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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24) ─ 또다른 시작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25|조회수900 목록 댓글 7




 전역은 분명히 초반에는 오삼계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청조의 지배 영역 전체가 뒤흔들렸고 사방에서 난에 참가하여 판도도 대단히 넒어졌고, 조정은 온갖 방면을 상대로 군대를 파견하여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삼계 본인의 약간의 소극적인 모습과 장수들의 무능, 무엇보다 천하가 모두 진동하는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강희의 대응으로 인해 사태는 점점 진전국면이 되고 있었고, 각지에서 반란군에 동조했던 지역들이 제국군의 힘으로 수복이 되면서, 오삼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립무원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오삼계는 섬서를 잃었고, 복건을 잃었으며, 광동의 상지신을 잃었고, 또한 강서를 상실했습니다. 강서가 무너지자 청군의 선박이 진군하여 악주 등도 공격했습니다. 오초칠국의 난, 정난의 변 등 창립 초기의 국가 전체를 뒤흔드는, 조정과 지방 실력자의 양자 대결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삼번의 난 정도로 규모가 장대하며 시간이 오래 걸린 싸움은 없었습니다. 이는 바햐으로 저 북쪽 막북의 몽골 세력들부터, 최남단 대만의 해상 세력들까지 모두가 끼어들었으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오삼계와 접촉하는듯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말, 코끼리, 해양 선박과 보병부대. 삼번의 난은 청조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오삼계 역시 적용되는 말입니다. 


 오삼계는 이미 군대 파견과 재원의 힘이 거의 다했습니다. 끝도 없을것 같은 번영도 이미 쇠퇴하여 세금도 군량을 거두기엔 부족했습니다. 군량이 부족해지자 군사들의 원망이 심했고, 백성들은 멀리 피하여 세력이 위축되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오삼계는 내부 단속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지는 반란 세력을 다시 한번 자신의 위망 아래 결집시켜 청조와 전면대결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수하 장수들도 오삼계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일은 이렇게 된 일입니다. 오삼계는 형주(衡州)로 옮겨가 그곳을 정천부(定天府)라고 이름을 삼았고, 단을 쌓고 저택 1만 칸을 조성하였습니다.


 1678년 3월 초, 오삼계가 하늘에 제사하고 즉위한 그날, 아침에 갑자기 채색 구름이 환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삼계는 이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하늘이 응대하는 좋은 조짐이다."


 그는 황제의 관을 쓰고 황제의 옷을 입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는, 황제에 즉위함을 선포했습니다. 나라 이름은 ‘주(周)’, 연호는‘소무(昭武)' 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오삼계 세력은 많이 위축되었고, 민심도 점차 변하였습니다. 형주의 백성들은 이런 노래를 지어서 부를 정도였습니다.


 "누워도 2년이고, 서 있어도 2년이다. 소(昭) 자의 가로세로는 모두 두 획이기 때문이다."


 오삼계 정권이 어떻게 해도 2년은 못 넘긴다는 늬앙스를 가지고 있는데, 오삼계 역시 계속되는 싸움에 지쳤습니다. 60세만 살아도 장수하였다고 축하를 해주던 시기. 아무리 역전의 무장이며 강골이라고 하여도, 오삼계는 이미 68세의 노인이었던 것입니다. 편안히 안락을 추구하며 근심없이 건강을 챙겨도 모자랄 시기에, 오삼계는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군을 지휘하며 수많은 전투와 보급,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매일 탄식했습니다.


 "왜 이렇게 힘드는가. 왜 이렇게 힘드는가."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개 한마리가 의자에 앉아서 자신을 보며 짖어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늙고 쇠약해진 오삼계는 깜짝 놀라 이는 상사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여겼고, 그로부터 매일 밤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형색이 초췌해지고 혈기가 크게 손상되어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기도는 막혔고, 가래가 넘어가지 않아 횡격막이 막히는 병에 걸렸습니다. 인두 아래가 막혀서 먹을 때, 후두를 통해야 했습니다. 음식물이 잘 내려가지 않거나, 내려가도 설사를 했습니다.


 결국 1678년 8월 17일, 개인의 힘으로 중국의 역사를 바꾸고, 삶이 끊임없는 투쟁과 선택의 연속이었던 이 무장은, 그러나 불안과 공포 속에서 떨면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67세의 고령으로, 오히려 지금까지 태연하게 군지휘를 계속 했던것이 신기한 나이입니다.


 하국상 등의 부하들은 오삼계의 죽음을 숨기고, 식시와 의복을 가져다주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은밀히 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들을 불러들였고, 운남에서 내부 준비를 하게 한 뒤에 이듬 해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吳世藩)을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강희는 소식을 듣고, 승리의 기운을 느껴 말했습니다.


 "두목이 죽으면 적은 반드시 내부에서 변란을 일으킨다. 이 좋은 시기를 틈타, 각 로의 장군들은 신속히 각기 대군을 통솔하여 길을 나누어 토벌하라."


 그리하여 제국군은 이제 승리의 기세를 높여 각 지에서 진격을 감행했고, 1679년, 기어코 악주를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사실상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였습니다. 광서는 본래 손연령이 담당하였다가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을때 오삼계의 세력에 포함이 되었는데, 손연령의 부인 공사정은 손연령에게 청나라 조정의 은혜를 생각하여 귀순할것을 청했습니다. 1677년에 손연령이 대세가 심상찮음을 보고 조정에 투항했는데, 소식일 들은 오삼계가 즉시 증손 오세종의 부대를 보내 그를 죽이고 자신의 세력에 편입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국군은 승리의 진격으로 오세종을 쫒아내어버렸고, 이로써 광서는 평정되었습니다.


 섬서, 복건, 광동, 강서, 광서. 거의 모든 지역이 수복되었고, 이제 반란은 끝난것이라 다름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반란은 몇년 더 지속이 되지만, 이는 사실상 소탕전의 개념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디테일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최후의 전개는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무능한 늑이금은 쫒겨나고 다른 사령관이 와서 운남, 귀주 등지로 진군을 시작했고, 서북의 도해는 한중을 점령하고 제국군은 사천으로 진격했습니다. 오세번은 밀사를 보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저지당했습니다. 


 곤명성에서 반군은 최후의 저항을 했으나, 결국 함락당했습니다. 관군은 곤명의 유골을 모두 파서 오삼계의 유골을 찾아내었고, 결국 오삼계의 유골을 담은 상자를 발견, 이를 깨부수고 각 성내의 저잣거리에 달아놓았습니다. 곤명성은 내부 배신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오세번은 자살했고, 그 목도 잘려서 구경 거리가 되었습니다. 오삼계에 도움을 준 방광침과 그의 조카는 군중 앞에서 능지처참의 혹형을 당했고, 다른 장수들도 기둥에 묶어서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겁쟁이였던 마보는 여러 산을 넘나들며 달아났는데, 그 세력은 100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제독 상아가 항복을 권유하자, 마보는 짐짓 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나로 인해 연좌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1만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내 한 몸 죽어도 아깝지 않다."


 그러면서 위풍 당당히 산에서 내려와 자신을 공경하면서 맞는 상아에게 항복을 했고, 상아의 태도를 본 마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밤에 같이 조용히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마보가 술을 마시면서 어둠속에서 상아의 얼굴을 보자 의미심장했습니다. 


 술잔이 세 번 돌아가자, 상아의 기색을 눈치챈 마보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비통했는지 눈물을 흘리다가 상아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구 해 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아들을 보호해 달라고만 요청했습니다. 강희는 마보가 힘이 다하여 항복한것으로, 죄가 매우 크니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고, 그는 북경으로 불려와 능지의 혹형을 말없이 받았습니다.


 호국주와 용맹한 맹장 왕서, 참모 이광 등도 운남의 산에서 쫒기고 있었습니다. 호국주가 왕서와 이광에게 어찌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왕서와 이광이 대답했습니다.


 "왕은 낙화를 보지 못했는가. 혹은 의자 위에 가득하고, 혹은 진흙 중에 무성하다."


 호국주는 머리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다음 날, 그는 자진했습니다. 왕서와 이광은 제사를 지내고, 그 애통함을 다하고 나선, 서로 몸에 불을 질러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상지신은 끊임없이 청군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며 핑계를 대고 버텼습니다. 강희는 대세가 기울어졌을 무렵부터, 차라리 방해나 안하면 다행이겠다라는 생각으로 상지신을 더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오삼계 세력이 약해지자 그를 더욱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상지신은 전횡을 더욱 부리며 강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겼습니다.


 "황제가 나에게 출병을 요구하면서도, 내 작위를 올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황제의 명을 받고 현지에 온 관리들을 질책하며 망령되게 행동했습니다.


 "그대가 여기에 와서 하는 일마다 나와 부딫히게 되니, 내가 한 칼로 그대를 벤다고 해도 황제는 나를 어쩔 수 없다."


 또 어느날엔 술에 만취해 순무 김준을 위협하며 맬핬습니다.


 "내가 온전히 돌아가지 못하는데 네가 어찌 광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일은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한다. 나도 오삼계가 순무 주국치를 살해한 것처럼 할 수 있다."


 김준이 그를 질책했지만 대취한 상지신은 쓰러져버렸습니다. 깨어난 그에게 김준이 아들을 조정에 입조시키라고 권하자, 상지신은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상지신은 강희에게 개별적으로 항복한 장수들을 죽였으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호위들을 활로 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자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현지의 상지신 부하들의 반응이 이러하자, 김준은 강희의 명령에 따라 일순간에 군사를 파견하여 상지신을 사로잡아 압송했습니다. 상지신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의 상소를 했지만, 의정왕대신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상지신의 어머니, 그 동생, 몯느 공로자는 목을 베어 심문하고 상지효 등 연류가 되진 않았지만 상지신의 가족들은 칼을 채우고 심문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강희는 최후의 순간에 늙은 상가희의 충성심을 떠올리고는, 상지신에게는 고통스러운 능지형이나 참형 대신 사사(賜死)의 관용을 보이고는, 상지효 등은 모든 죄를 면제해주어습니다. 상지신의 늙은 어머니도 사죄를 선고받았고 가산 몰수도 면제 되었습니다. 상지신의 처는 북경으로 압송되었지만, 그 이상의 능욕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경정충이 복건에 있는것도 거추장 스러울 뿐입니다. 강희는 경정충을 북경으로 오게 하여 유인한 후에 그의 재산 등을 몰수했습니다. 본래 강희는 경정충에게 자비를 베풀 요량이었지만, 대학사 명주가 상소를 올려 반대했습니다.


 "경정충의 죄는, 상지신에 비해 막대합니다. 상지신은 행동이 횡포하고 망령된 말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경정충은 은혜를 저버리고 모반했으니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칙서를 내려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결국 경정충 등은 책형을 당해 머리가 걸려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재산은 몰수 되었습니다. 8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던 싸움의 삽시간에 순식간에 끝이 나버린것은, 분명히 오삼계의 사망 때문입니다. 그가 죽자 가장 큰 핵심이었던 오삼계 반란군은 구심점을 잃었고, 오군이 무너지자 강희의 예상대로 다른 반란의 물결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만일 오삼계가 더 젊었거나 활기가 넘쳐 오래 생존했다면, 저항은 좀 더 조직적이고 더욱 꾸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오삼계가 사망하기 전부터 강희의 대응때문에 전세는 분명하게 기울고 있었습니다. 오삼계가 싸움이 끝나지도 않은 마당에 칭제를 한것도, 분위기를 반전시켜보려는 요량이었으니 말입니다. 


 삼번의 난은 그 규모가 서북, 대만 등 사방을 포함하였고, 몽골리아의 기마병들과 중국 최남단의 코끼리들이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가공할 화포의 위력과 강과 바다에서 벌어지는 함대전, 수십만의 군대와 제국 전역으로 운송, 이동되는 물자등 그 규모에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습니다. 준가르나 티베트, 건륭 시대에 벌어진 구르카나 베트남과의 격전으로도 대단한 분량의 책을 작성할 만 하나, 엄밀히 따지면 그 모든 전투들은, 삼번의 난에 비하면, 외부에서 일어난, 주목받지 못할 사소한 다툼에 지나지 않을 수준입니다. 


 모든 중국인들의 눈이 삼번의 난에 가 있었고, 엄청난 내전의 승리로 청조는 이제 드디어 진정한 제국으로서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희생과 격렬한 전투가 그 뒤에 있었습니다. 분명 삼번의 난은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지기 이전까지 청조 최대의 격전이었고, 청조의 역사에 지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강희는 이 모든 결과를 당초부터 예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상황을 낙관했으며, 반란의 가능성에도 큰 무게를 두지 않았고, 설사 반란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결과 지금처럼 참혹하고 장엄한 서사시의 종류로 남을지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급한 판단으로 인해 재앙이 일어나자, 그는 예상밖의 상황에 눌려버리기보단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 모든 상황에 전면으로 맞섰습니다.


 삼번의 난 기간 동안, 대부분의 군대가 전선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강희는 경산(景山)에 나가 사냥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누군가는 길가에 격문을 붙여 비난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 삼번의 난이 일어났고, 차하르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치열하다. 이처럼 위험한 시기에 어떻게 정산에서 편히 쉴 기분이 나겠는가?"


 하지만 이는 현실을 망각하고 놀기 위함이 아니라, 반란의 와중에 자신의 건재함을 보이려는 의도였습니다. 강희는 다른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스스로 겁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썻습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재앙을,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여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켜 천하가 진동할때, 색액도는 강희에게 철번을 주장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거절했습니다.


 "오삼계를 철수시키는것은 짐의 뜻이었으니,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소. 짐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책임을 신하에게 전가 한 적이 없소. 그리고 관리들끼리 서로 탄핵하는 것은 명의 악습이오. 그런 구습은 절대로 오래 계속되어서는 안 되오."


 강희는 전쟁이 일어나자 본래 오삼계의 수하였던 사람들을 발탁하여 각지로 파견하여 회유나 정탐 활동을 벌이게 했으며, 반란군에게 협력한 수많은 관리들의 사정을 하나하나씩 재점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가담하였고, 어떤 사람은 가족을 해치겠다는 위협 때문에 억지로 참여하였고, 어떤 사람은 가담하지 않아 피해를 당했습니다. 처자식이 운남에 있는 장수들에게는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하게 첩보활동을 벌이고는, 반란군의 배후에서 자신을 돕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하루에 혼자의 힘으로 삼백에서 사백건에 가까운 보고를 스스로 점검하고 답신을 보내어 각지의 전황과 일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태연하게 있었지만, 스스로 가지고 있는 힘을 한계까지 끌어내어 각지의 전선에 집중했습니다. 1679년, 전세가 잠깐 악화되고 지진까지 나자, 그는 과중한 업무 때문에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병이 나고 음식을 먹지조차 못했습니다. 효장태후는 잠시 강희를 쉬게 하였습니다.


 결국 삼번의 난이 마침내 끝이 나자, 신하들은 이를 축하하며, 업적을 부풀려 찬양하고 그에게 존호를 올렸지만, 강희는 이것이 실질적인 이익이 없는 허명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존호를 받기는 커녕, 그는 승리가 결정되었던 그 해의 겨울, 자신의 계산 착오로 거대한 전쟁을 불러 일으킨 스스로의 잘못을 글로 적어, 대학사 레데훈에게 넘겨 주었고, 레데훈은 건청문 앞에서 모든 신하들에게 읽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실수를 범하고 나서야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승리자라고 일컫을 수 없으며, 신하들의 희생양을 만들어 스스로가 져야 할 책임을 그들에게 넘기고, 강희 본인에게는 승리자의 역할을 남겨두도록 묵과하지 않겠다는 점도 이야기 했습니다.


 어찌되었건, 삼번의 난에 연류되었던 세력들은 모두 적절한 응분의 조치 혹은 관대한 대우를 받는식으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반란군의 관료였던 사람들을 모두 베이징으로 압송해야 한다거나, 그들의 자손은 앞으로 영원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 강희의 손에 기각되었습니다. 상지신이나 경정충 휘하에서 벼슬을 살았던 일부 관료들은 오히려 팔기의 빈자리를 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번의 난에 관여한 세력중에, 관대함의 손길이건, 잔혹한 보복의 칼날이건,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한 단 하나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정성공, 정경. 대만의 정씨 왕조. 삼번의 난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강희는 이 까다로운 감자에 대한 후속조치에 착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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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08.25 멍청하기는 하죠.어정쩡하게 행동했으니 아예 충성을 확실히 하든지 아니면 반란을 확실히 일으키든지.반란 일으킬거도 아니면서 저렇게 불손하게 나오면 이건 뭐.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반란일으키야 했을듯 하네요.어짜피 강희는 삼번을 없애고 직접 통치하려고 했을테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상지신은 오삼계와 연계해서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야 했음.그때는 진짜 승패를 알수 없었을듯.물론 만약에 이기면 그때는 오삼계와 다시 한판 붙어야 했겠지만
  • 답댓글 작성자명일 | 작성시간 12.08.25 그런데 아버지는 청에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지만 나중에 살아있었고 충성을 바쳐도 오삼계가 처리된다음엔 역시 처리됬겠죠.강희가 결국 삼번을 철폐했을겁니다.아버지의 충성을 사서 관대하게 대한건 아버지가 빨리 죽어서 처리할 필요가 없으니 그런거고 그때까지 살아있었으면 그냥 놔두지 않았을듯.지금 다 지나고보면 삼번입장에선 연합해서 반란을 일으켜야 했음.만약에 이기면 나중에 자기네끼리 누가 황제되냐를 놓고 피터지게 싸워야 했겠지만
  • 답댓글 작성자love | 작성시간 12.08.25 명일//청 정부 무너뜨려고 오삼계와 한판 뜨려면 차라리 청 정부에 충성하는게 죻겠죠..명분이나 가문유지를 위해서여..
  • 작성자사생 | 작성시간 12.08.25 강희제 정도 되는 먼치킨이 체력적 부담을 느끼다니
  • 작성자뉴에이지 | 작성시간 12.08.26 그런데 신불해님 보면 미저리가 생각남. 누군가 신불해님을 감금해 놓고 글을 쓰게 하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퀄리티의 글이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올리가 없음. ㅋㅋㅋㅋㅋ 오늘 안올라오는 이유는 고문당하느라고... 삼번의 난으로 강희제를 너무 괴롭힘. "가련한 주인공을, 괴롭히지 말랬지!!" 하면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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