코드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음을 영국에 알렸고 그 진행과정을 상세히 보고하여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과정이 잘못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영국 대외정보부 MI6는 지금도 그와 관련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가장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장군이었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으며 동시에 부속 정보부대의 지휘자였다. 이 정보부대의 유일한 기능은 독일 핵 개발 프로그램의 규모를 점치는 것이었다. 독일에 정보원이 없었던 정보부대는 독일의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간접적인 단서를 추렸고, 그 결과 독일은 핵 개발을 한창 진행 중이며 조만간 핵무기를 제조하리라는 확신에 찬 결론을 내렸다. 독일 정보원이 없었던 전략 사무국(OSS)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레슬리 그로브스. 최종 계급은 중장
독일 원자폭탄 계획의 책임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그로브스는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을 막기 위해 하이젠베르크가 스위스에서 강연할 때 보스턴 레드삭스의 포수였다가 스파이로 전향한 모 버그를 잠입시켰다. 버그는 총으로 무장하고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와 관련된 물리학에 대한 발언이 나오면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버그는 물리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이 작전은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영국은 그로브스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이 임박했다는 그의 확신을 뒷받침할 만한 분명한 증거를 조금이라도 대보라고 했다. 그로브스는 증거는 없다고 시인했지만, 계속해서 재미있는 결론을 내놓았다. 증거가 없는 바로 그 점이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증거 부족은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물샐 틈 없는 보안을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영국과 설전을 벌이는 동안 그로브스는 그저 “글쎄요, 영국도 확신할 수 없잖습니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물론 정보원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을 기하기 위해 튜브 앨로이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 중 젊고 영리한 학자 한 사람을 불러, 독일 내 정보원이 제공한 자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자료가 100% 신뢰할 만한지 검토하라고 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앨런 넌 메이(Alan Nunn May)였다. 그는 사실 KGB 요원이었으며, 튜브 앨로이스에 관한 정보를 이미 모스크바에 낱낱이 제공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이제 보너스 선물까지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소련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제조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뿐 아니라, 독일의 원자폭탄 위협을 확신한 미국이 자체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앨런 넌 메이
이때 소련 정보기관은 한 가지 극적인 결론을 내렸다.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 두 나라만이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소련 정보기관은 독일의 프로그램은 제쳐두고, 영국과 미국의 합동계획에 관심을 집중하기로 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위협은, 그리고 원자폭탄으로 인해 소련의 적들이 행사할 전후의 권력지배는 그 가능성이 훨씬 심각했다. 총력을 다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소련은 연합국의 원자폭탄 기밀을 빼내 이를 따라잡아야 했다. 코드명 캔디 작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