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조의 다른 조직원과 마찬가지로 매클린은 부유한 특권층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도널드 매클린 경은 1906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1917년에 기사 작위를 받은 유명하고 부유한 변호사였다. 아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만들고 싶었던 그는 냉정한 금욕주의로 아들을 키웠고, 아들 매클린은 엄격하고 권위적인 아버지를 혐오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엄격한 사립학교에 보냈다. 그 학교는 규율이 얼마나 엄격하던지 남자아이들이 자기 몸을 만지지 못하도록 바지 주머니를 모두 꿰매버릴 정도였다.
매클린의 아버지 매클린 경
매클린은 18세가 되던 193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술과 섹스를 배웠고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에 평생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 또한 흥미진진한 과격 좌익의 정치 세계로 끌려들어갔다. 그를 양성애와 정치로 안내한 사람은 같은 대학 친구인 앤서니 블런트와 멋쟁이 동성 연애자 가이 버제스였다. 이들은 비밀클럽을 조직했고, 후에 버제스의 유혹으로 존 케른크로스(John Cairncross)가 가입했으며, 정치성향이 급격히 좌익으로 돌아선 킴 필비도 합류했다.
케임브리지 시절의 가이 버제스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공통된 결의로 뭉친 이들은 마르크스 철학에 몰두하면서 불평등은 파괴되어야 마땅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확신했다. 공황기에 접어든 영국에서는 불평등이 특히 심각했지만 실업자들의 시위 중에 발생한 난투극으로 매클린이 체포된 일 외에는 이들이 할 만한 일이 많지 않았다.
다른 보통의 영국 공산주의자라면 대개 거실에 둘러앉아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정도였지만 이 과격한 젊은이들은 이들과는 다른 쪽으로 흘러갔고 여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열렬한 믿음, 혐오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심, 인류를 인도할 것은 소련 뿐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그것이었다.
KGB를 대표해 이 세 가지 요소를 이용한 사람은 KGB의 가장 유능한 첩보원인 오스트리아의 공산당원 아르놀트 도이치(Arnold Deutsch)와 한때 카톨릭을 신봉했듯 공산주의를 신봉한 전직 헝가리 사제 테오도르 말리(Theodore Maly)였다.
아르놀트 도이치. 체코 출신으로 독일 스파르타쿠스 당에서 활동하다가 스파르타쿠스 당이 해체되자 소련의 공작원으로 일했다.
테오도르 말리
두 사람은 케임브리지 대학과 기타 여러 곳의 젊은 공산주의자를 둘러보며, 나중에 영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한 계층에 속하면서 포섭에 쉽사리 응할 사람을 찾았다. 이들은 신중하고 끈기있는 전략을 세웠고, 파시즘에 대항해 지하운동을 전개할 ‘전사’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다가갔다. 도이치와 말리는 KGB니 소련 정보기관이니 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보다는 포섭 대상의 이상주의 또는 올바른 명분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가짐에 호소했다. 두 사람은 학생들에게 세계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에서 비밀활동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여 개의 지하투쟁에 참가한 세련되고 능숙한 전문가인 도이치와 말리는 케임브리지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조용하면서도 지혜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왠지 믿음이 갔다. 이들은 미래를 보여주었고,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말리는 매클린을 집중 공략하면서, 대학 졸업 후에 소련에서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라고 했다. 빛나는 눈빛의 다른 이상주의자들처럼 매클린도 작업복을 입고 공장 노동자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수업이 끝나면 함께 혁명가를 부르고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가 위대한 공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도구를 생산한다. 그러나 말리는 매클린에게 그의 순수한 정치 감정을 버리고 해외 근무직에서 일하면서 소련의 적인 자본가와 그 앞잡이가 획책하는 사악한 계략을 소련에 알려주라고 했다.
도이치와 말리가 케임브리지 학생의 이상주의를 어떻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첩보활동에 이용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이 묘한 이야기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낀 영국 세대의 문화 및 도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일부 사람들의 생각처럼 어쩌면 이 젊은이들의 행동에서 정치와 관계된 부분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5인조를 한데 엮은 것은 그들의 부모와 부모 세대가 상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증오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자신들이 바꾸고자 갈망했던 현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 이러한 동기를 뒷받침한다.
5인조 중에서 가장 선배인 앤서니 블런트를 보자. 블런트는 여러 해가 지나 자신의 반역행위를 털어놓으면서 왜 자신과 동료들이 KGB를 위해 일하려고 했는지 설명했다. “당신들은 1930년대를 이해하지 못하오.” 그는 자신을 심문하는 MI5 요원을 비웃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를 심문하던 사람은 영국 노동자 계급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1930년대의 혹독한 경제공황으로 직장에서 쫓겨난 뒤 다시 일자리를 얻지 못해 결국 절망에 빠져 술로 폐인이 된 사람이었다. 반면 블런트는 부모에게서 넉넉한 용돈을 받아가며 케임브리지 대학을 편안하게 다녔고, 한여름에는 시골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매클린도 마찬가지였다. 케임브리지를 다니면서 부모가 모든 것을 해결해준 덕에 돈 때문에 걱정한 적이 없었다. 그 역시 여름에는 시골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5인조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살면서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노동자의 불공평과 어려움을 이야기했지만, 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는 다만 정치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의 정치의식도 맹목적이었다. 이들은 곧잘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이야기했지만 이들이 말하는 제국주의에는 1920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은 결코 포함되지 않았으며, 그 뒤 소련이 발트 해 연안 국가를 점령한 일, 핀란드를 침공한 사건, 폴란드 분할을 놓고 히틀러와 뒷거래를 한 일 따위도 모두 제외되었다.
5인조를 앞장서서 두둔한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은 이들의 배반을 당시 널리 퍼진 정통교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진 예수회의 배교에 비유했다. 그린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회의 미덕은 불충이며 박해의 시대에 불충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잘못된 해석이었다. 그린의 왜곡된 정당화는 사실과 달랐다. 5인조 가운데 세 사람 즉 필비, 버제스, 매클린은 그들의 이른바 미덕인 불충을 해명하지 않고 소련으로 도망가버렸다. 영국에 그대로 남은 나머지 사람 가운데 블런트는 미술사학자라는 자리를 단념할 수 없었으며 가입되어 있는 런던 클럽 등 영국 상류층의 안락한 삶도 포기할 수 없었다. 케른크로스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빌라의 안락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 영국의 스탈린 추종자들’은 예수회의 순교자는커녕 그 어떤 종류의 순교자도 아니었다.
그레이엄 그린. 영국의 소설가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매클린은 분명 스스로를 순교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한때 필비에게 자신이 KGB를 위해 하는 일은 “지저분하지만 누군가는 해야하는 화장실 청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처음 포섭한 도이치와 말리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약삭빠른 두 사람은 매클린의 말을 못들은 척 했지만, 새로 온 KGB 첩보원인 아나톨리 그로모프(Anatoli Gromov)에게 이 말을 했을 때는 호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로모프는 조국을 위해 라즈베드카, 즉 첩보를 손에 넣는 일을 화장실 청소에 비유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아나톨리 베냐미노비치 그로모프. 코드네임은 '바딤'으로 나중에 대령까지 승진하였으며 국가안보부(MGB)의 책임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