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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스파이]냉전 시대의 스파이 - 5. 톱해트 작전(1959~1985)(1)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5.10.06|조회수1,101 목록 댓글 2

 스파이들의 춤은 18세기의 미뉴에트처럼 느리고 고도로 의식적이다. FBI는 이를 곧잘 ‘손수건 떨어뜨리기’라고 불렀는데, 즉 소련 첩보원에게 관심을 내비치는 과정이다. 신호는 알 듯 말 듯하게 보낸다. “당신이 스파이라는 것을 다 안다. 만약 당신의 운명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우리가 기꺼이 당신을 돕겠다.” 스파이는 손수건을 집어들거나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둔 채 못 본 척 지나친다.

FBI가 ‘톱해트(Top Hat)'라 부르는 남자가 연루된 춤은 1959년 10월 뉴욕 유엔본부에서 시작되었다. 소련대표부는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된 젊고 진취적인 KGB와 GRU의 첩보원들로 가득했다. 유엔 주변에서 그럴듯한 정보가 발견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훗날 더욱 복잡하고 위험한 임무를 맡을 첩보원에게는 유엔이 훌륭한 훈련장소였다.

                  

뉴욕 유엔 본부. 냉전 시 수많은 첩보원들이 활동하던 무대였다.

 

                                                                          

군사 정보국 GRU의 문장. 붉은 군대의 창설자이자 최고위원이던 레프 트로츠키가 창설했다. 냉전 기간 동안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져 요원 파견, 위성 이미지, 도감청 등의 수단을 활용한 정보수집임무 이외에도 독립된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 GRU를 훈련, 보유하여 국내외 공작, 특수전활동을 벌였다.

 

톱해트는 드미트리 F. 폴랴코프(Dmitri F. Polyakov)로, 그를 표적으로 삼은 FBI는 미끼로 쓸 아주 큰 고기를 물색했다. 그는 분명 떠오르는 별이었다. 1951년 30세의 GRU 공작원 폴랴코프는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해 뉴욕에 있는 유엔 소련대표부에 유엔 직원으로 파견되었다. 젊은 사람이 해외 요직에, 그것도 미국의 기술기밀을 입수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는 것은 GRU가 그를 큰 인물로 키운다는 뜻이었다. 폴랴코프가 유엔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던 1956년, 유엔 소련 정보기지를 속속들이 감시하던 FBI는 그를 특별히 감시해야 할 GRU 스타 중 한 사람으로 지목했다.

                                                              

드미트리 폴랴코프. GRU의 장성까지 승진한 미국의 정보원이었지만 훗날 발각되어 처형된다.

 

3년 폴랴코프가 또 다른 임무를 띠고 유엔에 돌아왔을 때, 그를 철저히 감시하던 FBI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소련의 체제에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FBI가 알아낸 바로는 그의 환멸은 주로 돈과 얽혀 있었다. 그는 승진을 거듭해 대령의 지위까지 올랐고 GRU에서는 초고속 승진을 했지만 그가 받는 봉급은 1년에 고작 1만 달러에 불과했을 뿐 아니라 그나마 봉급의 대부분은 다시 소련 당국에 반환해야 했다. 소련에서는 당연한 관례였지만 이 때문에 폴랴코프는 궁핍하게 살아야 했고 모스크바에 사는 아내와 세 아이들에게 줄 선물조차 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날마다 뉴욕 거리를 지나다니다보니 불공평함은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미국에서는 봉급이 넉넉지 않은 사람도 가족과 생계를 꾸리고 있었고 미국의 풍요로운 소비문화를 즐기기에 어려움이 없지만, 폴랴코프의 아내는 아침마다 긴 줄을 서서 빵을 사야 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원이나 정부의 고위 관료는 줄을 서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특별한 상점에서 엘리트 신분에게만 지급되는, 소련 서민들이 쓰는 가치없는 루블 지폐와는 다른 특별한 ‘금 루블’을 가지고 어떤 물건이든 살 수 있었다.

      

소련 상류층이 사용하던 금 루블 지폐

 

상류 엘리트층에 들어가 금 루블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기까지 폴랴코프와 같은 공작원은 궁핍한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하지만 폴랴코프는 그들처럼 전형적인 경로를 밟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소련을 망치는 이 같은 체제는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체제를 파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60년 초, FBI 방첩요원 두 사람이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때 폴랴코프는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들은 폴랴코프가 산책을 하러 바깥으로 나온 어느 날 아침에 거리에서 만났는데 이때 첩보활동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러 해 만에 만난 오랜 대학 친구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자신들의 가족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폴랴코프에게 서로 의논하고 싶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고 했다. 폴랴코프는 애매하지만 의미심장하게 이들의 접근을 내치지는 않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소련 정보기관의 규칙에 따라 사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결국 FBI는 손수건을 떨어뜨렸고 폴랴코프는 이를 주워든 셈이었다. 얼마 후 폴랴코프가 움직였다. 그는 외교관들이 모인 어느 연회장에서 미국 외교관에게 다가가 FBI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미국 요원과 접촉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폴랴코프

 

냉전시대 첩보전 역사상 매우 의미심장한 페이지이자 이후 25년간이나 지속될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이며, 소련과 미국 정보기관 사이에 벌어지는 대대적인 물밑 전쟁의 중심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반역전쟁이었고, 양측은 상대국에서 반역자를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역사상 그 어느 때도 반역을 이토록 대대적인 작전으로 사용했던 적은 없었다. 반역자는 다른 반역자를 배반했고, 진짜 반역자를 잡기 위해 가짜 반역자를 이용한 덫을 놓는가 하면, ‘반역’이라는 말이 상대측이 포섭한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내가 포섭한 사람은 ‘애국자’가 되는 정치적 냉소주의가 팽배했다.

이 전쟁은 소련의 몰락과 함께 끝이 날 것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톱해트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역시 다른 반역자에 의해 배반을 당하고 말았다.

폴랴코프는 몹시 고통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는 결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FBI 요원에게 냉정히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서 이러는 거요.” 폴랴코프는 서둘러 한 마디를 덧붙였다. FBI가 감사의 표시로 준다면 기꺼이 받을 만한 것이 하나 있다고. 그는 주문제작한 골동품 총을 모드는 수집광이었다. 전에 그는 5번가의 근사한 상점에 진열된 멋진 주문제작 권총을 보았다. 변변치 않은 그의 수입으로는 엄두도 못 낼 가격이었지만 그는 이따금 상점에 들러 그 멋진 작품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FBI가 그 권총을 선물해준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미국은 시민이 낸 세금 6,000달러를 들여 이내 감사의 표시를 했다. 감동한 폴랴코프는 이 돈이 첩보 역사상 가장 현명한 투자였음을 지체없이 증명해 보였다.

               

주문제작된 루거 권총. 총기 애호가들이 직접주문해서 소장하기도 하지만 주로 정부 고관 등 귀빈에게 선물용으로 제작주문된 것들이다.

 

뉴욕 부근의 안전한 장소에서 톱해트를 만나면서 FBI는 월척을 낚았다고 생각했다. 폴랴코프의 이력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경리원으로 일하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장교를 지냈고, 당시 용맹함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의 웨스트포인트라 할 수 있는 명문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당시 GRU에 발탁되었다. GRU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을 발탁해 정보기관의 인재로 채용하곤 했다. 그는 1951년 유엔으로 처음 해외 근무를 나갔고, 그 뒤에는 곧바로 소련 정보기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서독으로 잠입할 스파이 조직을 운영했다. 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덕분에 그는 1959년에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GRU를 이끌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프룬제 군사학교 건물 전경. 다른 사관학교와 통합돼 지금은 종합사관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폴랴코프는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면서 FBI를 몹시 당황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당신네 군사조직을 꿰고 있습니다. 모든 게 우리 손바닥 위에 있단 얘깁니다. 당신네 나라를 배반하고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폴랴코프는 GRU가 미군에 심어놓은 최정예 정보요원을 모두 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잭 E. 던랩(Jack E. Dunlap)

술을 좋아하고 오직 돈 때문에 스파이 노릇을 하는 육군 하사관 던랩은 국가안전보장국(NSA)의 극비문서를 나르는 연락병이었다. 그는 NSA의 문서를 GRU에 제공했고, GRU는 이 문서를 고해상도 특수 카메라에 담은 뒤 던랩의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즉각 돌려보냈다. 던랩은 전혀 의심을 받지 않고 수년간 NSA의 문서를 소련에 제공했고, 그 대가로 상당한 돈을 받아 모터보트, 고속 자가용, 비싼 여자를 사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잭 던랩

 

                                                                

NSA 본부 건물의 모습. NSA는 암호 해독 분석에 관여하고 타국의 유사한 기관에게서 미국의 정부 통신과 정보 시스템에 책임을 진다. 미 정보기관중 가장 큰 규모와 막강한 정보수집력을 갖고 있는 것이 NSA다. 한 해 예산은 80억 달러(8조원)이다.

 

윌리엄 H. 훼일런(William H. Whalen)

육군 중령 훼일런은 소련 정보기관이 미국에 심어놓은 매우 값진 정보원이었다. 1959년에 미국 합동참모본부 자문관을 지낸 그의 경력은 정보 제공에 더없이 귀중한 원천이 되었다. 훼일런도 던랩처럼 순전히 돈 때문에 조국을 배반한 사람이었다. 그는 약 40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받고 미국의 핵무기, 전시의 미군 작전계획, 미국 정보기관이 추정하는 소련 군사력, 그 외에 자신의 책상을 거쳐가는 모든 유용한 정보를 그대로 GRU에게 넘겼다.

                                         

윌리엄 훼일런

넬슨 드러먼드(Nelson Drummond)

던랩과 마찬가지로 드러먼드 역시 군에서의 계급은 실제 그의 가치에 비해 낮았다. 그는 해군에서 단순한 서무를 맡았지만 그러면서도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통신과 관련된 일을 했다. 그는 런던에 있는 해군 통신센터에 근무하면서, 해군 배치상황이며 무기체계와 암호 체계에 과한 상세한 내용 등 일급비밀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이 모두를 돈과 바꾸었다. 폴랴코프가 그를 폭로한 뒤, 미국 국방부는 드러먼드가 팔아넘긴 것들을 수정하기 위해 수억 달러를 투자해야 했다.

                                             

넬슨 드러먼드

허버트 W. 보켄하웁트(Herbert W. Boeckenhaupt)

공군 병장 보켄하웁트 역시 계급은 낮았지만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매우 귀중한 통신을 다루었다. 금전적인 목적 때문에 배반을 택한 그는 공군의 상세한 코드와 신호체계 그리고 무엇보다고 세계대전이 일어날 경우에 사용될 미국 전략공군사령부의 특수 암호체계를 팔아넘겼다.

                                                             

허버트 보켄하웁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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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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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성환입니다 | 작성시간 15.10.06 역시...돈이란것엔 앵간하면 장시없구만요
  • 작성자ray* | 작성시간 15.10.06 돈이면 다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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