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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마카오를 놓고 벌어진 네덜란드와 포르투칼의 대격전(1)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5.08|조회수1,208 목록 댓글 8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d/Indonesia-CIA_WFB_Map_%282004%29.png?width=570

 

 

제목만 놓고 보면 서양사 게시판에 오를법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아시아 내에서의 싸움과 목적도 동아시아 영역에 관한 일이라 동양사 게시판에 올리는게 적절할듯 합니다.


자카르타는 자와섬의 북쪽에 있는 도시로, 예전의 이름은 바타비아입니다.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즐겨하셨다면 위치는 쉽게 아실 겁니다.

명나라 말기, 그러니까 16세기의 말에서 17세기의 초. 네덜란드에서 출발한 선박들은 거의 지구를 한바퀴 도는 셈으로 이 바타비아까지 밀려왔고, 그곳에 동인도회사 본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나긴 식민지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중국해에 접어들게 되면 네덜란드는 여전히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1611년 일본 히라도에 네덜란드 상관이 개설되었는데, 바타비아에서부터 따져도 이곳은 먼 곳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중국 대륙에 가까운 - 정확히 말하면 대륙에 있는 항구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칼의 마카오처럼 말입니다.

마카오의 위치

명이 쇠퇴의 조짐을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강력하던 가정제의 시대, 1553년에 포르투갈은 현지 관리에게 「짐이 젖어서 육지에서 말리고 싶다」는 구실로 뇌물을 주고 마카오 체류를 인정받았고, 4년 뒤부터는 뇌물을 매년 건네면서 본격적으로 마카오에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1572년부터는 명나라 조정도 매년 500냥의 지대(地代)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거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포르투칼의 군대가 해적을 물리치고 중국으로부터 마카오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이는 포르투칼이 18세기에 이르러서 만든 헛소문이었습니다.



그 후 마카오는 금, 은, 도자기, 아편 등의 중개 무역과 기독교 포교의 기지로서 번영했습니다. 포르투칼은 1년에 한 차례 대형 갤리온 선박에 보석과 사치품을 가득 싣고 일본 나가사키로 출항했으며, 그보다 더 값이 나가는 일본 상품들을 싣고 돌아와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 마카오를 매우 부러워했고 ─ 또 탐을 내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말입니다.



네덜란드는 꾸준히 마카오를 무력으로 빼앗는 방법에 대해서 궁리해왔습니다. 만약 점령한다고 해도 명나라 쪽에서 문제를 이유로 군대를 보내면 방법이 없지만 여러가지 수단에 자신이라도 있었던건지, 20년이 넘게 마카오에 대한 공격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집니다.


1601년 네덜란든 마카오를 선박 두 척을 이용해서 공격하지만, 이 정도 공격은 소용이 없어 무위에 그칩니다. 그해 말에 다섯척의 정크선이 또 공격했지만 포르투칼인들에게 대파당했고, 붙잡힌 승무원 중 나이가 어린 2명을 제외한 17명 전원이 교수형이 되는 신세에 처해졌습니다.



네덜란드는 일이 이렇게 되자 잠시 공격 목표를 마카오 보다 1년에 한차례 있는 대형 갤리선으로 바꾸어, 비브란트 바르비크(Wybrand Warwick) 제독의 지휘 아래 에라스무스(Erasmus) 호와 (틀림없이 이 시점에선 전설인 마우리츠 나사우에게서 이름을 땄을) 나사우(Nassau) 호가 마카오로 출발해 출항 직전이던 대형 갤리선에서 막대한 비단을 강탈해갔습니다. 대비를 못한 포르투칼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607년에는 에라스무스 호를 비롯한 네덜란드의 전함 네척이 마카오에 입항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자신들을 방문해줄것을 요청하고 중국인들과 무협 협상을 벌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 새로 등장한 "오랑캐"에 대해선 심드렁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고, 포르투칼인들은 6척의 전함으로 이 불청객들을 마카오 밖으로 쫒아내었습니다. 네덜란드와 포르투칼의 대립 - 남중국해에서의 네덜란드의 깡패같은 시비 - 는 1609년 12년의 정전 협정으로 일단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물밑에서의 대립은 여전히 컸습니다.



마카오를 바라보는 네덜란드의 시선에는 언제나 아까움과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히라도에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네덜란드지만, 마카오가 포르투칼의 손에 있는한 포르투칼인들이 일본과의 교역을 점점 증대시키는것을 두 눈뜨고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619년에는 영국은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을 견제할 의도로 네덜란드와 협정을 맺었고, 이는 불가침 조약이 끝나기 2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바타비아에서는 네덜란드의 신임 총독 얀 피터루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이 부임해 있었습니다.





대항해시대 게임에서 나오는 안토니 쿤은 아무래도 이 얀 피터루스존 쿤을 모델로 한듯 합니다. 동남아시아가 근거지인것도 그렇고, 네덜란드 인으로 나오는것도 그렇고. 이 쿤 총독은 역시 마카오를 제압하는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카오를 점령하면,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매우 값비싼 중국산 비단을 광저우에서 직접 구매할수 있을테고, 일본 현지 및 유럽 고객들과 거래할 물품을 사들이는데 드느 비용을 대폭 절감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이익과 별개로, 남중국해와 동아시아에서 포르투칼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들의 영역을 저 멀리 인도 정도로 국한해버리는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덤으로 에스파냐 령 필리핀으로 비단을 싣고 가는 배들을 습격하기에도 마카오는 괜찮은 지역이었습니다.



1621년 마침내 포르투칼과 네덜란드의 정전 협정은 종료되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로 보아 본국에서는 다시 한번 정전 협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지만, 쿤은 이 기회에 일을 벌이기로 작정합니다. 세부 사항을 조율하고 재협정이 체결되는데는 몇개월이 걸릴테고, 다시 서유럽에서 이 동남아시아와 극동의 남중국해에 소식이 전해지는데만도 또 몇개월이 걸릴 것입니다. 혹여 본국에서 적대 행위를 문책을 하는 관리들이 오더라도 쿤으로서는 '미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고 발뺌하면 그만이었습니다.



1622년 쿤은 마카오의 방어 상태가 매우 부실하다는 서한을 중간에서 가로채 정보를 얻고, 곧바로 1월 21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이사들에게 "1,000명의 병력이면 마카오를 점령하고, 또한 전세계를 상대로 지킬 수 있을것." 이라는 보고와 함께 "만일 지금의 기회를 놓치고 머뭇거리면, 포르투칼인들은 뇌물을 듬뿜 먹인 중국인 관리들에게 마카오 내에 강력한 방어용 대포의 추가 배치를 허락 받을것." 이라는 위협적인 내용도 덧붙였습니다.



쿤은 몸이 달아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포르투칼인들은 마카오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있다. 지금을 노려야 한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포르투칼인들은 마카오의 방어 시설이 부실하다는것을 통감했고, 어떻게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국인들에게 "마카오가 강력하게 지켜져야만 저 네덜란드 인들이 감히 중국을 노리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을 하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문제는 중국인들은 이 '오랑캐 무리' 들의 대립에 대해서 여전히 심드렁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File:Ming-Empire2.jpg


조금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기 위하여 부패한 명나라의 관리에게 아주 막대한 양의 뇌물을 바치며 포르투칼인들은 고생했지만, 이 당시 명나라의 중국인들은 그깟 마카오 따위의 문제에 신경을 쏟을 겨를이 못되었습니다. 당시 남중국해의 유럽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만, 명나라는 산해관 너머 만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1619년 후금의 아아신기오로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薩爾滸之戰)에서 압도적인 명나라의 군대를, 기동력을 앞세운 각개격파 전술로 물리쳐 대승을 거두고 요동에서의 영향력을 엄청난 속도로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명은 이 새로운 적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이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고, 심지어 이 마카오의 이방인들에게까지 도움을 구했습니다. 1621년 10월, 명나라의 황제는 관리를 보내 만주족을 상대할 병력 100명과,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할)대포를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들로 하여금 최신 대포의 사용법에 대한 도움을 구했습니다.



포르투칼인들은 전혀 생소한 적들에 대한 문제로 자리를 많이 비웠고, 이는 안 그래도 허약한 마카오의 방어력이 더 안좋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쿤은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첩자의 정보에 따르면, 마카오의 방어병은 총병 50여명 외에 현재는 은퇴했지만 무장은 할 수 있는 퇴역병 100여명 정도에 불과했던것입니다. 쿤의 말대로 1,000명의 병력이 마카오를 공격한다면, 승리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를 찾지 못한 쿤은 코르넬리스 레이예르센(Comelis Reigersen)을 함장으로 삼고 지어릭제(Zierukzee) 호, 그뢰닝헨(Groenungen) 호, 오우트 델프트(Oudt Delft) 호, 엔추이젠(Enchuyzen) 호, 데 갈라이스(De Gallias) 호를 맡겼고 여기에 포획했던 영국 군함 베어(Bear) 호 및 요트 성 니콜라스(St Nicholas) 호, 팔리카타(Palicatta)호 등 8척의 선함을 맡겼습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선원들과 몇명의 영국인, 네덜란드 령 향료제도 출신의 반다(Banda) 인들, 인도 구쟈라트(Gujarat) 수병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승선했습니다. 함도는 바타비아를 출발해 인도차이나 해안을 거슬러 6주동안 올라갔고, 하안(Haan) 호, 타이거(Tiger) 호, 빅토리아(Victoria) 호, 산타 크루즈(Santa Cruz) 호 등이 판 니옌로드(van NIGENROODE)의 지휘 아래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으로 가고 있던 요트들이었습니다. 다시 마카오 근처에서 이 함대를 해상에서 기다리던 트로네프(Tronew) 호와 호프(Hoop) 호가 추가로 합류했습니다.



사실상 네덜란드는 남중국해에서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전력의 대부분을 내어본것이었습니다. 선원 병력은 600명 정도의 유럽인들이 있었고 흑인, 일본인, 동남아시아인등 가지각색의 다른 인종 200여명이 합쳐져서 도합 800여명을 웃도는 수준으로, 당초에 쿤이 생각해던 1,000명 정도는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규모이긴 했습니다.


1622년 6월 22일, 마침내 이 함대는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함장 레이예르센은 우선 3명의 선원을 중국인들에게 보내 협조를 구했습니다만, 중국인들의 거센 반발에 선원들은 마을에는 발도 대지 못하고 쫒겨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포르투칼은 이 침입자들의 소식을 알게 됩니다. 23일이 되자 레이예르센은 우선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 해안 요새로 그뢰닝헨 호와 데 갈리아스 호, 베어 호를 보내 저녁을 틈나 요새 포격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포르투칼인들은 대응 포격을 했고, 한참동안 교전이 벌어진후 네덜란드의 전함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4일이 되자 그뢰닝헨 호와 데 갈리아스 호는 다시 돌아와 요새에 또다시 포격을 가했습니다. 포르투칼도 대응을 했고, 전황은 포르투칼 쪽이 유리했는데 요새는 별 타격을 입지 않은 반면에 데 갈리아스 호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레이예르센의 계략이었습니다. 이 정도 피해는 처음부터 예상한 레이예르센은 카시야스(Cacihas) 해안 모래사장에 주력을 이동시켰는데, 그곳으로 습기에 찬 화약통 하나를 떠밀어 보낸것이었습니다. 화약통이 곧 시커먼 연기를 내뿜자 이를 신호로 레이예르센과 32척의 소형 보트는 해변으로 접근하였습니다.




현명하게도 포르투칼 인들은 전방의 포대 외에 카이야스 해변에도 병력을 주둔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60여명의 총병과 90여명의 퇴역병들은 안토니우 로드리게스 카발리뉴(Antonio Rodrigues Cavalinho) 부대라고 하였는데, 카발리뉴 부대는 레이예르센의 기습 공격을 알아차리고 보트에 미친듯이 일제 사격을 가했습니다. 레이예르센은 휘하의 병력을 양 옆으로 넒게 포진하여 응사하였고, 상륙 부대와 엄호 부대는 탄환을 재장전한 소총으로 바꿔들고 계속해서 교전에 나섰습니다.



이때, 모래톱 위에 몸을 숨기고 땅위에서 안정적인 사격을 할 수 있었던 포르투칼 병사들은 우위를 점했으나, 반면에 흔들리는 보트 위에서 사격을 하던 네덜란드 병사들은 재미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 1차 교전에서 포르투칼 병력은 단 한명의 사상자도 없었지만 네덜란드는 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쿠크(Cook) 선장이 팔을 다치는가 하면 레이예르센 본인도 배에 총상을 입어 후방으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피해를 겪으면서도 네덜란드 보트들은 해안가에 접근하는데 성공했고, 해군 출신은 아니지만 플랑드르와 인도 등지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한스 루핀(Hans Ruffijn)이 지휘에 나섰습니다. 네덜란드 병사들은 포르투칼 병사에 비해서 무려 6배나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루핀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 군은 점점 해변의 모래사장을 장악해나가며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포르투칼 병사들은 열세를 인정하고 우선 도주하였습니다. 네덜란드가 카시야스 해변을 접수한 것입니다.



포르투칼 인들은 카발리뉴 부대의 후퇴에 대해서, 이는 순전히 지연 작전이며 아군이 더 이상 위치를 사수할 수 없으면 후퇴할 계획이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반면에 네덜란드는 후퇴한 이들을 조롱했는데, 이 포르투칼 병사들이 겁을 먹었다고 조롱한 그뢰닝헨 호의 선장 본테쿠(Bontekoe)는, 정작 치열한 상륙작전이 벌어질때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포격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 인들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이때문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전황은 순식간에 변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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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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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海東天子☆ | 작성시간 12.05.09 글쎄요...ㄲㄲ 끝이 없는 넓은 땅덩어리와 모래알 같이 많은 인민들을 거느린 [중화]의 입장에서, 꼴랑 수천의 양귀들이 경사인 북경에서 만리 떨어진 광동 변방에서 소소한 '소요'를 일으킨 것이 뭔 깽판인지요?!...ㅋ 적어도 아편전쟁 정도는 되어야 깽판급에 들 수 있을 거고, 제2차 아편전쟁까지는 가야 양이들의 위력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만...^^;

    오히려 중국본토 광동 구석탱이가 아니라 [남중국해]가 더 큰 문제였지요. '서양(西洋이라고 쓰고 동남아라 읽는다)'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재부를 싹다 털리는...-_-;
  • 작성자제대군인 | 작성시간 12.05.08 정말 다음내용이 기대되네요.
  • 작성자보한재 | 작성시간 12.05.08 다음내용이 기대되네요
  • 작성자Happiness | 작성시간 12.05.09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게 봤습니다~
    2탄이 기대되요~^^
  • 작성자jowlaw2 | 작성시간 12.05.09 중간 스샷에 간첩이 있는것 같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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