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22) ─ 서북 평정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22|조회수862 목록 댓글 5



남부 전역

 장사 전투

 도해가 서북으로 파견되고 상지신이 아버지 상가희를 치던 시기의 정확히 1년전인 1675년 2월, 강희는 병부에 명령하면서, 오삼계가 악주, 풍주등을 점령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오군의 수군이 끊임없이 장사에서 출발하여 동정호를 타고 악주로 운반, 군량을 풍부하게 공급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 안친왕 악락(岳樂)에게 명령, 정예병을 거느려 강서에서 출발해 장사를 공격하여, 오삼계 반란군의 식량 운반로를 막고, 악주를 협공하자는 전략을 내놓았습니다.


 안친왕 악락은 그러나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강서 각지는 아직도 반란군이 소요를 일으키고, 민심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군사를 호남으로 이동하면 강서의 병력이 부족해지므로, 우려 할 만 합니다. 응당 먼저 강서의 반란을 평정하여 후환을 없애고, 이후에 군대를 나누어 요충지를 방어하고 군사를 호남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강희는 이에 대하여 또박또박 반박했습니다.


 "오삼계가 오랫동안 호남을 점령했기 때문에 이를 틈타 간사한 도적 떼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운남, 귀주, 사천, 복건 지역이 함락되고, 광서 및 섬서의 역적이 창궐하게 된 것이다. 호남에서도 한 귀퉁이에서 적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도적 떼들이 관망하고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오삼계를 무너뜨려 호남을 안정시키면 각자의 도적 떼들은 자연히 흩어지게 되어있다. 호남을 진격하여 점령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재론하지 마라."


 9월, 공격 명령이 떨어졌고, 11월 준비를 다 끝낸 악락은 호남으로 출정했습니다. 강희는 녹기병 3,000명과 2,000여명의 병사를 또다시 보내어 악락을 지원했고, 아담 샬이 만들었던 화포 20구를 현지로 운반시켰습니다. 마침 복건에 있는 경정충 세력의 여러 총병들이, 만일 관군이 강서에서 복건으로 진군한다면 내응할 예정이라고 악락에게 전하자, 악락은 이 이야기를 강희에게 전하면서 복건으로 가는것이 더 낫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악락은 장사로 계속 진군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악락은 또 꾸물거리는데, 상가희가 마침 한참 광동 동쪽의 변란으로 어려웠던 처지라, 악락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희는 광동 동쪽을 거쳐 호남으로 진군하면 돌아서 가게 되므로 기일에 맞출수 없고, 또 오삼계 주력을 견제하면 그런 자잘한 세력들은 금세 사그라들것이라 말하면서 악락에게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전했습니다. 대신 간친왕 나포(喇布)를 보내 상가희를 약간이나마 도와주려는 모습은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형주에 주둔해서 머뭇거리만 하는 늑이금도 질책했습니다.


 "너희가 형주에 주둔한지 2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군영을 지키고 자신만을 지키는 데 급급할 뿐 조금도 나아가지 않는다. 현재 안친왕이 장사에 진군하고 있는데, 만일 군사를 보내 협공하지 못할 경우, 오삼계는 형주와 악주의 병력이 움직이지 않음을 알고 장사를 사수할 것이므로, 너희들이 군기를 거스르는 죄는 더욱 커지게 된다."


 이 당시 오삼계는 17만 대군 중에 7만을 악주와 풍주 등지에 주둔시켜 형주의 군대를 막게 하고, 병사 10만은 장사, 평향 등에 주둔시켜 강서의 군대를 방어하려고 했습니다. 악락은 2월 경 평향에 당도했는데, 이 당시 평향을 지키는 오군의 장군 하국상이 또다른 대장 한대임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고 진영에서 여자들을 끼고 사니 군대의 사기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악락은 한족 군병을 앞세워 진격했고, 적군 1만명을 참수했습니다. 하국상은 도망쳤고 악락은 곧바로 진동해 장사를 포위했습니다. 하남이 진동하였습니다.


 강희는 장사 싸움을 중요하게 여기고 군대를 계속해서 천단위로 지원을 했고, 오삼계 역시 몹시 놀라 이를 막으려 했습니다. 하남의 오삼계 본대는 경정충이나 왕보신의 부대와는 달리, 경험이 대단하고 전투력이 엄청나 관군을 압도하는 군대였습니다. 


 3월, 드디어 오삼계 군과 악락 군대가 장사성 외곽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서로 19로(路)를 보내 수십리를 이어지며 겨루었습니다. 오삼계 휘하 장수 왕서(王緖)가 군사를 이끌고 적 진영을 함락하려고 했는데, 관군에 의해 여러 겹 포위되어 기치도 모두 부러지고, 사람들은 모두 이 부대가 끝장났을 것이라 여겼는데, 놀랍게도 왕서의 군대가 포위망을 짖이겨 버리고 관군을 격파하고는 귀환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오삼계 부대의 가공할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습니다.


 이때, 오삼계의 조카인 오국귀가 화살을 맞아 말에서 떨어졌고, 하국상이 달려들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관군은 그들을 급히 추격해서 공격하려고 했는데, 성 가까이에 오자, 실로 믿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코끼리들이 나타났습니다.



 오삼계가 언덕 아래에 숨겨놓았던 큰 코끼리들이 맹렬하게 진격했고, 관군은 그야말로 기겁하여 싸움도 포기하고 달아나서, 추격하고 도망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습니다. 다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고, 서로가 피를 어마어마하게 흘리며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투가 종결되었습니다.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 뒤, 오삼계는 당분간 성에 들어가 방어하며 싸우려고 하질 않았고, 관군도 성을 포위하고 다시 싸우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강희는 이때 발상의 전환을 했습니다. 오삼계가 장사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으니, 이 틈에 악주를 공격하는 기동력을 보인다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꾸물대는 대장군 늑이금을 재촉하여 1676년 3월 18일 진격을 하게 했고, 실제로 동정호에서 오삼계 반란군을 연거푸 물리치며 그들을 밀어부쳤습니다. 계획대로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진격을 하게 한다면, 예주, 상덕, 상음 등을 쉽게 수복하고 장사를 협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늑이금 등은 겁을 집어먹고 더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오삼계는 전열을 정비, 반격을 하도록 했고 늑이금은 피해가 심해지자 폭염을 구실로 형주로 달아났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고, 늑이금은 당연히 강희에게 죄를 청했습니다. 강희는 늑이금이 헛되이 군사를 소모하고 3년동안 아무것도 한게 없다고 매우 비난하고, 당장 죄를 물어야 하나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잠시 원래의 직분을 그대로 두고, 적극 노력해서 속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또한 이 당시 오삼계는 장사에 대한 포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따로 수만명의 병사를 강서의 길안으로 진군시켰는데, 강서의 전투를 지휘하던 간친왕 나포는 군사를 지원해 이를 구원하지 않고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길안이 함락되자, 참고 있던 강희도 너무나 화가 나서 불같이 성질을 내면서 나포 등을 재촉해 길안을 수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나포는 본인은 직접 가지 않고 장군 합이합제 등을 따로 보내었고, 합이합제도 길안에 이른지 수개월동안 조금의 공적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오삼계 군대는 더욱 기세를 타고 예릉 등을 함락시켰습니다.



 서북전역

 답답하기 짝이 없던 남부 전역과는 달리, 서북 전역은 1676년 5월 도해가 현지에 도착하자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도해는 도착하자마자 상벌을 분명히 하고, 군기를 바로잡아 병사들의 용기를 되살렸습니다. 용기를 되찾은 장수들이 나가서 싸우기를 원하자 도해는 거절했는데, 이전의 지휘관들처럼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싸워서 함락시키면 점령전 도중에 백성들이 수난을 당할것이 염려스러웠습니다.


 도해는 우선 적의 식량 운반로를 끊어버리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왕보신이 주둔하는 평량성 북쪽에 호산돈이라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은 성 아래를 전부 내려다 볼 수 있고 서북으로 통하는 식량 운반로의 길목이었습니다. 왕보신은 그곳에 1만의 병력을 주둔시켜 방비하고 있었는데, 도해는 이쪽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반란군은 앞은 보병, 뒤는 기병을 배치하고, 화기를 이용해 도해의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도해는 관군을 지휘하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진군을 시작했고 아침부터 엄청나게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오시가 되었을 무렵, 관군은 반란군을 대부분 살해하거나 절벽에 떨어뜨려 죽이고 승리했습니다. 


 일단 호산돈을 점령하니, 평량성이 아래로 그대로 보이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도해는 언덕 위에서 대포를 마구 성 안에 발사했습니다. 실질적인 타격보다도, 성 안으로 포격이 가해지며 병사들이나 백성들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대단했습니다.


 이쯤 되자 왕보신도 상황이 어렵다는것을 느꼈습니다. 세력은 이미 많이 약해졌는데, 이전에 동액 등이 워낙 꾸물거려 그 틈을 이용해 재기를 노렸지만 도해가 워낙 단호하게 움직이고, 무엇보다 식량 운반로가 끊기자 버틸 도리가 없었습니다. 도해는 적을 구석에 몰아넣은 다음, 바로 그 직후에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도해의 참모로 있던 선비, 주창이 왕보신 휘하의 총병 황구주라는 사람과 동향인이었는데, 주창은 황구주를 이용해 왕보신의 투항을 권유했습니다.


 "공은 이전에 폐하를 알현할 때 도해와 면식이 있었다. 일단 그를 볼 수 있으면, 일이 해결된다."


 왕보신은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와서 볼 수 있으면 가능하다."


 정황을 전해들은 도해에게 주창은 스스로 자신이 나서서 성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했고, 용감하게 평량성 내로 들어가 왕보신을 설득했습니다. 마음을 정한 왕보신은 자신의 부장을 나가는길에 딸려보내 도해에게 엎드리게 해서 투항 의사를 보였습니다. 도해는 강희에게 이 일을 전했고, 모두 용서하라는 승락을 받은 후 성내에 식량을 지원했습니다. 평량의 군민들은 싸움이 이제 끝나게 되었음을 알고 모두 역적의 혐의를 벗은 일을 기뻐하면서, 서로 축하했습니다. 백성들의 잔칫분위기 속에 왕보신은 오삼계가 준 칙인을 도해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왕보신이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자, 도해는 자신의 조카를 성안으로 들여보냈고, 왕보신은 그때가 되서야 도해의 진심에 감동받아 의심을 풀고 직접 도해의 군영에 이르렀습니다. 도해는 왕보신을 보고 역적 행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얼굴이 이렇게 수척해지다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왕보신을 껴안고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왕보신도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도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국가를 저버렸는데, 조정이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도해는 즉각 칼을 꺼내 왕보신에게 상처를 내고,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전과 전혀 다름이 없음을 보장했습니다. 왕보신은 매우 기뻐해서 군영에서 머리를 잘라 변발을 했고,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왕보신이 항복함에 따라 서북에서 임약하던 다른 반란의 무리들도 자연스럽게 소속 군사를 이끌고 연이어 투항했습니다.


 속터지는 이야기만 듣다가 이런 승전보를 들은 강희는 정말 뛸듯이 기뻐했습니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게 도해를 칭찬했습니다.


 "은혜와 위엄을 선포하고, 위무와 토벌을 함께 시행 했으며, 전략이 치밀하고 배치가 신속하여, 평량 일대를 단기간에 평정했다. 우대하여 관품을 수여하도록 하라. 왕보신은 죄를 뉘우치고 투항했으므로 원래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태자태보를 더하며, 정해 장군으로 임명하여 도해를 따라 한중에 주둔하고 공을 세워 속죄하라."


 또한 오삼계가 징발하여 전쟁에 참여한 묘족의 소수민족 부대에 대해서도, 눈꼽만큼의 죄도 묻지 않고 오히려 하사금을 주어 가속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우선 위급했던 서북의 형세가 수습되었습니다.


 서북의 전투를 보면 도해가 신속하게 행동하자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왕보신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그러하지 못해 싸움이 길어졌습니다. 강희가 처음에 중임을 맡긴 일부 대장군 및 장군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편안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던 왕공 및 귀족들이었고,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 대처할 만한 훈련을 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전쟁의 실제 경험조차 없었습니다. 오삼계 반란군이 맹렬하게 진격하는 긴박한 상황하에서도, 그들의 행동이란 대단히 지지부진했습니다.


 이때의 경험 탓인지, 강희는 훗날 준가르 정벌전에서는 주위에서 강희제가 몹시 좋아하는 사냥 계획을 짜서 그를 말려도 듣지 않고, 직접 출정을 하여 온갖 고생을 하여도 이를 견뎌내면서 싸웠습니다. 준가르와의 싸움은 훗날 좀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다음은 강희가 1697년 4월 17일, 가장 신임하였던 환관인 태감 구원싱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구태감에게 유하노라. 지난번에 짐은 '반드시 가르단 반역도를 제거하려 마음 먹었는데, 이는 허튼 소리가 아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가르단은 죽었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귀순하였다. 이제 짐의 큰 임무가 완수되었다."


 "두해 동안 짐은 세 번이나 원정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는 사막을 건너면서 이틀에 하루씩만 음식을 먹었다. 사막은 초목도 없고 물도 없는 곳이며 황사가 심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고난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


 "천신 만고 끝에 큰 공을 세웠는데, 가르단이 없었다면 짐은 하루도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들의 도움을 입어 성공하였으니 짐의 일생은 즐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곧 궁궐에 도착하면 따로 이야기하겠다. 지금 붓과 먹으로 모두 적기는 무리인지라 그 대강만을 썼을 따름이다. 특별히 유하노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8.22 갈단.. 최후의 유목군주...
  •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08.23 나중에 청 대 준가르의 대결도 연재 좀 부탁드릴께요
  • 작성자초절세미소년*^^* | 작성시간 12.08.23 도대체 이 사람은 왕인가 군사인가... 현장에서도 내리기 어려운 전략적 판단을 북경에서 완벽하게 해내고 있네요 진짜 먼치킨이었구나...
  • 답댓글 작성자흑풍 | 작성시간 12.08.30 이 양반.... 차이나 토탈워를 플레이 중?
  • 작성자남극대왕 | 작성시간 12.08.23 항상 재미나게 보고잇습니다. ㄷㄷㄷ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