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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9) ─ 악화되는 정세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19|조회수860 목록 댓글 4



 이 녀석의 이름은 Desert tortoise, 문자 그대로 사막 거북입니다. 그렇다고 진짜 모래밖에 없는 사막에서 사는건 아니고……


 앞서 오삼계가 풍주 등을 점령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군이 풍군에 도착했을 떄, 갑자기 오삼계가 타고 있던 수레에 우레가 내리치면서 수레를 몰던 사람의 의복과 모자가 전부 불타 버리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천하의 오삼계도 벼락 앞에선 정말 깜짝 놀라, 주위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한 언급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자, 현지의 어떤 사당에 크기가 엽전만 흰색 거북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거북이를 이용해서 길흉을 점친다는 이야기를 듣자, 흥미가 동한 오삼계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거북이에게 길흉을 물어보았습니다. 중국 전역을 그린 지도 위에 올라간 거북이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고, 오삼계 역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거북이는 조금씩 기어가더니 장사, 악주 사이에서 머물기만 했습니다. 그러더니 운남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세번을 다시 했는데도 계속 거북이가 운남으로 가자, 오삼계는 자신의 구상이 하늘에 뜻에 맞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삼계가 생각하는 구상이란, 자신이 운귀를 근거지로 삼고, 장강 남안을 점령하여 조정과 화의를 하여, 천하를 둘로 가르려는 계획으로 이른바 한 고조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둘로 나누려던 것을 본 받으려는 구상이었습니다. 오삼계가 이런 판단을 내린것은 우선 북경에 있는 아들, 오응웅을 돌려 받고 싶었고, 또 다른 이유는 만주 군대의 실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오삼계는, 화북에서 100%의 힘을 발휘할 만주 기병의 무서움에 대해 몹시 경계했습니다. 오삼계는 북경의 강희에게 보낼 서한을 준비했습니다.


 당초에 강희는 이 서한이 오삼계가 항복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받아 보고 나니 항복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삼계의 모든 요구를 거절했고, 오삼계의 아들에 대해서도,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하였습니다. 사실 당초에 강희는 오응웅에 대하여 관대하게 용서하여 자신의 아량을 보이고자 했으나, 의정왕대신회의가 반대하였습니다. 게다가 오삼계의 적대적 행위가 노골화 되어 협상의 카드로도 별 의미가 없었고, 무엇보다 오응웅 본인이 일부러 북경에 변란을 일으키려 화재를 저지르는 모습도 있었기에 그는 처형되었습니다. 능지처참이 아닌 교수형이라는 점에서, 이는 가장 관대한 처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가 식사를 하던 중에 전달되었습니다. 오삼계는 정말 깜짝 놀랐고, "놀라 죽은 사람 같았" 습니다. 이제 오삼계가 쓰러지나 강희가 쓰러지나 둘 중 하나는 무너져야 결판이 나게 되었습니다.



강희제의 전략적 딜레마

 
  오삼계의 반란이 명확해지고, 이에 대하여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을 결심을 한 강희에게 있어, 가장 증오스러운 적은 물론 오삼계 그 자체입니다. 오삼계의 반란이 그러나 복잡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일개 군벌 세력의 반란이 아닌, 경우에 따라서 반청세력 ─ 즉 명나라 유신들과, 또 소수민족 등이 연계가 될 수 있고, 가장 두려운 것은 이 싸움이 한족과 만주족의 대결로 흐르는 일입니다. 중화 제국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수억명의 한족들이 한번 일어나 발을 구른다면, 만주족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떤채 과거의 몽골처럼 북쪽으로 달아나야 할 것입니다.

 강희의 본능적인 정치적 직감은 이 사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는 전투가 시작하고, 8년에 걸쳐 전쟁이 마무리 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싸우고 있는 대상이 '수천 수억 명의 한족' 과, '구시대 명나라의 망령' 이 아닌, 어디까지나 '반역자 오삼계' 개인으로 한정지었습니다. '반란군' 이 아닙니다. 강희는 끊임없이 대상을 '반역자 오삼계'로 한정지었습다.

 그렇다면 반란군이 아닌 반역자 오삼계만을 노린다는것은 무슨 뜻인가? 강희는 못된 반역자 오삼계의 꾀임과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대역죄인 오삼계의 협력자가 된 '반란군' 에 대해서, '오삼계에 동조한것에 대해' 연좌 처벌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킨 뒤, 그에게 협조를 하게 된 현직 관리, 혹은 퇴역하여 머물고 있다가 오삼계에 붙은 퇴직 관원, 이 모두는 "마음에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연루된 것 뿐." 이라는 것인비다. 강희는 이부와 병부에 명을 내려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오삼계의 반역과, 너희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록 부자 형제가 운남에 있어도 연좌 처벌하지 않을 것이니, 각기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직무에 충실하여 근심을 품지 않도록 하라."

 "각기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켜 위협에 넘어가지 말고, 혹시 잘못해서 적의 무리에 따랐으나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면, 모두 이전의 일을 용서해 주고 죄를 묻지 않겠다."

 또한 반란군에게 함락된 지역의 백성들이나 관원들이 변발을 자른 일도 그렇습니다. 청나라는 변발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즉결 처형으로 이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현 상황에서 변발을 자르는것은, 오삼계의 주륙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쌍히 여길 만하니, 특별히 관대하게 허락하여 자수 등을 허가 하고,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일단 반란군에 협조하게 된 관원들이나 백성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강희는 "반란 세력 그 자체" 에 대해서도 이러한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일은 오삼계와 "강경파" 가 꾸민 일이라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용서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오삼계가 이 전쟁을 원할하게 이기려면 대상을 끊임없이 확장해야 합니다. 반면에 강희에게 있어서 주어지는 일은 명확했습니다. 사태를 계속해서 축소시키고, 일을 오삼계 개인의 멍텅구리 같은 야욕으로 꾸미면 될 일입니다. 즉, 소위 삼번의 난이라는 주체에서 강희가 진심으로 적이라고 여기는 대상은 오삼계의 번 하나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상가희의 번, 경정충의 번은 근본적으로 적이 아니었습니다. 강희는 그들을 회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한 감자로 여겼으며 이러한 태도로 인해 '삼번의 난(三藩─亂)'은 실질적으로 그저 오삼계의 번, 강희가 옥좌에 앉아 있는 청조의 대결이었으며, 상가희의 번과 경정충은 그들 주변에서 오락가락하는 주변 세력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강희가 상가희나 경정충에 대해 명확하게 적대적인 태도 ─ 그들이 보이는 기만적 태도와 노골적인 적대 행위에 분개하여 ─ 를 드러냈다면, 결국 구석에 밀린 두번은 적극적인 반란 주체 세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희가 대상을 오삼계로 한정지음에 따라,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결정에 따라 오삼계와 강희를 오갈 수 있는 세력이 되었고, 이는 오삼계에게는 타격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다른 두 번은 결코 오삼계의 협력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지금 당장은, 청조의 협력자도 아니었습니다. 강희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경정충의 일이었습니다.


 오삼계의 초기 진격은 1674년 3월까지 이루어진 싸움이었고, 이후 3개월이 넘게 그는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습니다. 이 동안에 다른 두번에 대하여, 강희는 긴밀하게 움직임을 취했습니다. 우선 당연히 두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평남과 정남 두 왕의 철번은 정지되었습니다. 강희는 1674년 정월에 복건에 여러차례 명을 내려 경정충에게 의사를 표시했습니

"원래의 지방을 고수하라. 근거지를 옮길 필요가 없다."

 다시 이틀 뒤에 강희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보내, 정남왕 경정충이 관할하던 관병을 계속 관리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조치는 굉장히 시의적절한 것이었는데, 사실 이 당시 경정충은 대만 정씨 왕조의 정경과 더불어 오삼계에 호응할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부하 황용(黃鏞)을 대만에 보내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물론 경정충에게 미모의 무림 여고수가 있었던것은 아닙니다.

 "(왕께서는) 홀로 충성스럽게 해외에서 정삭(正朔)을 받들고 계시고, 저는 분투하여 중원에서 대의를 들어 하늘과 사람에 응하고, 신속히 선박을 정돈하여 오늘의 강토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군대를 협력하여 함께 만고의 위업을 이루고자 합니다."

 대만의 정씨 왕조는 정성공 사후, 열렬한 복명(復明) 세력도 아닌 어정쩡한 해양 군벌 그 이상의 의미는 없지만, 만약 청조의 위기를 틈타 중국 본토에 근거지를 마련한다면, 다시 선대의 업적을 재현해볼만은 했습니다. 정경은 이 제안에 크게 기뻐했고, 10월 무렵에는 팽호 열도로 군대를 이끌고 좀 더 명확한 제안이 올때까지 기다려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온 강희의 이 제안에 경정충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다시 황용을 보내 행동을 연기하고 좀 더 기회를 살펴보자는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또한 복건 총독 범승모는 병부에서 내려온 지령에 따라, 이 위험한 감자를 좀 더 긍정적으로 대해보기 위하여, 철번을 하던 도중 자신의 관할로 들어온, 본래 경정충 번 휘하의 좌우양익 7000여 관병의 지휘권을 본래의 소유자, 경정충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친절에 대한 경정충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는 접수를 거절했습니다. 범승모가 여러차례 권하였으나, 이미 의심이 단단히 생긴 경정충은 계속해서 반대의사만 표명했을 뿐으로, 결국 범승모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고스란히 실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병부의 비밀 지령을 받들어, 병력을 넘겨주어야 하고, 또한 왕도 황제의 명을 받들었으니 (군사를)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경정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로소 군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경정충은 범승모가 자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계속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근원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와중에 복주의 저잣거리에서 이상한 소문과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우화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풀이를 해보면 경정충이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였고, 그 소문을 들은 경정충은 밤낮으로 궁리한 끝에 '하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거병 반청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사흘 동안 병사들의 갑옷을 입히고 자신도 무장했습니다. 또한 범승모가 있는 총독부는 계속해서 감시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범승모는 이러한 기류를 분명하게는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누치챘고, 갈등을 완하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다독이는 한편, 직접 경정충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가 경정충의 집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 장수들이 살기 등등하게 도열하고 있었고, 경정충은 몹시 노기를 보인채 범승모를 꾸짖었습니다.

 "나를 언제 제거할 것입니까.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승모는 무슨 뜻인지 모른척 하며 넘어갔고,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경정충이 일을 저지르는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총독부의 군사는 2,000명에 불과하였는데, 경정충은 그 즉시 동원할 수 있는 군대만 1만여 명을 훌쩍 넘으니 상대조차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범승모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몰래 다른곳의 관병을 불러 모으려고 했지만, 경정충이 조금 더 빨랐습니다.

 1674년 3월 15일, 경정충은 해적이 왔다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순무 유병정, 총독 범승모를 모두 불렀습니다. 직감적으로 범승모는 흉계를 눈치채고 무장하여 방어할 것을 요구했으나, 유병정은 어차피 중과부적이므로 어떠한 방어도 무익하다면서, 차라리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왕부로 향했는데, 왕부 안에 살기가 가득했고, 즉시 병사들이 튀어나와 그 둘을 잡았습니다. 유병정에게 경정충이 항복을 권유하려고 하는데, 범승모는 유병정을 걷어차며 소리쳤습니다.

 "적이 살육되는 날이 멀지 않았으니, 내가 먼저 그 혼백을 빼앗으리라!"

 경정충은 자신의 아버지 경계무가 처음 삼번을 세울때 오삼계와 협력했다고 말하면서, 그와 같이 움직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즉시 오삼계를 본받아 변발을 자르고, 명나라의 관모를 쓰고, 사방에 청나라의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하겠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경정충의 말입니다.

 "명나라의 문물을 함께 받들어, 나라를 되찾고, 천하와 함께 호걸을 기다린다. 중원을 함께 평정하고, 화이(華夷)의 관상(冠裳 : 관리의 예복)을 회복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고 폭정과 가렴주구를 없애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적게 하는 바 힘쓴다. 고통이 일어나도 행복은 다시 찾아온다. 우리 사신(士紳)과 병사와 백성들은 본 번부가 백성을 위로하고 죄 있는 통치자를 벌하려는 마음을 널리 헤아려 먼저 귀순하라. 마땅히 분별하여 등용하며 은혜를 더할 것이니 우리를 거슬러 행동하여 스스로 주륙을 당하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라."

 그와 동시에 복건 전역을 자신의 관할아래 두고, 정경에게 호응을 권하며, 오삼계에게 강서로 진군하여 연합 작전을 하기로 제의했습니다. 절강과 강서로 출격한 그의 부대는 순조롭게 진군하며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듭했습니다. 관군이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고, 내부에서 반역자가 호응하여 성을 넘겨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경정충의 반란은 청나라 조정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태를 확장시키지 않으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가희 번 역시 호응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 상가희는 오히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상가희의 망나니 아들, 상지신이었습니다. 


경정충이 발행한 유민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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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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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08.20 황용! ㅋㅋㅋㅋㅋㅋ 매번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강희제의 정치적 감각은 정말 탁월하네요...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08.20 미모의 무림 여고수 황용ㅋㅋㅋ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8.20 미모의 고수가 누군가 했는데 ㅋㅋ 황용 이름 오랫만에 듣네요.
  • 작성자사생 | 작성시간 12.08.20 읽다보니 녹정기가 자꾸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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