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동서로 분리된 베를린이었다. 1945년에 연합국이 베를린을 점령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공동으로 관리했다. 그러나 1948년에 베를린 공동 관리가 결렬되었고 독일 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이 대립하면서 베를린은 두 개로 나뉘었다.
베를린 시 4개국 연합군 분할 점령
두 개의 독일, 즉 동독과 서독은 각각 비밀경찰과 정보부가 있었는데 이 중 동독의 비밀경찰인 국가보안국은 소련에서 온 마르크스 볼프(Markus Wolf)가 지휘했다. 한편 서독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정보부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이 서독의 독자적 정보기관(BND)을 만들었고 이곳은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LEN)이 지휘했다. 겔렌은 나치스의 옛 정보부원으로 소련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CIA에 채용되었고 1949년부터 1968년까지 BND를 지휘했다.
국가보안부 문장
마르크스 볼프
독일 연방정보국(BND)의 마크
나치스 시절의 겔렌
볼프와 겔렌이라는 두 명의 스파이 우두머리는 베를린을 둘러싸고 사투를 벌였다. 겔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스에 소속되어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그의 보고는 소련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했다고 해서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었고 결국 겔렌은 좌천당하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수집한 소련의 정보를 50개의 드럼통에 넣어 산에 묻어 두었고 서방 국가와 몰래 교섭을 벌여 미국의 도움으로 워싱턴으로 가게 되었다.
레나 기퍼(Rena Giefer)와 토마스 기퍼(Thomas Geifer)가 공동 집필한 <냉전의 어두움에서 살아남은 나치스: 알려지지 않은 나치스의 도주 비록>을 보면 미국이 얼마나 많은 나치스 당원을 채용하고 많은 전쟁 범죄자를 숨겼는지 알 수 있다.
토마스 기퍼와 레나 기퍼 부부
겔렌은 소련에 대한 비밀공작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그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미국은 그를 숨겨 주었다. 물론 미국은 나치스 당원을 이용하는 것에 상당한 망설임이 있었지만 앨런 덜레스(Allen Dulles)의 결단으로 겔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 중에 그가 조직한 ‘동방 군단(Ost Truppen)’을 미국의 돈으로 부활시키고, 소련에 대한 공작부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는 예전 부하를 비밀리에 모아 ‘겔렌 기관(Gehlen Organisation)’을 재출발시키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겔렌 기관은 동유럽에서 비밀공작을 펼쳤고 1953년에 동독의 폭동에 관여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
러시아인 의용군을 사열하는 라인하르트 겔렌 소장
독일 동방군단의 병사들
겔렌 기관의 요원들
1953년 동독 폭동 사태는 1953년 6월 17일 소련 점령지구인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에서 일어난 반공 시위였다. 동독 정부가 건축 노동자의 노르마(공산국가에서 노동자에게 부과하는 작업 기준량)를 인상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파업이 반정부 운동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다. 한국의 6.25 동란 말기였던 1953년에 발생했던 이 사건은 그해 9월 서독 총선거를 앞두고 전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6일 전인 6월 11일 동독 정부는 독일 통일의 길을 트기 위하여 종래의 강압적인 사회주의화 정책을 완화하는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소련군의 점령과 공산당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6월 17일 봉기하여 공산당 본부와 기타 기관을 습격하였다. 이 의거는 동베를린뿐만 아니라 동독 전역으로 파급되었으나 소련군 전차부대의 출동으로 진압되었다.
한편 서독에는 겔렌이 책임지고 있는 정보부(BND)와 대항스파이를 담당하는 BFV(헌법수호국)가 있었다. BFV 국장은 오토 요한(Otto John)은 겔렌과 대립하다가 1954년 7월에 동독으로 망명했는데 우습게도 그는 1955년 12월에 다시 서독으로 돌아와 자신은 동독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던 중 KGB에 납치당해서 그곳으로 갔다고 말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우스운 사건이었다.
BFV의 마크
오토 요한
이 시기에 겔렌은 CIA을 떠나 서독의 정보부로 옮겼는데, CIA의 규제를 받는 것이 성가셨기 때문이었다. 또한 CIA에서도 이미 겔렌의 이용가치가 떨어졌다고 보아서 굳이 잡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나치스 당원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높았기 때문에 겔렌 기관은 끝까지 신뢰를 받지 못했으며, 또 그곳에는 소련의 스파이도 많이 잠입해 있었다. 그래서 겔렌은 ‘전설의 스파이’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에 그의 정보는 쓰레기였다는 엇갈린 평가도 받았다.
마르크스 볼프는 1923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작가이며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볼프(Friedrich Wolf)인데 그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소련으로 망명했다. 마르크스 볼프는 소련에서 공부해서 외교관이 되었고 KGB에 채용되어 동독의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그는 매우 우수한 인재로 31세 때 이 모든 일을 채임지게 되었다. 참고로 동독의 비밀공작기관은 HVA라고 불리웠다.
프리드리히 볼프
볼프는 비밀공작을 할 때 두 가지 전술을 사용했다. 하나는 ‘솔기(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지을 때, 두 장의 천을 실로 꿰매어 이어 놓은 부분 )가 없는 잠입’으로 독일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한 사람의 여권을 손에 넣은 후, 거기 표시된 특징과 최대한 가까운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을 여권 주인인 것처럼 위장시켜서 서독으로 잠입시키는 전술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서 공격’으로 잘생긴 젊은 남자 스파이를 이용해 서독 정부에서 일하는 여성 비서를 유혹하게 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전술이었다.
볼프의 적은 노련한 라인하르트 겔렌이었다. 소련은 겔렌에게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겔렌의 BND에 잠입하려는 작전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러한 볼프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하인츠 벨루에(Heinz Veluwe)라는 BND 장교였다. 하인츠 벨루에는 나치스로 늘 고향 드레스덴을 폭격한 미국과 영국에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볼프는 이 점을 이용해서 벨루에를 매수했다. 벨루에는 KGB에서 제공한 정보로 BND에서 성과를 올려 간부가 되었다. 그는 겔렌의 신뢰를 받은 후 BND의 많은 정보를 흘렸는데 KGB에 건네준 마이크로 필름은 15,000통이나 되었다고 한다.
벨루에는 3년 동안 계속 겔렌을 속였으나 1961년에 KGB 스파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CIA는 겔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에 독자적으로 볼프의 기관인 HVA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1961년에 HVA의 군터 멘넬 대위가 CIA로 도망쳤는데 그는 미국 공군과 서독 방위부에 소련의 스파이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겔렌 기관에도 ‘파웰’이라는 스파이가 있다고 말했다.
‘파웰’이 하인츠 벨루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결국 그는 체포되었다. 벨루에를 신뢰하고 있었던 겔렌에게 이 일은 큰 충격이었고 그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동독의 외교적 압력으로 2년 후인 1963년이 되어서야 벨루에에 대한 재판이 열렸고 그 자리에서 겔렌이 옛 나치스 당원이었음이 밝혀져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신문은 옛 나치스 당원을 정보기관의 우두머리로 기용한 아데나워 수상을 공격하는 기사를 실었다. 벨루에의 재판은 아데나워 수상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고 몇 개월 후에 결국 그는 사임하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t) 박사가 서독 수상이 되었다.
연방의회에서 연설중인 독일수상 콘라드 아데나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에르하르트는 겔렌을 해임시키고 싶었지만 동독과의 관계가 위기에 몰렸기 때문에 유능한 그를 당장 그만두게 할 수 없었고 마땅한 후임이 없기에 그대로 두었다. 따라서 겔렌은 끈질기게 그 자리를 지켰고 전 세계의 정보를 끌어 모았는데 서독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보에 대한 집념과 수집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는 노년에 스파이 컨설턴트 노릇을 했고 1968년에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한편 동독의 스파이 우두머리 볼프는 점점 자신의 기반을 다져갔다. 그는 비밀공작에 정열을 쏟았고 군터 기욤(Gunter Guillaume)이라는 스파이를 기용해서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을 사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87년에 은퇴했는데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자 과거 국가 안전부에서 활동했던 죄로 재판을 받아 1993년에 6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95년에 독일의 법률이 냉전기의 스파이 활동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바뀌어 그는 석방되었다. 그리고 1996년에 볼프는 회상록을 출판했고, 헐리우드 영화 진출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물론 입국 심사 때 그의 비자는 거부당했지만 그는 임시 비자를 발급받아 입국했고, CIA 관계자에게 크게 환영받았다고 한다.
빌리 브란트와 함께 하고 있는 군터 기욤(오른쪽). 군터 기욤은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의 비서였으나, 동독의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 일로 브란트 총리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된다. 기욤이 동독에 넘긴 정보가 안보에 결정적인 정보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브란트 사임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귄터 기욤의 부인 크리스텔도 스파이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