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들은 스페인령 모로코와 스페인 전역에 주둔한 수비대들의 봉기를 신호탄으로 삼아 쿠데타를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거사의 성공 여부는 병력의 규모보다는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이 주는 심리적 효과에 달려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이 쿠데타를 완전히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화 정부 역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48시간 이내에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 48시간 동안에 모든 지역의 점유(공화 정부 점령 지역과 반란군 점령 지역)가 결정되었다.
공화 정부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 상황에서 치명적이었는데, 이는 초기의 불확실성이 방어적 사고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총리인 키로가는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의 무장을 두려워했다. 그는 국가가 자신의 군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법치(法治)로부터 일탈하기를 거부했다. 의용군에게 제때에 무기를 내주지 않음으로써 반란군을 선제 공격하거나 신속하게 역공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공화 정부 당국자들은 군대보다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기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반란을 24시간 내에 진압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결코 믿지 않았다.”라고 세비야의 한 목수는 회고했다.
공화 진영 사람들은 불가피한 상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 그들은 한 슬로건이 말해주듯이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라 파시오나리아’(돌로레스 이바루리)는 위험하지만 효과적인 이 생각을 ‘노 파사란(No Pasaran. '저들은 결코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리라!’)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문구는 베르됭에서 페탱이 했던 유명한 말을 표절한 것이었다.
1936년 10월 4일, 저들은 결코 여기를 통과하지 못하리라(No Pasaran)라는 구호를 만들어낸 돌로레스 아바루리, 일명 '라 파시오나리아'가 연설을 하고 있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완전한 기습 공격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 측의 의심과 혼란은 확실히 반란 주모자들에게 유리했다. 만일 지역 수비대가 자극받아 반란에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한 정부 당국자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노동자들이 곧바로 행동에 나섰더라면 쿠데타 세력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후에 망설임의 대가를 자신들의 목숨으로 갚아야 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병영을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더라면 대부분의 준군사 단체들도 노동자들에게 합류했을 것이고, 반란에 가담한 수비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을 것이다.
몰라 장군이 암호 전문으로 내린 최후의 명령은 아프리카 군대는 7월 18일 새벽 5시에, 스페인 본토의 군대는 그보다 24시간 뒤에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양쪽에 시차를 둔 것은 아프리카 군대가 스페인령 모로코를 먼저 확보한 다음 해군을 통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안달루시아 해안으로 이동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은 아프리카 군대의 하사관과 일반 병사들이 징집병이 아니라 정규군, 좀더 정확하게는 아스투리아스 반란 진압 때 실력을 보여준 용병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할 수 있었다. 식민지 군대에는 자유주의에 동조하는 장교들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도 그들이 항상 국가적 가치를 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우파 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서 ‘적색분자’로 보았다. 이런 사고방식은 몰라 장군이 반란을 도모하면서 내린 훈령에 잘 드러났다. “우리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의 적이다.”
엘리트 병력이자 가장 내향적(內向的) 집단이 외인군단이었다. 외인군단 병사들은 도망자와 범죄자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사나이다움과 학살 예찬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죽음 만세(Vive la Muerte!)'라는 전쟁 구호와 함께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라는 교육을 받았다. 외인군다은 여러 개의 반데라들(Banderas), 즉 7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구성되고, 경포를 보유한 작고 경제적인 대대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한편 모로코인 병력은 각각 250명 가량의 대대 단위인 타보르(Tabor)로 나뉘었다. 이 ’레굴라르‘들은 스페인 장교가 지휘하는 리프족 병사들이었는데, 이들의 잔인함과 군사적 효율성은 20세기 초 식민 정부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전투 기술은 땅바닥에서 양팔을 사용하여 눈에 띄지 않게 신속히 이동하는 포복 능력이었다. 그런 은밀한 행동은 눈에 보이는 용맹함을 중시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결정적 이점이 있었다. 모로코 병사들은 프랑스 식민 당국보다 더 많은 급료에다 2개월치 급료를 보너스로 준다는 조건으로 징집되었다. 당시 스페인령 모로코는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수많은 모로코 젊은이들이 스페인 반란군에 지원했다.
죽음 만세라는 구호를 만들어낸 호세 밀란 아스트레이
이베리아 반도로 출동을 준비하는 모로코인 레굴라르 타보르
반란군이 스페인령 모로코를 탈취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공화국에 충성을 바치는 장교는 소수에 불과했고, 외인군단 대원들은 반란에 합류하라는 명령에 주저하지 않고 복종했으며, ‘레굴라르’들은 공화국이 알라신을 믿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에 설득되었다. 사실상 아무런 무기도 없고, 원주민들과 유대가 돈독하지 못했던 모로코 내 스페인 노동자들은 곧바로 자신들이 완전히 고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7월 17일 정오경, 모로코의 도시 멜리야에서는 다음날 아침에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400명의 스페인 장군들 가운데 가장 뚱뚱하고,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으로 알려진 공화파의 로메랄레스(Romerales) 장군은 소문에 관련된 장교들을 체포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에 반란군 측 세기(Segui) 대령은 다른 공모자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더 지체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재빨리 움직여 로메랄레스 장군을 치포했다. 세기 대령은 테투안과 세우타에 있는 수비대를 지휘하던 사엔스 데 부루아가(Saenz de Buruaga) 대령과 야구에 중령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라스팔마스에 있던 프랑코 장군도 이 사실을 전보로 알게 되었다.
마누엘 로메랄레스 장군
사엔스 데 부루아가. 내전 중 700명의 왕당파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음날 아침 6시 10분 프랑코가 답신을 보냈다. “영웅적인 아프리카 군대에 영광 있으라. 스페인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그대들과 반도에 있는 모든 다른 동료들과 뜻을 같이하고자 하는 이곳 수비대원들이 보내는 뜨거운 환영의 인사를 받으라. 승리하리라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집시다. 스페인이여 영원하라!” 이 전문은 본토 각급 부대와 발레아레스 제도의 본부, 기병대 대장과 해군 본부에도 발송되었다. 프랑코는 라스팔마스에서 병력을 거리에 집결해 팔랑헤당원들과 함께 주(州)정부 건물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의 지휘권을 오르가스 장군에게 넘기고 배를 타고 떠나 7월 18일 오후 3시경 비행장에 도착했다.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해가 질 무렵 외인군단과 레굴라르 지휘관들은 병력을 다른 수비대 주둔 도시들에 있는 거점으로 이동시켰다. 스페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신속히 점령되고 주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눈에 띄는 즉시 사살되었다. 총파업을 선언했으나 그것은 모로코인 레굴라르들을 거리에 풀어놓자마자 용감한 제스처에 불과해져버렸다. 라라슈에서는 노동자들이 밤새 얼마 되지 않은 무기를 들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세우타에서는 야구에가 이끄는 외인군단 병사들이 두 시간여 만에 공화 정부 군대의 저항을 진압하고 시장을 살해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내내 공화 정부의 모로코 지역 총사령관 고메스 모라토(Gomez Morato) 장군은 도박장에서 도박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아사냐의 조직 개편을 실행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특히 반란군 장교들의 미움을 샀다. 모라토는 마드리드에서 카사레스 키로가가 건 전화를 받고서야 반란 사실을 알았다. 그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멜리야로 갔으나 비행장에 착륙하자마자 체포되었다.
1936년 7월 18일 사살당한 노동자들
고메즈 모라토
18일 새벽 무렵이면 모로코에서 공화 정부군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곳은 고등판무관 관저와 테투안에 있는 공군 기지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두 지점도 몇 시간 후 대포 공격의 위협을 받고 항복했다. 고등판무관과 데 라 푸엔테 바아몬데(De la Puente Bahamonde) 대위를 비롯해 저항을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프랑코 장군은 사촌이었던 데 라 푸엔테 바아몬데의 처형을 허락했다. 하룻밤 사이에 반란군은 189명을 죽였다.
데 라 푸엔테 바아몬데
아랍어를 할 줄 알았던 베이그베데르(Beigbeder) 대령이 모로코 정부의 칼리프 물레이 하산(Muley Hassan)을 찾아가 반란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령은 칼리프에게 공화 정부가 반란군의 명분을 약화시키려고 모로코 독립을 선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모로코 민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공화 정부와의 협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후에 물레이 하산을 중대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이그베데르 대령과 물레이 하산
마드리드의 공화 정부는 7월 17일 저녁에 반란 사실을 알았다. 다음날 아침 정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번 사태가 보호령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임을 밝혀 둔다. 그 외 본토에서는 어떤 지역도, 결탄코 어떤 지역도 이 터무니없는 모험에 가담하지 않았다.” 7월 18일 오후 3시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를 지원하겠다는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모두에게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하고 ‘국가의 군사력을 신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공화 정부 편에 서서 안달루시아 중부 지역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세비야에서 일어난 반란 시도도 이미 진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이포 데 야노는 이미 그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의 신속한 예방 조치로 반란은 이미 소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누구라도 내 승인 없이 무기를 내주는 자는 총살에 처할 것이다.”라며 다시 한번 노동자들의 무장을 거부했다.
케이포 데 야노(중앙)와 호세 쿠에스타 모네레오(오른쪽)
그날 밤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은 라디오를 통하여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국민 총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정부의 발언이 모순과 거짓, 자기 도취의 혼합물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사건 이후로 땅에 묻어 두었던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카사레스 키로가 정부가 사태의 진실을 깨닫기 시작했으나 기본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한 관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내각은 정신병원이다. 그중에서도 광기가 가장 심한 환자는 총리 자신이다. 그는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마치 귀신이 들린 것처럼 소리치고 비명을 질러댄다. 그는 인민들을 무장시키라는 요구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멋대로 무장하는 사람은 쏘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어떤 도시에서 반란이 성공하면 대개는 먼저 시청과 같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건물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곳에 군 수비대가 없으면 치안대 대원, 팔랑헤당원, 사냥총이나 소총으로 무장한 우파 지지자들이 반란군을 구성했다. 반란군이 공식적인 어조로 전시 상태를 선포하곤 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어리둥절한 시민들은 그들이 마드리드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은 반란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하고 자신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라고 주지사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주지사들이 무기 지급을 거부하거나 무기 입수가 불가능했다. 신속하게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지만 반란군에게 저항한 노동자들은 학살당했고, 주지사에서 말단 노조 간부에 이르기까지 반란의 잠재적 적들은 처형되었다. 반면에 군대가 병영에서 뛰쳐나오기를 주저하거나 지체된 곳, 게다가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대처한 곳에서는 대개 매우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노동자들이 지체하지 않고 병영을 공격하거나 포위해서 어렵지 않게 반란자들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쿠데타의 성공 여부에서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요인은 징집된 보병들보다 훨씬 훈련이 잘 되고 제대로 무장하고 있던 준군사 조직들의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부에 충성하느냐, 반기를 드느냐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그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확신을 하지 못했으며, 전투가 처음부터 패배가 분명할 때는 가장 열성적인 자들만이 저항했을 따름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결과에 순종했다. 준군사 조직들은 자주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머뭇거리면서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를 보다가 만일 노동자 단체들이 즉각적이고 단호한 행동에 나서면 대개 공화 정부 편에 섰다. 그러나 치안대는 흔히 얼마 지나지 않아 본모습을 드러냈다. 돌격대와 치안대 가운데 돌격대가 더 정부에 충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도시 무장 병력으로 변해 가는 경향이 있었고, 대도시에는 그들보다 더 준비가 잘 된 노동계급이 있었다.
세비야 시는 반란자들의 전체 계획에서 마드리드 진격을 위한 거점으로서 전략상 매우 중요했다. 세비야의 영리한 참모장 호세 쿠에스타 모네레오(Jose Cuesta Monereo)는 카라비네로 국경수비대 사령관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을 안달루시아의 ‘부왕’으로 등극시킨 쿠데타 막후의 핵심 참모였다. 케이포는 불손하고 냉소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섬뜩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7월 18일 아침 전속 부관과 믿을만한 장교 3명을 데리고 군사 지역의 지휘관 호세 페르난데스 데 비야-아브리예(Jose Fernandez de Villa-Abrille)의 집무실로 불쑥 찾아가 다짜고짜 봉기에 동참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 결정하라고 강요했다. 비야-아브리예가 공포에 질린 채 허둥거리자 케이포는 그를 체포하고 집무실 문 앞에 초병을 배치하면서 그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무조건 쏘아도 좋다고 지시했다.
호세 페르난데스 데 비야-아브리예
그러고 나서 케이포는 산에르메네힐도 보병 부대 병영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제6연대가 완전 무장한 채 도열해 있었다. 케이포는 곧바로 연대장에게 가서 봉기에 합류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연대장이 자신은 정부 편이라고 대답하자 케이포는 사무실로 가서 그 문제를 논의하자고 말한 뒤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연대장을 체포했다. 이어 케이포는 다른 장교들에게 연대를 이끌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장교들의 머릿속에는 1932년에 일어난 산후르호의 쿠데타 실패가 생생하고 강하게 남아 있었다. 결국 팔랑헤당 소속 젊은 대위 한 사람만 자원했고, 케이포의 제안을 거부한 나머지 장교들은 감금되었다.
병영에 도열한 제6보병연대
보병 부대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나서 케이포는 포병 연대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자신을 돕기 위해 찾아온 팔랑헤당원들에게는 병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나누어주었다. 국민 진영에는 케이포가 얼마 되지 않은 병력으로 세비야를 장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케이포는 약 4천 명의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포병들이 일제 사격을 퍼붓자 주지사와 돌격대가 항복했다. 케이포는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한 약속을 내팽개치고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총살했다. 경찰서장은 처형되기 직전 노동자 단체들에 대한 비밀 문서를 케이포에게 넘기면 그의 아내에게 그의 월급을 그대로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문서가 있는 곳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경찰서장이 총살되고 난 뒤 서장의 아내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1936년 7월 18일 세비야의 모습
치안대는 돌격대가 케이포에게 굴복하는 것을 보자마자 반란군 쪽에 가담했다. 노동자들이 대응에 나선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노동자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촉구했고, 주변 농민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했다. 서둘러 바리케이드를 세웠으나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불화로 효과적인 반격이 여의치 않았다. 노동자들은 도시 외곽 노동자 밀집 거주 구역으로 물러나 그곳에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한 케이포는 저항하는 자에게는 가차 없이 폭력을 사용할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내용으로 본토에서 일어난 반란이 이미 진압되었다는 정부 주장을 부인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1936년 7월 18일의 반란은 라디오 방송국, 전화국, 비행장 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최초의 현대적 쿠데타였다.
임시로 세워진 바리케이드
7월 22일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은 라디오 방송에서 자신들이 “당리당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장군들이 원하는 것은 “외세에 의해 전복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마르크스주의 무리들은 이미 공화국의 성격을 변질시켰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 “스페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수중에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이 해방 운동을 맹목적으로, 완고하게 반대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그들을 준엄하게 징벌할 수밖에 없다.”라고 덧붙였다.
말라가 시에서는 노동자들이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만 무기는 지니고 있지 못했다. 노동자들을 이끈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정부 측 병력인 돌격대와 접촉했다. 7월 17일 오후 멜리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경솔한 젊은 장교 아구스틴 우엘린(Agustin Huelin) 대위가 부대원들을 이끌고 도시 중심가로 진출했다. 그들은 도중에 막강한 돌격대 병력과 충돌했고, 양측간에 교전이 벌어져 많은 병사들이 사망했다. 말라가의 고위 장교 팍스토트(paxtot) 장군은 즉각 군대를 움직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수비대의 나머지 병사들은 거리로 행진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지휘관은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병영으로 돌아가게 했다. 치안대를 책임지고 있던 대령은 이 조직으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반란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자마자 부하들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노동자들이 병영을 포위하고 건물 여러 채에 불을 지르자 수비대는 즉시 항복했다.
말라가의 위치
아구스틴 우엘린 대위
시가전 후 말라가의 모습
알메리아 시에서는 주지사가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을 거부했는데, 군대를 자극해서 그들을 전면적 반란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지사는 후에 그때 자신이 원했다고 해도 애초부터 지급할 무기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7월 21일 구축함 레판토(Lepanto) 호가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선장과 입항하고 나서야 공화 정부는 알메리아 항구를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레판토 호의 대포가 치안대 본부를 겨냥하자 치안대는 즉각 항복했다. 포격 위협은 여러 도시에서 결정적 요소로 판명되었다.
구축함 레판토 호
하엔 시에서는 주지사가 좀 더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치안대 지휘관들을 불러 무기를 버리라고 설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화 정부에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저항했지만 결국 주지사의 요구에 따랐다. 주지사는 이어서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에 무기를 지급하여 노동자들을 무장하게 한 다음 도시를 방어했다. 만일 다른 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조치를 취했더라면 분명 더 많은 도시들이 반란군에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 경로가 완전히 무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주지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해군 기지인 카디스 항에서는 바렐라 대령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지역 수비대에게 구출되어 반란을 지휘했다. 그의 군대는 주지사와 급조된 의용군이 지키고 있는 사령부를 공격했다. 시 청사는 또 다른 저항 거점이었다. 그러나 곧 대포가 동원되었다. 다음날 7월 19일 여명이 밝아올 무렵 구축함 추루카(Churruca) 호가 아프리카 군대의 첫 번째 지원 병력을 싣고 도착했다. 이로써 반란군은 안달루시아 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해군 기지를 장악하게 되었다.
구축함 추루카 호
반란군은 또한 알헤시라스(Algeciras), 라리네아(여기서 카를로스파 의용군은 200명 가량의 프리메이슨을 사살했다), 헤레스 등 포르투갈 국경과 인접한 해안 대부분을 장악했다. 진압을 야만적이었다. 당시 열세살 소년이었던 카를로스 카스티야 델 피노 교수는 고향 산로케에서 벌어진 학살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그들은 한 아나키스트 부부(그들의 아들과 나는 학교 친구였다)를 25킬로미터 떨어진 한 마을로 데리고 나가서 총으로 쏘아 죽였다. 나중에 그 처형 장면을 직접 목격한 한 팔랑헤당원이 나에게, 그 부부를 처형하기 전에 처형대에 속한 모로코인 병사 전원이 그 부인을 돌아가면서 강간했다고 말해주었다. 5명의 부상당한 카라비네로들도 병원 침대에서 밖으로 끌려나왔다. 무어인들은 그들의 팔과 다리를 붙잡아 화물차 뒤 칸에 집어 던졌다. 무어인들은 그들을 큰길로 데리고 나가 사살하려다가 부상병들을 일으켜 세우기가 여의치 않자 그냥 그 자리에서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스페인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모로코 레굴라르
그러나 우엘바 시에서는 좌파가 처음 며칠 동안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마드리드의 치안대 사령관은 이 지역 지부 대원들에게 세비야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지부 대원들은 세비야에 도착하자마자 케이포의 반란군에 합류했다.
수도에서는 카사레스 키로가가 7월 19일 새벽 4시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마드리드의 분위기는 밤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동차가 속력을 내며 지나가는 소리에도 ‘이제 마드리드에서도 반란이 시작되었구나’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밤중에도 카페들이 문을 열었고 거리는 소란스러웠다. 시민들이 정부에 느끼고 있던 좌절감과 분노는 무선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뉴스 때문에 점점 더 고조되었다.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은 정부의 기만적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카사레스 키로가가 사의를 표명하자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는 당시 의회 의장이며 자신의 친구였던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마르티네스 바리오는 공화주의 정당으로만 내각을 구성했고, 인민전선 연합 내 좌파 세력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그 조치는 우파와 화해를 모색하려는 새 총리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자유주의적 인민전선 정부와 좌파 세력 간에 결정적 분열이 드러났다.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
그렇지만 마르티네스 바리오는 몰라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평화를 제의했다가 즉각 거절당했다. 몰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마르티네스 바리오씨. 당신에게는 당신의 국민이 있고, 내게는 내 백성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과 내가 합의에 이른다면 그것은 우리 둘 다 각자의 이념과 지지자들을 배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반란군 장군이 총리에게 그 자리에 오르게 해준 유권자들의 대표임을 상기시키는 이 장면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손 놓고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정부의 태도에 격렬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대규모 시위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구성되었다. 전사들은 물밀 듯이 내무부와 전쟁부 청사로 몰려갔다. 그들은 청사 앞에서 ‘반역자! 겁쟁이! 저들은 우리를 팔아먹었다! 저들을 끌어내 쏘아죽여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마르티네스 바리오 정부는 곧바로 붕괴했다. 바리오는 그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불과 몇 분 만에 시위대가 내가 이끄는 정부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권위를 박탈당하고, 이름뿐인 장관들을 둔 나에게 그림자를 가지고 반란 세력에 맞서 싸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의 내각은 불과 몇 시간 동안 존속했을 뿐이었다.
아사냐는 또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대학 교수였던 호세 히랄(Jose Giral)은 공화국 정치가들이 더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유일한 자유주의 정치가였다. 7월 19일 아침 그는 법령을 공표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노동자 조직들에 무기를 내주라고 명령했다. 당시 마드리드 중앙의 광장 근처 카르보네라스 교회에서 약혼녀 롤리타와 미사를 올리고 있던 훌리안 마리아스(Julian Marias)는 그 미사를 끝으로 그 교회에서 1939년 4월까지 미사를 올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미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오자 마드리드는 마치 그 한 시간 동안에 완전히 주인이 바뀐 것처럼 달라져 있었다. 징발된 자동차들이 적색, 혹은 적색과 흑색의 깃발을 앞뒤로 장식하고 창밖으로 총구를 내민 채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인근 코레오 가에 있는 돌격대 막사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호세 히랄. 내전이 끝난 후에는 멕시코에 세워진 망명 정부를 이끌게 된다.
훌리안 마리아스와 그의 아내 롤리타
트럭을 타고 거리를 달리는 노동자의용군
그렇지만 총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주지사들과 관리들도 있었다. 마드리드에서는 정부가 미아하(Miaja) 장군에게 이 지시에 따르도록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해야 했다. 6만 정이 넘는 소총을 트럭에 실어와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 본부에 인계했고, 여기에서 노동자들은 소총에 낀 그리스유를 닦아냈다. 그중에 5천 정 정도만 노리쇠가 있었다. 나머지 노리쇠들은 몬타냐 병영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반란 음모자였던 병영 책임자 세라(Serra) 대령은 물론 노리쇠 인계를 거부했다.
호세 미아하. 나중에 마드리드 방위 사령관에 임명된다.
다비드 안토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폐쇄했던 전국노동연합 본부 안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비좁고 어두운 방 안, 우리는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 외침, 소총, 수많은 소총들,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너무 시끄러워 사람들은 자신이 내뱉은 말도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빨리 조작법을 배우려는 동지들의 소총 노리쇠가 내는 소음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었다.
마드리드의 반란 공모자 사이에 혼선이 있었던 점은 공화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행운이었다. 후에 팡홀 장군이 이 불행한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는 마드리드에서 반란 세력의 수장이 누구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반란에 가담한 장군들은 마드리드를 일거에 장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전략이 팜플로나, 사라고사, 바르셀로나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는 적극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마드리드 공격을 위해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7월 19일 오후 늦게 팡홀 장군이 몬타냐 병영을 방문하여 장교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팔랑헤당원들에게 연설했다. 그러나 병영 밖으로 진출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미 노동자총동맹과 전국노동연합 조합원들이 이끌고 달려온 마드리드 군중에게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군인들은 병영 안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자들의 행동은 군사 작전이라기보다는 의식의 분위기를 띠었다. 밖에서는 반란군에 저항할 것을 요구하는 ‘라 파시오나리아’의 연설이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고, 막사를 포위한 군중들은 차분히 자리를 잡고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