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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사]2. 공화국 성립 이전의 스페인 - (2) 폭발 직전의 사회 문제

작성자청색장미|작성시간18.03.14|조회수1,038 목록 댓글 4

일찍이 1830년대에 스페인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첫 시도가 있었고, 19세기 중엽이면 비정치적인 소규모 조합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후 새로운 정치 이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다. 아나키즘적 혹은 절대자유주의적(Libertarian) 사회주의가 먼저 들어왔는데, 이 이념과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불화는 훗날 스페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86819세기 이탈리아의 혁명적 아나키스트인 주세페 파넬리(Giuseppe Fanelli)가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제1공화국 대통령 피 이 마르갈(Pi y Margall)이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의 저서를 번역 출간한 후였다. 파넬리는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의 숙적이었던 바쿠닌(Mikhail Bakunin)의 숭배자였다. 그는 스페인어도 모르는 데다 주머니에는 돈 한 푼 없이 마드리드에 왔다. 그러나 그의 이데아’(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그렇게 불렀다)는 스페인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4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페인에는 거의 5만 명에 이르는 바쿠닌주의자들이 생겨났는데, 그중 다수가 안달루시아인들이었다.

주세페 파넬리


피 이 마르갈


프루동.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그의 사상은 후에 급진적 아나키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발전하여 나중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큰 세력을 형성한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에 영향을 끼쳤다.


미하일 바쿠닌. 러시아의 작가, 혁명가, 아나키스트.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은 그와 마르크스 사이의 이념적 반목으로 수 년간 혼선을 빚었다. 그는 프루동과 함께 19세기 아나키즘 주창자로 평가받는다. 바쿠닌의 명성과 매력은 유럽 곳곳에 숱한 추종 세력을 만들어냈다. 특히 1936년까지 스페인의 사회주의 혁명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그의 후예들이었다.


초기에 아나키즘이 스페인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나키즘은 자유롭게 연합하는 공동체들의 협력 구조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스페인 노동자들의 뿌리깊은 상호부조 전통과 맞아떨어졌다. 또한 아나키즘이 내세우는 연방주의적 조직은 중앙집권적 경향에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아나키즘은 부패한 정치 제도와 위선적인 교회에 맞서 강력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했다. 많은 관찰자들은 아나키즘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무토지 농민들에게 불어넣은 순진한 낙관주의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의 말이 금욕적이고, 거의 성인(聖人)에 가까운 인물들에 의해 퍼져 나간 방식에 대해, 그리고 아나키즘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담배와 술, 그리고 (정식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간통을 포기한 사실을 두고서도 호의적인 얘기들이 많이 오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초기의 강렬한 아나키즘은 그 이념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유와 상호부조가 자연의 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확신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을 눈 뜨게 하고, () 의지의 거대한 잠재력을 해방시키고, 바쿠닌이 대중의 자연 발생적 창조성이라고 부른 것을 분출시키는 데는 단 한 차례의 봉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러시아의 작가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가 말한 것처럼 역사의 매커니즘을 열어젖힐 수 없다라는 사실에 부딪혀 그들이 느껴야 했던 좌절감은 1890년대에 개별적인 정치적 폭력 행위로 분출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을 외로운 호랑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극해서 자기들처럼 행동하도록 이끌거나, 브리가다 소시알(Brigada Social), 즉 비밀경찰의 무차별적 잔혹 행위에 복수하는데 폭력을 사용했다. 가장 유명한 예는 1892년 바르셀로나 몬주익 성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고문을 받다 살해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의 강력한 항의와, 왕정 복고의 주역이었던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의 암살을 불러왔다. 이후 탄압과 보복의 악순환이 꼬리를 물었다.

빅토르 세르주(아래 사진)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살았던 저술가이자 혁명가다. 그는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인물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으며, 1차대전 후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했다. 스탈린 집권 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가 멕시코로 망명하여 곤궁한 상태에서 사망했다.


암살당하는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 권위주의자들’(반대파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은 더디게 성장했다. 1871년 말에 칼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가 파리코뮌이 붕괴된 후 스페인에 입국했고, 그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마드리드에 스페인 사회주의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그들이 중앙집권적 국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식자공 출신 파블로 이글레시아스(Pablo Iglesias)가 스페인에서 지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떠올랐는데, 그가 이끄는 사회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일을 추진하면서 먼저 조직을 구축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1879년에 그들은 드디어 에스파냐 사회주의노동당(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nol, PSOE, 이하 사회주의노동당’)을 창설하고, 1888년에 산하 노동조합 조직으로 노동자총동맹(Union General de Trabajadores, UGT)을 출범시켰다. 이글레시아스는 온건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계급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다(사회주의노동당은 1914년까지도 공식적으로 왕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은 라이벌이라 할 아나키스트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비난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회주의자들이 매우 관료주의적 집단으로 비쳤고, 그래서 그들은 스페인의 프로이센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폴 라파르그.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저널리스트. 프랑스 노동당을 창립했고 지도했으며, 프랑스에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했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스페인의 정치가. 민주사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정치 지도자였다.


에스파냐 사회주의노동당의 창설을 선언하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농촌 특성이 강했던 스페인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장이 더뎠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마르크스가 농민들은 물론, 그 자신이 농민적 삶의 어리석음이라고 한 것에 경멸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 자체의 산물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만이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산업의 주요 부문은 이미 아나키즘의 아성이 되어버린 카탈루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구 카스티야 사회주의자들은 산업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빌바오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스페인 중앙부 메세타 지역과 북부 해안 지역을 주 무대로 삼아 세력을 넓혔다. 반면에 아나키즘 추종자들은 지중해 쪽 해안선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는데, 특히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가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 초까지 스페인은 여러 차례 소란스러운 사건을 겪었는데,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끝 무렵 러시아와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페인 역시 큰 혼란에 빠졌다. 분쟁의 주요 무대는 대규모 영지인 안달루시아와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라티푼디움(고대 로마 시대로부터 유래한 대토지 소유 제도 또는 소작농을 이용한 대농장 경영을 가리킨다.), 아스투리아스와 비스카야의 광산 지대와 카탈루냐의 산업 지대였다. 19세기말 바르셀로나에서는 벼락부자가 된 공장주들이 건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승리감에 도취된 자기 과시에 빠져있었다.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아스투리아스 지방


비스카야. 스페인 바스크 지방 서북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빌바오이다.


산업 노동자들의 폭동과 당국의 가혹한 진압으로 빚어진 폭력의 악순환은 때로 극심한 혼란을 유발했다. 비밀경찰인 브리가다 소시알은 특별한 방법으로 공공질서를 수호하는데 앞장섰고, 가끔은 아나키스트 총잡이들이나 파업 주동자들을 때려잡는 데 깡패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대규모 도시 폭동, 19097월 말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비극의 한 주(Semana Tragica)' 사건의 원인은 산업 분쟁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모로코에서 발생한 식민지 전쟁의 부산물이었다. 알폰소 13세의 측근인 로마노네스(Romanones) 백작이 사들인 광산 채굴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된 스페인 병력 1개 중대를 모로코의 리프(Rif) 족이 몰살했다. 이에 정부는 예비군을 소집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으로 군 복무를 면제받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기혼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쿠바에서 일어난 재난(미국-스페인 전쟁 패배) 이후 전반적으로 군대에 반대하는 정서가 강했고, 모로코에서 일어난 위기에 대한 바르셀로나의 자연 발생적 반응은 갑작스럽고 폭발적이었다.

리프 족


급진당(Partido Radical) 지도자 알레한드로 레룩스(Alejandro Lerroux)를 지지하는 젊은 야만인들이 설치고 돌아다녔고,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교회가 불타고, 한 노동자가 무덤에서 파낸 수녀의 시신을 껴안고 춤을 춘 유명한 사건과 같은 신성모독 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런 상징적 폭력은 스페인 종교의 미신적 행태에 트라우마가 있던 사람들이 표출한 혐오감의 표현이었다. 스페인 카톨릭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것이 중세 암흑 시대에나 어울릴만한 것이었고, 이런 정신적 억압은 그동안 교회 당국이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과 더불어 교회를 치안대와 함께 폭도들의 일순위 공격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이 폭동으로 6명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군대가 도착하고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중에는 절대자유주의에 입각한 현대식 학교의 창시자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도 있었다. 페레르가 폭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지만 그럼에도 카톨릭 교회 당국은 정부에 압력을 넣어 교육 문제에서 자신들의 적이라 할 수 있는 페레르에게 유죄를 선고하도록 했다. 페레르는 터무니없는 증언을 근거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그의 처형은 나라 안팎에서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알레한드로 레룩스. 스페인의 정치가로 제2공화국(1931-1939)의 중도 우파 집권기에 네 차례 총리를 지냈다.


비극의 한 주 당시 바르셀로나 거리


비극의 한 주 당시 파헤쳐진 무덤들


프란시스코 페레르.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자유교육주의자이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마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체포되어 재판에 출두하는 페레르


1909년의 바르셀로나 봉기 이후에 절대자유주의 운동의 다수파는 새로운 전략을 내세웠다. 이 방향 전환은 주로 프랑스 생디칼리슴 운동의 영향에 따른 것이었다.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정책을 표방한 생디칼리슴 운동은 궁극적으로 총파업을 통해 자치적 산업과 농업에 기반을 둔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로써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의 노동조합 조직인 전국노동연합(Convencion Nacional de Trabajadores, CNT)이 출범했는데, 이 기구는 수공업이 아니라 산업에 종사하는 노조들로 구성될 터였다. 이처럼 스페인의 절대자유주의 운동의 주축은 기본적으로 순수 아나키스트들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이었다.

전국노동연합의 결성


1차 세계대전 동안 기업가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린 반면 노동자들은 물가 폭등으로 고통을 당했다. 1913년에서 1918년 사이에 물가는 두 배 오른데 비해 임금은 25% 인상되는데 그쳤다. 1919년 말에 노동자총동맹에 가입한 조합원은 16만 명으로 늘어났고,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의 전국노동연합 가입자는 70만 명으로 늘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활동가는 42천 명을 헤아렸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 중에는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Francisco Largo Caballero), 인달레시오 프리에토(Indalecio Prieto), 페르난도 데 로스 리오스(Fernando de los Rios), 훌리안 베스테이로(Julian Besteiro) 등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머지않아 정국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게 된다. 한편 매우 온건한 가톨릭 노동조합 운동 조직인 전국가톨릭농업연합'(Confederacion Nacional Catolica Agraria, CONCA)이 주로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on) 지역 농업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 기구는 산업 중심지 중에서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바스크 지역에 유일하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페르난도 데 로스 리오스


훌리안 베스테이로


전국가톨릭농업연합의 주요 인물들


카스티야 이 레온


스페인에서 군대가 차지하고 있던 확고한 지위는 점진적 개혁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총 병력이 16만 명 정도 되었는데, 이 정도 병력을 12천 명의 장교와 213명의 장군들이 지휘했다. 지휘관이 너무 많은 이 무능한 조직은 국가에 무거운 짐이었다. 역할도 분명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반동적이었지만 가끔은 나서서 부패한 정치가들에 반대하는 인민의 동맹자로, 국가 쇄신을 지지하는 개혁 세력으로 자처하기도 했다. 제국을 잃은 뒤로 스페인 군대는 지방 수비대들의 집합체 정도로 지위가 격하되었으며, 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만한 유일한 무대는 모로코의 스페인 보호령이었다. 이 보호령은 1906년 알헤시라스 회담에서 프랑스에게 넘겨준 지역보다 훨씬 작았다. 이 지역에서 스페인은 오로지 인산(燐酸) 광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이곳 원주민인 카바일(Kabyle) 족은 유럽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길 열망했다. 승진에 목마른 스페인 장교들에게 모로코 복무는 본토의 지루한 병영 생활과는 거리가 먼 진짜 군대 생활을 약속해주었다. 그래서 아프리카파(Africanista)' 신화가 생겨났으며, 그들은 스페인 군대의 엘리트로 떠올랐고 그들의 머릿속에 거만함과 모종의 사명감을 심어주었다.

1906년 알헤시라스 회담의 풍자화. 이 회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열강들은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인정했다.


카바일족은 주로 모로코, 튀니지, 리비아 서부 그리고 알제리 북부의 해안 산악지대에 자리잡고 있던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부족이다.


1917년 스페인에 군사,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군 내부에 국방위원회(Juntas de Defensa)라는 조직들이 생겨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들을 해체하려고 하자 그 지도자들이 들고일어나 군대의 한심한 상황을 공격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보수적인 에두아르도 다토(Eduardo Dato) 정부는 또 한 차례의 프로눈시아미엔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워 그드의 요구 가운데 일부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조치는 카탈루냐 연맹(Lliga Catalana) 지도자 프란세스크 캄보(Francesc Cambo)를 비롯한 몇몇 정치가들에게 개헌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 개혁으로 국가를 현대화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도입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캄보는 제헌의회, 즉 완전한 대의제 의회를 구성하는 첫걸음으로 719일 바르셀로나에서 정치가들이 회합할 것을 제안했다.

선언문을 발표하는 국방위원회


에두아르도 다토


프란세스크 캄보. 카탈루냐 연맹의 창시자이다.


비슷한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의 대변 기구인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노동자총동맹도 비슷한 생각으로 국방위원회들이 변화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제헌의회 구성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총파업을 요구했다. 총리 다토는 의회를 해산하고, 의원들의 면책특권을 일시 중지했다. 713일에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빌바오, 사라고사, 오비에도, 아스투리아스와 안달루시아 광산 지역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방위원회들은 혁명에 동참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구성원 가운데 상당수가 파업 진압에 참가했다. 여기서 72명의 사망자, 15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천여 명이 체포되었다. 파업이 한 달 동안 지속되면서 아스투리아스에서는 리카르도 부르게테(Ricardo Burguete) 장군과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라는 젊은 아프리카파 소령이 진압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진압 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34녀에 일어날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격변의 전주곡이었는데, 그때는 프랑코 장군이 보좌역이 아닌 주역으로 등장한다.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카르타헤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캄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바오. 바스크 지역의 대표적인 산업 도시이다.


리카르도 부르게테 장군


젊은 시절의 프랑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사회 문제를 억압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었다. 주로 유아 사망률이 줄어든 덕분에 인구가 늘어난 데다가 실업자가 증가하는 시기에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가난한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들이 급속히 팽창했다. 교회는 이제 예전처럼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정치가들은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사회가 과두적 자유주의에서 대중 민주주의로이해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알려 하지도 않았다. 과거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을 샴페인 병으로, 그 자신을 그 내용물의 분출을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로 비유한 지 이미 한 세기가 지났건만 사람들의 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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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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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8.03.14 그러고 보면 농민을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로 세워 승리한 중국공산당이 대단하기는 혀요
  • 작성자월터 | 작성시간 18.03.15 잘읽엇습니다.
  • 작성자titanis | 작성시간 18.03.15 앤소니 비버의 책을 많이 참고하신 듯...
  • 답댓글 작성자청색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3.15 앗!!!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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