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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31) ─ 자비와 책략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9.04|조회수639 목록 댓글 4

오이라트의 네 부족은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편의를 위하여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달라이 타이지가 이끄는, 데르베트
 카라 쿨라가 이끄는, 준가르
 바이바가스의, 호쇼트
 코 우를루크가 이끄는, 토구트


 이중에 코 우를루크가 이끄는 토구트는 다른 부족들에 반발, 25만의 인구를 이끌고 볼가 강 쪽으로 떠나버렸다는 사실도 앞에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족은 아무래도 준가르 입니다. 준가르의 카라 쿨라는 1635년에 사망했고,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그가 사망하면서 자신의 아들, 바투르 홍타이지(통치 1635~53년)가 스스로를 '오이라트의 유일한 칸, 준가르 칸국의 건설자' 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칸'의 호칭을 사용한건, 1678년 가르단에 의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홍타이지'는 칸 다음 지위로서 부사령관에 해당하고, 바투르는 칸이 아니었기에 홍타이지 칭호를 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오이라트 부족 4개(이제는 3개) 중에, 칸이라는 지위를 쓰는것은 호쇼트의 바이바가스 뿐이고, 바이바가스의 후계자는 그 칸 지위를 물려받은 구시 칸입니다. 이 구시칸을 청나라의 시대와 비교하면 중원에 입성한 순치제와 동일한 시대의 인물로서, 달라이 라마 5세가 북경까지 갈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준 인물이 바로 구시 칸입니다.


 구시 칸의 딸은 바투르 홍타이지와 결혼했습니다. 둘은 상당히 가까운 관계가 되었고, 구시 칸과 바투르는 카자흐나, 코코노르(Koko Nor 칭하이 호)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에 같이 참여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투르도 점점 입지가 성장했습니다.

중국에서의 칭하이 호의 위치

코코노르(칭하이 호)의 위치와 모습


 1635년, 10만에 달하는 호쇼트 부족이 코코노르 부근으로 떠나버렸습니다. 토구트처럼 멀리 떠난것은 아니었으나, 오이라트 공동체는 이제 숫자가 더 적어졌습니다. 바투르는 이들을 준가르의 통치 아래로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원정을 떠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모스크바에 사람을 보내 러시아와 연대를 생각하고, 차르를 등에 엎고 주위의 여러 작은 소수민족들을 때려눕히고, 교역권을 장악하여 힘을 키우려 했던 것입니다.


 목표가 어느정도 이루어지는 듯 하자, 바투르는 좀 더 본질적인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러시아에 돼지와 닭 등을 요구했고, 무엇보다 목수, 석공, 그리고 무기 제작자 등을 요구했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돼지와 닭들은 보내주었지만, 무기 제작자만큼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투르는 아랑 곧 하지 않고 현재의 이르타시 강, 야마시 호 사이 부근에서 석조 요새, 사원등을 지어 '도시'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그 둘레는 백여미터, 높이는 6미터 정도였습니다. 바투르 사후에 이 도시들은 쇠퇴했고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바투르는 생필품인 소금을 놓고 러시아와 몽골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이를 중간에 조정하면서 또 이득을 보기도 합니다. 일전의 자야 판디타, 그리고 바투르 홍타이지의 힘으로 대통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1640여년, 쿠릴타이(대회의)가 열렸고, 이에 할하 몽골, 코코노르, 볼가 칼묵, 티베트 불교 대표 등 초원을 구성하는 여러 세력들이 모여 내부 갈등을 피할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참여하지 않은것은 동몽골의 차하르뿐이었는데, 차하르의 링단 칸은 이미 (만주족의)홍타이지에게 패했고, 만주족의 세력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1640년의 쿠릴타이에서 서로는 한 부족을 공격하면 다른 부족들이 벌금을 물리고, 외부에서 침략하는 세력이 있다면 서로를 보호하며, 각자 초지를 지키고 자신의 부족으로 온 도망자를 돌려보내자는 논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정식으로 몽골족의 공식 종교로 선포했습니다. 이 1640년의 회의는 몽골 국가의 '제도화'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비록 국가 형성의 측면에서 중국, 러시아, 일본, 만주 등등에 비해 훨씬 뒤쳐져 있던 시기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바투르는 도시를 만들고, 교역을 통해 백성을 번영 시키려 하고, 무엇보다 오이라트의 타타르의 몽골의 연합체를 구성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수많은 선대 유목 영웅들이 그러하였듯, 1653년 바투르가 사망하자 그 모든 노력은 한꺼번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바투르의 아들 셍게가 그를 이었지만, 형제들이 싸워 1670여년에 셍게가 죽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가르단이 등장합니다.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인 가르단은 본래 티베트의 라마 사원에 맡겨졌습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던 가르단은 이 혼란 속에 귀국하여, 계승 싸움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일에도 성공합니다. 이렇게 가르단이 새로운 준가르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을 때, 바로 동쪽에 강희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의 관계는, 처음에는(비록 의심이 그 안에 서로 있었다 할지라도) 우호적이었습니다. 전대의 구시 칸을 비롯한 많은 몽골족들이 청나라에 조공을 보냈고, 이런 선대의 전례에 따라 가르단도 1677년 조공 요청을 하여, 청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이 당시 청나라 조정은 가르단이라는 인물의 정보를 이렇게 종합했습니다. "거칠고, 교활하고, 싸움을 좋아하고, 재빠른 시기에 수많은 서몽골 부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라고 말입니다. 


 청나라는 당초에 이런 몽골의 부족들에게 공평하게 조공을 받고, 황제의 권위와 자비를 내세워, 그들이 동등한 조공국들임을 강조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르단 세력은 빠르게 확장했고, 때문에 조공국들 간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청나라의 기조도 흔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원의 싸움에서 밀려나온 유목민들이 중국의 영토로 밀고 들어오는것입니다.


 1677년에 이르면 가르단은 자신의 장인이 수장으로 있는, 호쇼트를 공격하여 그 칸을 죽였습니다. 가르단에게서 도망친 패잔병들은 오르도스 지역의 몽골족들을 대규모로 공격했고, 깜짝 놀란 몽골의 친청파 세력들은 청나라 황제에게 가르단이 중국을 공격하려 한다고 전했습니다. 혼란이 이어지는 와중에 1679년 가르단은 하미, 투르판, 동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들까지 자신의 세력하에 두었습니다. 이해, 삼번의 난에서 활약하던 장군 장용은 가르단이 강희에게 바칠 목저으로 준 말과 모피를 받았고, 동시에 이런 서신도 받았습니다.


 "서북 지역은 내가 완전히 점령했다. 단지 그대들의 선조들(명나라)과 우리의 선조들이 분할했던 서해(칭하이)만 그대가 통치하고 있다. 나는 이곳을 되찾고 싶다."


 하지만 가르단은 감히 아직 청나라에 도전하진 못했습니다. 장용은 가르단이라는 인물의 정보를 더 모았고, 몽골인 수하들로부터 그가 1644년 생이고 당시 36세의 젊은이이며, 난폭하고 악독하고, 주색에 빠져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장용의 생각에 가르단이 중국을 공격할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의 목적은 과거 명의 통치자들이 정한 초원과 제국의 경계선을 기점으로, 초원을 나눌 생각을 하고 있는것, 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가르단은 그 시점까진 제국에 대한 명확한 공격 의사를 보이진 않았으나, 강희가 오삼계와 싸우고 있는 틈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늘리려는 시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달라이 라마의 승인을 받고, 부슈크투 칸(Boshugtu Kha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부슈크투는 몽골어 보슈그에서 파생된 말로, 보슈그는 하늘의 명령, 운명, 명령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청나라 조정에 보고했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 어떤 몽골의 칸도 황제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고, 공식 인정을 받지 않은채 새로운 칭호를 발표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지만, 일단 가르단이 이렇게 통보하는것이 항복을 하는듯해 보였기에, 넘어갔습니다.


 이 요청에 대한 답례로 강희는 사절단을 가르단에게 보냈습니다. 가르단은 처음으로 황제의 사절을 맞아보게 되자 매우 기뻐했고, 사절단에게 청나라 내부의 소식을 물어보았습니다.


 "듣기로는 최근 반란이 있었는데, 지금은 진압되었다고 합디다."


 "최근에 반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제 폐하는 무기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어하시지 않아, 점차 그들이 항복하도록 유도하여 일부는 항복했고, 일부는 제거되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이때 강희는 상당히 세심한 배려를 했는데, 티베트어를 아는 사절단을 보낸것입니다. 티베트에서 공부를 했던 가르단은 꽤나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직접 사절단들에게 불경의 영창을 들려주었습니다. 매우 기분이 좋아진 가르단은 수차례 사절단을 호화스럽게 대접하고 연회를 벌이고, 많은 선물을 주어 보내었습니다. 청은 가르단을 지원하여,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안정된 조공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강희는 또다른 응큼한 속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의 사절단은 역으로 되려 가르단에게 조공 사절단을 강력하게 통제하라고 압박을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르단의 사람임을 자처하며 왔지만, 조공 증명서 같은것은 없었습니다. 가르단은 자기가 보내는 사람들 자체는 공식 인장을 주었지만, 데르베트, 호쇼트, 토구트 같은 다른 부족은 가르단이 공식 증명서를 해주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강희는 가르단이 보내는 사절단의 숫자를 제한하기 시작합니다. 사절단은 처음에 수천명에 달해서 황도로 가는 동안 온갖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후 200명으로 한정해버렸습니다. 나머지는 국경도시에서 교역을 하는 수준이었고, 믿을만한 감독관이 이를 철저하게 감시했습니다. 중국 내에서 사절단이 범죄를 일으키면 중국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르단은 이것이 진심인가 싶어 이듬해 300여명을 보냈지만, 20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백여명은 모두 추방당해버렸습니다. 가르단은 이에 항의해서 예전에는 이렇게 숫자를 제한한 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청나라 조정은 규정이 바뀌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애매모호 해졌습니다. 청나라는 분명 가르단의 조공 특권은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특권을 인정하면서 교역 제한을 벌이자, 가르단의 혈족들은 독자적인 교역의 기회를 잃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비난하는 대상은 강희가 아니라 가르단이었습니다. 가르단이 다 해먹고 자기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고 화를 내면서 말입니다. 그들 모두는 가르단의 사절단만 베이징으로 갈 권한이 있으며, 자신들이 무얼 해보려면 가르단 앞으로 가서 인장을 받아야 하는 현실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갑자기 불만스러운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몽골족은 서로를 향해 칼을 들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강희는 이 긴장을 지켜보면서, 몽골족들이 서로 싸우는것을 잘 구경하려는 모양새만 취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만히 자신의 이미지를 꾸몄는데, 가르단에게 당해버린 서몽골의 부족장들을, 달라이 라마와 협의해 살 곳을 마련해 주면서, "가르단이 이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 했다는것을 강조하며, 자신의 자비로움을 선전했습니다. 강희는 여러 몽골의 자삭, 라마, 달라이 라마의 대표단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라마들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일반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올로드 귀족들은 라마에게 선물을 보내고, 그 법들을 존중하며 따르고 있습니다. 나는 (가르단에게 죽은 호쇼트 지도자의 아들)롭장 군부 랍단과 (죽은 호쇼트 지도자의 조카)바투르 에르케 지농이 (죽은 호쇼트 지도자)오치르투 칸의 후손이며, 오치르투 칸이 오랫동안 라마들의 법을 따라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가난으로 내몰렸는데, 어찌 그대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강희는 라마들에게 이들을, 황제의 보호 아래 살 곳을 만들어주고 정착시키는 일을 맡겨, 대외 선전 효과를 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강희는 자비롭다는 평판을 얻게 되고, 또 티베트 라마들에게는 청 정권과 공유되는 가치를 호소함으로서, 티베트 불교 교파가 몽골족 지지에서 만주족에 대한 지지로 흐름을 타게 하는데 한걸음을 내딛게 했습니다. 가르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희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르단도 교활했지만, 강희는 그보다 더 교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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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남극대왕 | 작성시간 12.09.04 가까운치킨 가르단 위에 먼치킨 강희 ㅋㅋ
  • 작성자사생 | 작성시간 12.09.04 천재 임금이 요기잉네?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9.06 우에스기//제 개인적 소견으로는 이미 유목민이 세력이 기울었기에.. 얼마못가 로스케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카자흐족 털면 뭐해요.. 로스케가 있는데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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