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화의 황혼]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29) ─ 제국주의 VS 제국주의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9.02|조회수727 목록 댓글 1



파일


하느님이여, 차르를 수호 하소서(Боже, Царя храни!)


 하느님, 차르를 지켜 주소서!
 자랑스러운 차르에게 새로운 시대의, 빛을 보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을 진정케 하시고, 약한 백성을 지켜 주시고,
 모든 이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모든 축복을 내려 주소서! 

 하느님, 차르를 지켜주소서!
 
 강하고 장엄한 차르여,
 폐하와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군림하소서. 

 차르가 적의 두려움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차르는 정교회의 지도자이니,
 하느님, 차르를 수호하소서!

 ─ 바실리 주콥스키(Василий Жуковский), 러시아 제국 국가. 1815년 판, 1833년 판.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의 키예프 공국, 그리고 폭력과 살육을 남긴 황금군단의 킵자크 칸국. 동유럽에 드리운 몽골의 어두운 그림자는, 14세기 말 칸들의 울루스 통치가 심각하게 약화되면서 변모하였습니다. 여러 신생국이 칸의 통치를 갈라놓았고, 내부 계승자들간의 통치권 투쟁은 그들의 역량을 떨어뜨렸습니다. 용맹무쌍한 드리트리 돈스코이(Dmitrii Ivanovich Donskoi) 모스크바 대공(大公)의 빛나는 승리는 토크타미시(Tokhtamysh)가 벌인 1382년 벌인 모스크바 약탈 덕분에 그 빛이 가려지긴 했으나, 1390년대, 토크타미시가 한명의 거인과 겨루는 동안 몽골의 통치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http


 '정복자' '학살자' 그리고 '무질서의 지배자' 이 모든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그 변화무쌍함을 적절히 표현하기 힘든 인물, 티무르(Timur). 그는 토크타미시를 분쇄했고,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다른 모든곳과 비슷하게' 수많은 도시들을 파괴하고, 이미 질서가 있었던 곳에 파괴와 무질서를 남긴채, 그곳에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물러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티무르가 근방의 주요 도시들에 철저한 재앙을 안겨준 덕분에, '금장 호르드(Golden Horde)' 의 교역 기반은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티무르 이후 몽골의 통치자들은 이 새로 등장한 용맹무쌍한 러시아인들의 독립국을 복속하는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졌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이미 실질적으로, 동러시아는 타타르의 저주받을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 시켰습니다.


 1451년, 모스크바로 닥쳐온 타타르인의 습격은 분쇄되었고, 이후 많은 타타르인들은 모스크바의 지배자에게 신속(臣屬)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떠오르는 모스크바 국가는 현명한 대공의 통치 아래 러시아인들과 타타르인들이 섞인 백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몽골에게서 벗어난 모스크바 공국은 16세기 중엽 가잔과 아스트라칸에 대항에 동시베라이로 극적인 팽창을 이뤄내었습니다. 


 비록 카람진(Karamzin)의 말처럼 순전히 "모스크바의 위대함은 칸들 덕분이다." 라고는 말 할 수 없더라도, 몽골의 영향력을 폄하하던 19세기 민족주의 역사학자, 이를테면 세르게이 솔로비요프(Sergei Mikhailovich Solovyov) 등의 의견과는 다르게, 몽골이 남긴 영향력과, 거기서 얻은 경험이 모스크바 공국에 아무런 교훈도 주지 못했다고 보기가 더 힘들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에서 보면, 모스크바 공국은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가 결합하여 탄생하고 그 두가지 요소가 이후로도 약간이나마 공존하고 있는 모습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적 ─ 타타르의 군사 대형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고, 금장 호르드의 계승 국가들에게 먹힐 초원 특유의 정치술 역시 대단히 잘 알고 있었으며,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유목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정주 사회는 놀라운 속도로 ─ 흡사 가장 강력한 유목민들의 팽창 시기처럼 ─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흡사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2세기 후, 저 동쪽의 대청제국, 만주족들이 세운 그 왕조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가졌고, 이와 비슷한 장점을 가졌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들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공국은 16세기 중반 초원의 카잔 칸국을 정복함으로서 동방으로의 어마어마한 대팽창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민족주의 역사의 서술을 따르자면, 이는 부상하는 기독국가인 모스크바 국가가, 영광과 광휘를 몸에 걸치고 신념과 정의의 길을 걸으며, 덜떨어진 투르크족,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몽골 부족등, 킵자크 칸국의 시대착오적인 패잔병 집단을 몰아내는, '성전' 을 수행하는 '십자군 전쟁' 의 모습이 됩니다. 이는 나중에 러시아 정교의 성직자들이 공국의 정복을 정당화 시키면서 나온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카잔 정복을 완료한 모스크바는 이전과는 또다른 모습이 되었고, 제국으로 성장하는 국가의 모습을 살찌우고 드러내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영토적 야망과, 통치에 대한 야심을 충족시킬 '부'를 찾아, 초원을 넘어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팽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큰 비용이 필요하지 않고, 저비용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할 수 있으며, 차르의 이익을 위해 원주민들을 쥐어짜내어 부를 만들 수 있는곳.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동쪽으로의 시선을 완전히 거둘 순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러시아인들의 땅이 있었다. 항상 하나의 러시아 땅. 지금은 카잔의 도시들이 서 있는 곳."
 ─ 카잔의 역사(Kazanskaia Istoria),1590년대


 러시아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러한 팽창과 전쟁에 역사의 선배들이 그러하였듯, 거룩한 종교과 신의 섭리를 끌어들여, '사악한 어둠의 이교도 세력' 과, '숭고한 빛의 기독교 세력' 간의 충돌로 묘사, 정당화 하였습니다. 기독교도들의 죄와 악행이 러시아가 패배한 원인이었고, 신이 은총과 정의를 위해 개입하여 러시아가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인식에서는 그들의 팽창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복잡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외부 세력이 아니라, 신의 섭리를 이해못하거나 야만적인 '내부 반란자' 로 취급됩니다. 


 이러한 인식과 정당화는 또한 청나라 역시 그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윤리가 종교에 우선하는 동아시아의 특성상 종교간의 대립은, 중국에서는 이렇게까지 강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저술가들이 황제의 승리 뒤에는 하늘의 분명한 뜻이 있다고 여기면서, 대항하는 자들을 천명을 모르고 거부한 도적때 정도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왕조들이 가장 팽창하였을때 중앙유라시아의 여러 국가와 맺은 지속성을 끌어들여, 그 '지배권' 을 주장했습니다. 즉, 청나라에 저항하는 독립적인 몽골 국가들은, 원래부터 중국 땅인 곳에서 일어난 '내부 반란자' 라는 것입니다. 내부의 반란을 평정하는것이니, 군사적인 공격과 통제도 전혀 이상할것이 없고, 본래 중화의 소유였던 대지를 원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것이니, 그 정복활동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카잔 등을 접수하고 잠시 숨을 고르던 러시아는, 30여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동방으로의 팽창을 시작했습니다. 막아세우는 유목 국가의 칸도 없고, 복잡한 외교도 필요하지 않은 시베리아의 삼림에 그들은 하나씩 요새를 세우고 주요한 강에 거점을 세우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섰습니다. 태평양에 도달하고,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이를때까지 말압니다.


 이 전진을 대전진이라고 표현하긴 어려운데, 마치 서부로 금을 찾아다니던 미국인들처럼, 상인과 기업가, 점령지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군관들이 불안정하게 감독을 하고, 적당한 대리인들이 천천히 작은 전진기지를 세우면서 현지 부족들과 협상도 하고 하면서 걸어나간 것입니다. 애시당초 동쪽에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할 세력은 없으니 거대한 방어선이나 대규모 원정군은 필요 없었고, 주 목적은 대단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모피였습니다. 수달, 담비, 밍크 모피 등등을 얻어서 많은 이윤을 내고, 또 그것들이 고갈 되자 더 찾기 위해 동진을 계속해 나간 것입니다. 
 

 시베리아의 고독한 숲 속에서는 농업 생산물이 매우 적었고, 사냥에 강점을 보이는 현지 원주민들과는 달리 러시아인들은 지리를 전혀 몰랐기에 함부로 사냥할 수도 없고, 보급품도 없고 증원 병력도 없는 전진기지들 안에서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1640여년 아무르를 탐사한 바실리 포야르코프(Vasily Poyarkov)의 탐험대는 기아로 거의 죽어가다가 이 지역에 도착했고, 이곳에 '기름진 들이 있고, 엄청난 인구가 농사를 지으며, 검은 담비와 물고기가 넘치는 넒은 강 계곡을 발견했다' 고 보고 했습니다. 이후 하바로프는 1650년에 알바진에 요새를 구축했고, 현지의 다우르인들이 말로만 듣던 중국 제국에 조공을 바친다는 말을 듣고,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 중국을 공격, 그 부를 빼앗을 맹랑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르의 넘치는 부에 대한 과장된 소문으로 군인, 사냥꾼, 상인, 관리, 정교 성직자, 도주한 농노, 기업가와 상인, 전쟁 포로, 코사크인, 장인, 모험가, 유랑자, 범죄자, 탈영병등등 가지각색의 세력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습니다. 1719년에 시베리아의 성인 남성은 16만 9천여명이었고, 1792년에는 41만 2천여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이 지역 소수민족들에게 곧바로 나타났는데, 오랜 시간 지역에 거주한 다구르 족의 추장 간티무르(Ghantimur)가, 1667년 가족과 부락 300여명을 이끌고 러시아 관할 지역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는 청조에 귀부한지 15년이 지났는데, 청나라는 이에 동요하여 러시아 측에 간티무르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그는 돌아오지 않고 러시아에 머물었습니다. 15살의 강희는 이 사안을 가볍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이것이 잘못되면 변경에서 청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나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러시아가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과 면담을 하자고 직접적인 요구를 했으나, 아무 소득도 없었습니다.






 만약 이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면, 밀라바노프를 비롯한 일행은 능지처참이 확실할테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러시아 어에 능숙한 통역관이 부족하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희는 오히려 이들을 매우 우호적으로 접대하고, 예물도 많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간티무르를 자신에게 넘겨주고, 이후 문제를 만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강희의 명령은 몽고어로 한번 번역되고, 러시아인들이 그 자리에서 몽고어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전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676년 다시 돌아온 그들은, 러시아의 조회에서는 중국 황제의 친서에 대하여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오, 사정을 알 수 없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남극대왕 | 작성시간 12.09.02 가르단이 나오는군요 ㄷㄷㄷ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