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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28) ─ 제국의 황제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9.01|조회수763 목록 댓글 8

 



 ……중국의 황제는, 혹자는 그가 무궁한 재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의 강토가 광할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라고 말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렇지만, 그는 진정 자신의 몸에 모두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것을 사용했다. 그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보면, 그의 말은 소박하고 담백함이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공봉(供奉)되는 물품을 제외하고, 그는 조금도 사치스러움을 구하지 않았고 매우 일반적인 음식에 만족했으며, 조금도 정도를 지나친 적이 없다. 그의 담백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방이라 하더라도, 몇 폭의 서화와 몇 점의 금을 입힌 장식물 및 일부 소박한 주단(紬緞)이 있을 뿐이다. 주단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물품으로, 사치품에 속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소박함이 이 방의 거의 모든 장식물에 보인다. 강희제는 북경 근처 3리 떨어진 곳에, 그가 매우 좋아하는 원유(장춘원长春园)를 조성하고, 매년 이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이 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개축한 두 곳의 대수지(大水池)와 몇 곷의 하도(河道) 말고는, 부유하고 또한 강성한 군주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호화스러운 기백에 어울리는 물품은 거의 볼 수 없다.


 그의 의복은 궁정 안에서 매번 볼 수 있는 겨울을 나는 검은 담비 및 은서피(銀鼠皮) 옷을 제외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항상 볼 수 있지만 일반 백성은 입기 어려운 사주(絲綢) 복장이다.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그가 털로 짠 모작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흔한 거친 의복이다. 여름에 우리는 그가 보통의 마포단괘(麻布段掛 마포로 만든 홑 마고자)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반 가정에서 항상 입는 의복이다. 경축일 대전을 거행하는 날을 제외하고 우리가 그의 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물품은 큰 구슬이다. 이 구슬은 여름에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그의 모자에 다는 것이다. 그는 황성 안팎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가마를 이용한다. 이 가마는 담가(擔架)와 비슷한 물품이다. 나무 재질은 일반적인 것이고 옻칠을 했으며, 몇 군데 동편이나 도금으로 장식한 목조이다. 


 총괄하자면, 그의 주변에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 군주처럼 사치가 극에 달하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군주의 위신과 진정한 위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스러움은 적은 부분이고, 그 외 훨씬 많은 부분은 도덕의 찬란함에서 비롯됨을 강희 황제는 깊이 믿고 있다.


 ─ 조아셍 부베. 강희제전(康熙帝傳), 루이 14세에게 올린 보고문 中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그라말디는 군주가 가진 놀랄 만한 지식욕은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제후들과 제국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멀리서는 흠모해 마지않고, 가까이서 대할 때는 존경을 금치 모하는 그 군주가 페르비스트와 함께 (궁전의)내실에서 마치 선생을 모신 (온순한) 학생처럼 날마다 서너 시간씩 수학 도구와 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클리드의 정리를 터득하고 삼각함수를 이해했으며, 산술로 천체의 현상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다. 최근에 그곳에서 돌아온 르 콩트 신부가 출간한 중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 군주는 자신의 자식들이 과학의 근본 원리와 여러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끔 수학에 관한 책을 친히 집필하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그 군주는 자신의 나라를 밝혀 줄 수 있는 이 지혜가 집안 대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최신 중국소식> 中



 청조 초기의 이학(理學)을 하던 인물 중에 한명인 위상추(貌象種)는 강희에게 '법도를 천명하여 본원을 다스리는 일을 엄히 경계하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보냈습니다. 그 상소의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해 보면, 국가의 근본은 백성에 있고, 백성의 안위는 독무에 있습니다. 독무가 청렴하면 물자가 풍부하고, 백성이 편안해지며, 독무가 탐욕스러우면 백성이 궁핍하고, 재물이 다하는 법입니다."


 나중에 강희는 다른 이학자인 웅사이와 논쟁을 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생이 성취하려는 바를 얻지 못함은 이치가 깨끗하지 않아서이다. 수령이 현명하면 저절로 백성은 편안해진다. 대체로 나라의 부세는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한 사람의 백성이 있으면 한 사람의 세금이 있다. 만일 백성을 위무하지 않으면, 지방이 어떻게 안정될 것인가."


 1697년, 강희 36년 당시 그는 서쪽 지방으로 서순을 하고 있었는데, 한 가지 우려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순행 하는 일 때문에 지방관들이 대대적으로 도로를 수리하여 백성을 성가시게 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는 길잡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레 하나라도 가는 길이면 족할 것이다. 황하를 건너면 섬서의 길은 넒기 때문에 수리할 것은 없다. 만일 도로의 정비가 너무 지나치면, 수고로움이 백성에게 미치게 된다."


 나중에 감숙과 섬서에 도착해보니, 우려대로 도로가 지나치게 화려한것을 보고 몹시 기분이 안좋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을 지나치게 번거롭게 한다. 가마를 타고 순행하는 이유는 본래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함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민력을 수고롭게 하는가."


 청조는 초기에 명나라 말기, 절망적인 대기근에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고, 삼번의 난 등이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면서 백성들의 피곤함과 부담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삼번의 난이 끝난 1681년, 강희는 연달아서 계속해서 부세와 부역을 감면하며 그들을 돌보려고 하였습니다. 1683년 무렵, 강희가 효장태후를 모시고 오대산에 오르려는 무렵, 수많은 촌민들에 개미처럼 등에 양식을 지고 힘겹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고 매우 의아하게 여겨 수행자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효장태후와 황제의 어가 준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강희는 그 즉시 병부의 일을 관리하는 인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황태후께서 오대산을 가실 때 일체 필요한 물품은 모두 황실 창고에서 준비하고, 조금이라도 평민에게 거두지 말라. 준비해야 하는 미두 등을 어디에서 사용할 것인지 조사하여 보고하라."


 오대현 지부는 오대산이 매우 구석진 곳에 치우쳐 있어, 태황태후 일행이 도착하면 먹을 것이 부족할까 우려하여 이런 조취를 취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이런 기회가 생기면 지방관이 평민을 착취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는것을 알고 있었기에 경고했습니다.


 "공사를 준비하는 이유로 추궁을 면할 수는 있다. 허나, 이미 값을 지불했다는 지현의 말은 정말로 믿기 어렵다. 이제 일체의 물품을 내부에서 준비하고, 이후 태황태후의 가마가 도착한 후 다시 물품을 보내는 일은 없도록 하라."


 

 강희남순도(康熙南巡圖) 中 왕휘(王翬) 작


 바로 다음 해, 강희는 자신의 생애 처음으로 남순에 나섰습니다. 강남의 지방을 둘러보고 지방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대청제국의 황제로서 자신의 무력과 위신을 보이고 현지 관리, 유력자들을 단속하는등 복잡한 의도가 담겨져 있는 발걸음이었는데, 우선 지금은 이 당시 강희의 검소한 부분에만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강희는 대일행이 줄발하기 전에 책임자들을 불러모아 미리 당부와 언질을 주었습니다.


 "짐의 순행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절약하라. 호부가 초두를 사고, 공부가 목탄을 사며, 광록시가 음식을 준비하고, 지방관이 민간에 과파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하라."


 그리하여 남순 중에 필요한 모든 물건은 북경에서 준비가 되었고, 만약 도중에 고갈이 되어도 억지로 현지에서 보충하려고 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랫사람들이 공물을 바치는 경로는 처음부터 막혀버렸습니다. 또한 수로로 가면서도 일부러 시장에 들러, 현지 시장에 제국의 황제가 나타나는 '민폐'를 막고 시장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조심조심했습니다. 그는 강녕 순무 탕빈에게 말했습니다.


 "짐은 지방의 풍속과 백성의 생계를 두루 알고자 순행을 하는 것이다. 필요한 물품은 모두 내부에서 준비하고 조금이라도 민간에서 구하지 말라. 지방의 불초한 관원이 이를 빌미로 삼아 함부로 과세하여 불쌍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있을까 걱정된다. 너희들은 엄히 관찰하여 만일 이러한 일이 있으면 직접 이름을 지칭하여 탄핵하고 중죄로 다스려라."


 강희는 평소에 북경에 있을때는 일에 열심이었는데, 이는 남순 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84년 10월 15일, 강희가 기주에 머물고 있을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본래 북경에서 3일에 한 번씩 보고를 올리도록 조취를 취하였는데, 이날 따라 저녁 때 도착해야할 상소가 한밤중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강희는 천자된 몸으로 저녁 11시까지 기다렸으나 파발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행신하에게 말했습니다.


 "짐이 순행중일 때에는 항상 상소가 도착하자마자 곧 비답을 써서 돌려보내 왔소. 지난번에 제때 상소를 전달하지 않은 관리를 엄하게 처벌하였거늘, 오늘도 아직 파발이 도착하지 않고 있소. 오늘밤 상소가 도착하면 언제라도 짐에게 곧장 가지고 오시오."


 이리하여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기다리던 파발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신하들이 두꺼운 상소 뭉치를 올리자 강희는 곧바로 일어나 상소를 처리했습니다. 순행을 하느라 낮에도 쉬지 못했지만, 낡이 발을때까지 모든 상소에 비답을 달아 처리하였습니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에 비답을 적는 일. 강희는 이 일 만큼은 절대로 누구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 처리했습니다. 이로서 환관들의 전횡을 막고 중간에 어지가 조작되는 일도 저지했는데, 문제는 개인에게 부담이 매우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강희는 나이가 들어 오른손으로 글씨를 쓸 수 었을 때에는 왼손으로라도 바득바득 작성했습니다.


 강희는 상소가 올라오면 언제나 신속하게 처리했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전역에서 매일 수많은 비답이 도착하는데, 황제가 너무나도 이를 빨리 처리하는 바람에 신하들은 과연 존엄한 천자가 이 자질구레한 상소를 제대로 읽기는 하는지, 혹은 그저 적당히 답장만 보내는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신하들의 의심을 눈치챈 강희는 대학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은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보니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오. 한번은 상소가 올라온것을 짐이 순식간에 모두 읽으니, 당시 상서였던 목화륜이 짐에게 자세히 읽어 달라고 몇 차례나 말한 적이 있소. 그래서 짐이 목화륜에게 상소의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했더니, 목화륜은 묵묵히 돌아갔소이다."


 강희 46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 신하들의 의심이 일어나자, 강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방금 형부에서 상소를 올렸는데, 그 중에 틀린 글자가 있어 짐이 붉은 먹으로 틀린 글자를 고쳐서 내리 보냈소이다. 내용이 아무리 많아도 짐이 그것을 모두 읽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마시오. 짐은 상소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틀린 곳이 있으면 모두 수정해 주고 있소. 한문을 만주어로 번역하다가 틀린 부분이 있어도 모두 고쳐 주고 있단 말이오. 전쟁 때에도 하루에 3,4백건의 상소를 일일히 처리했는데, 이제 나라가 태평해 상소가 하루에 4, 50여 건 밖에 되지 않거늘, 그것을 처리하는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소?"


 그리고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짐은 읽는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한 번 읽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소."


 이는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나이가 들어 노화 현상을 겪기 전까지, 어떤 일이던지, 혹은 어떤 지방을 지나가면서 만난 어떤 사람의 이름이던지 잊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강희가 페르비스트와 배를 타고 여행할 때, 강희는 어떠한 새의 이름이 벨기에 말로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페르비스트는 자신이 그 새의 벨기에 말을 과거 강희에게 직접 가르쳐 주었다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본인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강희는 오히려 자신이 새의 벨기에 말을 페르비스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선교사들에게 강희는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부베는 강희가 위엄이 있고, 잘 균형 잡힌 몸매를 지녔으며, 보통보다 키가 크고, 매부리 코에,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있지만 그것이 황제의 넘치는 매력을 전혀 감소시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선교사들은 황제의 요구에 따라 그에게 서구의 학문을 가르쳤는데, 페르비스트는 기하학을 가르쳤고 제르비용과 부베, 페레이라 등은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선교사들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을 만주어로 번역했는데, 강희는 스스로도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서구의 문자와 숫자를 알기 위해선 라틴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게걸들린 사람처럼 수학을 배웠습니다. 황제의 낯선 분야에 대한 변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강희의 태도는 대단히 진지했습니다. 그는 잘 모르는 문제는 반드시 질문을 하는 매우 착실한 학생이었고, 직접 기하 도형을 그리고 연산을 훈련하고 수학 기구 사용을 연습했습니다. 


 강희는 또 바티칸의 "실용과 이론 기하학"을 공부하고 그것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차이점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반년도 되지 않아 그는 기본적인 기하 지식을 갖추었음은 물론이고, 몇몇 기하 도형의 정리와 증명 과정은 술술 말 할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능숙하게 대수를 이용해 연산을 했고, 또 대수표를 이용해 삼각형을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자신이 "기하학원본"을 적어도 스무 번은 읽었다고 말했으며, 두 세 시간 강의를 들은 후엔 혼자서 그것을 복습하는 열의까지 보였습니다. 강희 29년(1690) 강희제의 생일날, 선교사들이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는데, 강희제가 불쑥 기하와 관련된 문제를 꺼내 묻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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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강희는 벨기에 예수회인 앙투안느에게 고차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비부호화된 대수법인 '차근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의에 선교사들은 크게 감탄했고,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중국의 과학은 물론이고, 서양 과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서, 어려서 유럽의 과학지식을 조금 알게 된 후로 과학 학습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는 다른 일을 처리하는 시간 외에 남는 시간에는 온통 수학 공부에 몰두했고, 수학 공부를 가장 큰 즐거움으로 생각 했습니다."


 강희의 서양 학문에 관한 관심은 취미 격인 수학 뿐만 아니라 천문, 역법, 지리, 의학, 농업, 기상 등 다방면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황실 내에 실험실을 만들고 의학적인 지식이 있는 선교사들을 모아 의학 연구와 약품 제조에 힘쓰도록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여러곳에 기상대를 설치하여 매일 기상 상태를 기록해 보고하도록 했고, 북경에서 이를 토대로 농업정책을 수립했습니다. 그런데 강희 본인이 기상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엉터리 보고는 금방 간파해버렸습니다. 강희 49년, 소주 지방에서 겨울의 강수량을 2월이 되어서야 보고한 데다가, 강희가 담당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자 전혀 대답을 못했기에 처벌을 받은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때의 풍부한 기상 자료가 후대의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강희의 관심이 오직 서구의 학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강희는 스스로가 가장 열성적인 주자학자였으며, 중국 전통문화의 보호자였습니다. 그는 일강에서 학문을 공부했는데, 일강은 처음에는 이틀에 한 번씩 실시했으나, 2년 후부터는 매일 실시했습니다. 강희제는 이 경연일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거의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하던 중요한 시기에도 일강을 매일 실시하라고 명했고, 강희 12년(1673) 여름, 규정에 따라 일강을 잠시 중단하려 하자, "학문의 도는 중단이 없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일강을 계속 하자고 하였습니다. 대서가 되어 강관이 무더위에 황제의 몸이 축날 것을 우려해 일강을 당분간 중단하자고 하자, "짐은 책은 읽으면 피로한 줄 모른다." 라고 말했고 또 강관이 없을 때에는 혼자 궁에서 일강 때 배운것을 복습하는 열의까지 보였습니다.


 강희는 7개 언어를 할 수 있었고, 또 중국 13개 성 사람들이 내는 각자의 악센트를 구별할 수도 있었습니다. 강희 16년 9월 28일, 24세의 강희는 변방을 순찰하고 있었는데,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농민을 보았습니다. 놀란 강희는 서둘러 그를 구하게 했고, 그 남자가 본래 만리장성 밖에 사는 농민이며, 지금은 변경 지역에서 머슴으로 일하고 있는데, 가족을 보러 가다가 가지고 온 음식이 다 떨어져 며칠을 굶어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강희는 이를 몹시 딱하게 였습니다.


 "그가 물론 나의 아들은 아니지만, 배가 고파 땅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니, 가여운 일이 아닌가? 어서 가서 그에게 죽을 먹여 기운을 차리게 하여라."


 강희는 그 농민이 죽을 먹고 기운을 차리는 시간까지 천천히 기다려준 다음, 그가 어느정도 기운을 회복하자 현지 관리들에게 지칠 대로 지친 그를 잘 회복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으로 만나도록 도움을 주라는 명령을 다 내린 후에야 다시 출발을 했습니다. 강희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들은 구중궁궐에서 나고 자라, 백성들의 어려움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짐은 수재가 일어났을 때 백성들이 수초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것을 보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잊지 않기 위해 직접 수초를 씹어 보았다."


 그는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평민과 산적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그들을 최대한 배려해주고 또 사면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습니다.



1668년 - 35명
1706년 - 25명
1712년 - 32명
1715년 - 15명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냐고 하면, 청나라가 지배하는 전중국 - 만주, 하북, 중원, 강남, 내몽골, 대만 - 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숫자입니다. 이 시기 청나라의 인구는 1억명 이상을 향해 증가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인구, 즉 호구 조사에 들어가지 않은 인구까지 합치면 훨씬 많았습니다. 그 정도로 큰 영토에 많은 인구를 지닌 나라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숫자가 저 정도 였습니다.


강희제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 한번 두번 여러번 읽어본 뒤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68년 같은 경우에는 본래 48명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강희제가 이를 더 줄인 일이었습니다. 신이 글자 하나를 그으면, 사람의 목숨이 이에 따라 살아나고 죽습니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강희제는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정말 더 없이 신중하게 입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재물에 커다란 궁궐에 살고 있는 강희제였지만, 몇번을 살피고 살피고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 날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짐은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어떻게든 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오. 형부에서 판결 기록을 올릴 때마다 짐은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 죄인을 살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지 찾아보고 있다오. 죄인이 죄를 저지른 것,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즉각 처형하기보다는 감옥에 가두어 잠시 처형을 미루고 이듬해에 다시 관찰하도록 하시구려. 죄인들이 곧장 처형되지 않는다는것을 알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겠지만……아, 그러나 감옥 안에서 몇 달간 살다보면 그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개과천선하고 싶어도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오. 짐은 그들이 너무 불쌍하오."


죄인들에 대한 강희제의 측은지심은 대단했는데, 어느날 조상들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 떠났던 강희제는 이 지역에 유배된 죄인들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것을 보고 놀라고 불쌍하게 여겨 말했습니다.


"짐은 이제껏 영고탑과 오라(烏喇)로 유배된 죄인들이 이렇게 고초를 겪고 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네! 그들은 몸을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돈도, 그리고 능력도 없다네. 게다가 그들은 남방 사람이 아닌가? 약한 몸으로 이렇게 추운 곳으로 와서 고향과는 전혀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불쌍하다네. 비록 그들은 스스로 지은 죄값을 치르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요양遼陽 같은 지역에 유배된것만 해도 죄값을 치루었다고 할만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농사 지을 땅을 주어 생계를 꾸려가도록 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해주오!"


"죄인들을 유배시킨 것은 본래 그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그들을 이런 춥고 황량한 곳에 내버려 둔다면 결국 고통 받다가 죽게 될것이니 어찌 본래의 뜻과 동일 하겠소? 앞으로 사형을 면한 죄인들은 모두 상양보로 유배시키고, 샹양보로 보내야 할 죄인들을 요양으로 보내도록 하고, 반란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오라 지방으로 보내는 대신에 노비가 되지 못하게 하시오. 형부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짐의 뜻을 헤하려 이 규정에 따르도록 하시구려."



강희제는 죄인들의 고통에 깊게 관심을 가져, 감옥에 있는 죄인들이 덥지 않도록 감옥을 시원하게 해주고 청소해주 한편, 죄인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면 의사를 보내주었고, 만약 괸리가 이를 모른척하고 보내지 않으면 크게 처벌했습니다.


"10월 부터 1월까지는 겨울인 데다가 유배당하는 죄인들은 모두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니, 몹시 추울 것이오. 그들이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길에서 얼어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니니 불쌍하기 그지없소. 앞으로는 10월에서 1월과 한여름인 6월에는 죄인을 유배지로 보내지 말구려."


 청나라 군이 중원에 입관한 대혼란기에서, 팔기병들은 한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들여 노비로 삼았습니다. 강희는 이들을 직접 대금을 주고 풀어주었고, 복건 지역에서 풀어준 숫자만 2만여명에 달했습니다. 


 또 강희는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는 퍼포먼스를 즐겨 했는데, 실제로도 농사에 관련된 책을 여러개 읽고, 서한의 농업 정책을 줄줄히 암송할수도 있었습니다. 강희가 직접 농사를 지을때, 하루는 비가 많이 오자 걱정이 되어 아침부터 오후 5시가 넘을때까지 황실 내의 논에서 시간을 보내는 적이 있었을 정도로 은근한 취미생활이기도 하였습니다. 삼번의 난이 진압된 1681년 6월 말, 강희는 경작에 열중하다가 우연히 이상한 벼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강희가 발견한 벼는 다른 벼보다 키도 크고, 이삭이 아주 잘 익은 벼였습니다. 우연한 발견이었지만, 강희는 이것이 혹시 새로운 벼의 품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여 이씨를 받아 보관해 두었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논에 심어보았습니다. 과연 6월이 되자 벼는 가장 먼저 익었고, 이삭도 모두 튼실했습니다. 강희는 이것이 농업생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 경작면적을 늘려보면서 10여년 가까이 시범 제배를 하면서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그리하여 10여년 후인 1691년 4월, 강희는 몇몇 대신들을 불러 이를 소개했고, 조생벼의 종자를 외부에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황제의 논에서 난 벼임으로, 이는 어도(御稻)라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강희는 어도 재배에 성공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은 식사 때마다 천하의 백성들과 음식을 나눌 것이다."


 강희 54년부터 강남 지방에서 어도가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벼 경작 경험이 풍부한 관리들이 이를 담당하자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소주와 강녕 일대에서 벼가 익으려면 145일이 걸렸지만, 어도는 100일 남짓이면 수확이 가능했습니다. 잘만 하면 수확량도 50% 가량을 늘릴 수 있다는 결론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퍼진 어도는 이모작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는데, 유명한 청나라의 소설 홍루몽에서도 어도에 관한 내용이 나올 정도입니다.


 또한 강희는 만리장성 바깥 지역의 기후와 변방의 토양에 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연구에 들어갔고, 어떤 작물이 적합한지를 찾아내면서 농업기술 보급에 주력했습니다. 강희는 이곳의 기후가 매우 춤고 바람이 심하여, 곡식을 심을 때에도 꼿꼿하게 심지 말고 너무 조밀하게 심지도 말며 간격을 두어 심어야 한다고 직접 지시하면서, 자연 조건이 열학하니 꼭 곡식 재배만을 고집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몽골에 관개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문제로 풀무치라고 부르던 메뚜기가 있었습니다. 메뚜기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수 없어, 그로 발생하는 재난은 홍수와 가뭄 바로 다음 수준이었습니다. 강희는 메뚜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직접 고대부터 당대까지 메뚜기의 피해등을 다룬 책들을 뒤져 모두 소개하는 한편, 포황설(捕蝗說)이라는 저서에서 메뚜기의 특징과 이에 맞는 포획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메뚜기 퇴치에 관한 학술 논문 수준이라고 하며, 탁상공론식의 내용은 전혀 없고 구체적인 포획방법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강희는 대학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이 풀무치의 생장과정을 연구해 보니, 풀무치가 알을 낳기 전에 날씨가 추워지면 풀무치가 모두 동사하여 이듬해에도 다시 생겨나지 않지만, 이미 알을 낳고 난 후에 날씨가 추워치면 풀무치는 동사 해도 그 알이 남아 다음 해에 다시 성충이 되어 피해를 입힌다오."


 그리하여 겨울이 늦게 온 이번 해에는, 서둘러 논밭을 갈아버려 풀무치 알 들을 땅속 깊이 묻어버리자고 주장했습니다. 1712년 여러 지역에서 메뚜기의 피해가 보고되자, 강희는 직접 메뚜기 퇴치법을 지시합니다.


 "풀무치가 남쪽을 향해 날면 앞부분이 날아오르고, 뒷부분은 그저 따라서 날아오르며, 무리가 흩어지지 않고, 죽을 때에도 서로 붙어서 함께 죽으려고 한다. 따라서 풀무치를 잡을 때에는 뒤에서 따라가면 잡을 수 없고, 어느 쪽에서 날아오르는지 잘 살펴 앞쪽에서 덮쳐서 잡아야 한다."


 실제로 지시대로 수행을 하자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자만하지 않고 메뚜기는 1년에 두 번 산란을 하기 때문에,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해도 그 알들이 성충이 되어 나타날 수 있음으로 극히 조심하고 메뚜기 알을 박멸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파일


학문을 읽혀 스스로를 다스리는것에 큰 관심을 가진 강희 였지만, 무예를 읽히는데도 열성이었습니다. 그의 최대의 취미는 바로 사냥이었고, 활쏘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오른손과 왼손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으며 말 위에서도 활을 아주 잘 쏘았고, 말이 달릴 때에도 자유자재로 무기를 구사했습니다. 심지어 전통적인 중국의 무기가 아니라 서양의 무기도 제법 잘 소화내었습니다.


강희는 사냥을 매우 열성적으로 했고, 이를 군사훈련과 연결이 시키는 동시에, 황자들의 재주를 살펴보는 기회로까지 사용했습니다. 강희는 사냥 도중에는 중원의 황제로 지낼 때와는 달리 매우 격식이 없는 동작을 취했는데, 잡은 물고기나 사냥감으로 간단하게 먹는가 하면, 말을 타고 자신을 발견해도 내릴 필요가 없었으며, 말이나 양의 젖을 발효시켜 이를 마시면서 병사들 사이로 들어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술을 따라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선교사 제르비용은 대청제국의 황제가 직접 사냥감을 요리하여, 자신과 황자들에게 나눠주었다고까지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사냥을 좋아하던 강희도 사냥하기는 좋으나 물을 얻기는 어려운곳과, 물을 얻고 야영하기는 좋으나 사냥하기에는 그저 그런곳이 있다면, 일부러 후자를 택했습니다. 병사들의 고생을 줄이려던 것입니다. 또한 사냥을 하면서도 강희는 현지의 기상 정보를 끊임없이 기록했고, 부하들이 하늘의 가장 기본적인 별자리 스물 여덞자리 조차 알지 못하자, 직접 오리온 자리를 가르키면서 그들이 어떻게 한 쌍을 이루는지, 천문학과 지리학의 관점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전쟁을 하러 초원으로 왔을때에는, 새벽 다섯시면 장막을 걷었고, 차가운 아침 새벽 공기를 맡으면서 말을 타고 탁 트인 메마른 초원을 내달렸습니다. 그리하여 11시쯤에 식사를 하였는데, 말을 타려고 나서려고 하면 취사장에서는 아침 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하던 형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1692년의 가을, 저녁 식사가 막 끝나갈 즈음, 사냥에 나선 강희는 곰 한마리가 작은 숲속의 바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강희가 다가가자 그 곰은 으르렁거리지도, 나무를 긁지도 않았습니다. 강희는 채찍을 휘두르며 곰을 유인하려 했지만 곰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으르렁거리며 넒은곳으로 나오자, 말을 탄 사냥꾼들이 곰으로부터 열 다섯 내지 스무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쪽으로 몰아붙혔습니다. 강희는 이를 보다가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은 대번에 곰의 옆구리를 뚫고 위장까지 파고들었습니다. 


 곰은 으르렁거리며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서 토막을 내고는, 몇 걸음 걸어가더니 멈추어 섰습니다. 강희는 말에서 내려 손에 창을 들고 서너명의 사냥꾼들과 함께 다가가 곰을 찔러 죽였습니다. 강희는 수행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이처럼 즐거운 사냥은 없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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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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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9.01 이건 뭐..... 현대 정치가'따위'들은 비교도 안되네요. 이런걸 보면 확실히 정치해야 할 유전자는 따로 있는듯.............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9.01 문,무 양면에 뛰어난 능력자는 여럿 보았으나 강희대제는 신처럼 보여지네요.
  • 작성자▶◀ 치우승천 | 작성시간 12.09.01 먼치킨이긴 하나 동물애호론자는 아님... 하긴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관념을 가질 수도 없지요. 강희제도 당시 시대상을 뛰어넘지 못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긴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 작성자남극대왕 | 작성시간 12.09.01 으으..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저랫음 마지막 황제란게 없었을듯...
  • 작성자명나라일대충신이자명장인왕진느님 | 작성시간 15.06.26 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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