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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32) ─ 가르단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9.06|조회수796 목록 댓글 4



 찰스 보든(Charles R.Bawden)이라는 인물은, 몽골이 청나라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놓고, '독립 상실' 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몽골족이 보기에, 만주족의 정복은 현대적인 용어를 쓰자면 '독립의 종말'을 의미하지만, 이것이 어떤 종류의 독립이었는지, 또 17세기 상황에서 진정으로 독립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민족(국가)의 독립이라는 것이 정치적인 최고의 선으로 생각된 것은, 단지 비교적 최근이었으며, 우리도 현재 몽골 역사가들 처럼 독립 상실을 '악' 그 자체로 봄으로서 현대적 가치들을 전면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 그 가치들을 적용시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17세기 몽골족에게는, "몽골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결속력 있는 의식이 없었고, 충성은 개인적이었으며,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었다." 는, 매우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보든의 이 말은 확실히 극단적이지만, 확실히 몽골 역사가들의 과거를 다루는 시각에 (어느 나라나 그렇지 않느냐, 고 하면 그것도 맞는 소리지만)민족주의적 시각이 많이 배여있는것은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만리장성을 비롯한 북방의 장성들은 되려 중국의 민족주의 서술에서는 그 정도로 지대한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청의 경계선들을 계승했고, 결국 '외적과의 전쟁' 아닌, '내부 반란' 이라고 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몽골 역사가들에게 '마오주의적 역사 위조' 비난 받는 식의 서술을 보면, '정복' 이라는 서술을 거의 쓰지 않고, 청조가 정복한 영역들이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판도에 달하는데도, 장대한 정복전쟁이라는 이미지보다는 되려 '통일' 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덤으로 마오쩌둥의 말까지 인용합니다. 


 "우리나라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인구 대국이다."


 반면에, 중국과 몽골이 완전히 별개이며 동시에 정치적 - 문화적으로 1:1의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몽골 역사가들에 의해서, 오히려 중국인이 쌓은 장성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가 됩니다. 이 장성을 기점으로, 몽골의 자립성이 옹호되고,  중화 세계의 관내와 유목 세계의 관외가 구분이 되어지면서, 더 나아가는 경우는 청에 대항한 가르단, 그리고 훗날의 아무르사나(Amursana)같은, 청과 대치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부합되어서 그랬다기 보다는 '민족해방운동' 적 시각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합류한 몽골 왕공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 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 객체라기보다는, '민족의 적' '타도되어야할 봉건적 잔재' 같은 식으로 발전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몽골적이 실제로는 서로간에 매우 분열이 되고, 대립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각 부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오히려 중국보다는 서로 그 자체였습니다. '민족분열론' 같은 소리이긴 하지만, 이 때 대부분의 몽골 지도자들은 이익을 위해 행동했고, 이것은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 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족'을 위해 이익을 노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툼에 청조가 끼어든 셈이고 말입니다.


 몽골의 형세를 보면, 우익(서쪽) 자삭투 칸과 알틴칸, 좌익(동쪽)에는 투시예투 칸과 체첸 칸이 포진하는 형세였습니다. 강희제 즉위년인 1662년, 자삭투 칸(Jasaghtu) 완슈케는 다른 부족장 롭장에게 살해되었고, 강희는(물론 10살도 안된 어린아이의 발언이라기 보다는, 오배 등의 발언으로 봐야할) 청의 조공국 중 하나를 공격했다고 롭장을 질책했습니다. 좌익의 투시예투 칸은 자삭투 칸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와서 롭장을 공격했고, 롭장은 러시아 경계로 달아났습니다. 그 혼란의 와중에 많은 백성들이 투시예투 칸의 영지로 도망쳤습니다.


 1670년. 투시예투 칸의 도움으로 죽은 완슈케의 형제, 첸군이라는 사람이 자삭투 칸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서 평화가 찾아왔으나, 문제는 투시예투 칸이 일전에 도망쳐 온 자삭투 칸의 백성들을 송환하는 일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가르단은 이 분쟁에 대해, 자신이 티베트에서 공부했던 인맥으로 달라이 라마를 설득, 자삭투 칸을 지지하도록 노력했습니다.


 1684년까지 시간은 흘렀고, 자삭투 칸의 백성들은 여전히 돌아오기를 바랬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습니다. 자삭투 칸은 강희와 달라이 라마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강희는 달라이 라마에게 이 일을 맡기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대, 자비로운 이, 달라이 라마……모두가 그대를 존경하며 할하의 수령들은 그대를 숭배하고, 그대의 가르침과 법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대는 진심으로 이 왕조에 심복(心服)하고 있습니다. 짐은 자삭투 칸의 백성들이 함께 모이지 못하는 것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상호 살육과 전쟁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두 칸이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짐의 공평한 자비심을 따라, 자삭투 칸의 백성들이 송환되게 하고, 그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대는 고위 라마 한 사람을 보내어 나의 고위 관리와 할하 경계에서 만나게 하고, 그 시간을 정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1686년이 되자, 강희는 양익이 또 싸움을 벌여 죽고 다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사절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습니다. 여기에 양익의 칸과 귀족, 달라이 라마의 사절들이 있었고, 약간 특이한 인물로 몽골의 최고 불교 승려이자, 자신이 달라이 라마와 동격이라고 주장하던 젭종단바 쿠툭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문제를 일으킨 투시예투 칸의 형제입니다. 강희의 사절은 그들 모두에게 선언했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한 조상의 후손들이다. 만일 그대들이 계속 싸운다면, 그대들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 나는 그대들의 평화로부터 얻을 것은 사실 없다. 오히려 그대들간의 싸움이 이득이 된다."


 그러면서 몽골의 평화가 자신에게 별다른 이득은 없지만, 그럼에도 몽골의 평화를 바란다는 식의 선언을 했습니다. 몽골 왕공들은 황제와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는 감사를 표했지만, "평화를 만들던지", "싸우던지" 는 자신들의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지는 않아서, 1686년 10월 10일, 칸과 몽골 왕공들, 60여명이 넘는 교관들, 젭종단바 쿠툭투와 달라이 라마의 사절단, 그리고 부처의 그림 앞에서 그들은 영원한 평화를 맹세하고, 백성들을 본래 사는곳으로 돌려보내자고 약속했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모두 해결된 듯 하였고, 강희는 평화가 회복된 것에 대해 치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르단 이었습니다. 가르단은 이 회합에서, 의례가 무시되었다고 불평했습니다. 조정의 이번원(理藩院)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이, 달라이 라마의 종파인 황모파(Yellow Hats : 황교)의 의례를 적절하게 따랐다고 주장했지만, 가르단의 불평은 젭종단바 쿠툭투 때문이었습니다.


 "회합에서 젭종단바 쿠툭투는 달라이 라마의 하급자이면서도, 달라이 라마의 대변인 바로 건너편에 앉음으로서, 성직자의 위계를 어겼다."


 몇번 이야기 했지만 가르단은 티베트에 가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공부를 했고, 라싸의 달라이 라마는 그에게 있어 정신적인 스승입니다. 인생의 스승이자 종교적 지도자의 권위에 (가르단의 눈에는) 얼치기 같은 젭종단바 쿠툭투가 도전을 하자 몹시 불만스러워 했던 것입니다. 1697년 가르단은 본영을 본래 자신이 있던 알타이에서 동쪽으로 옮기고, 투시예투 칸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자삭투 칸의 추종자들을 소환해서 만났습니다. 투시예투 칸은 두려워하면서 가르단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지만 강희는 여전히 태평한 태도로, 자신은 '평화'를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가르단에게도 회유적인 조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도움이 가망없다고 여겼는지, 선공을 날린것은 오히려 투시예투 칸이었습니다. 1687년, 투시예투 칸은 자삭투 칸의 영지를 침범, 칸을 죽이고 백성들을 흩어지게 했고, 무엇보다 이 곳에 머물던 가르단의 동생 도르지자부까지 휘말려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가르단은 그 즉시 동생의 복수를 위해 투시예투 칸을 격파했고, 몽고의 오보르한가이ㆍ아이마크 북부에 현존하는 외몽고 최고의 불교사원, 에드데니 주(Erdeni zuu)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사원과 젭종단바 쿠툭투의 경전을 파괴하여, 달라이 라마에 대한 불경과 동생에 대한 원한을 값아버렸습니다. 


 에르데니 주


 가르단의 확실한 공격으로 할하 연맹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도처에서 할하 몽골족들은 천막과 재산, 말과 양을 모두 버리고 그저 남쪽 만 바라보고 밤낮을 쉬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일부는 북부, 즉 러시아로 달아났는데, 러시아 특사 표도르 알렉세예비치 골로빈(Fyodor Alekseyevich Golovin)을 만나서 싸웠지만 패배했습니다. 몇몇 추장들은 가르단으로부터 보호해준다면 차르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했으나, 골로빈은 이 충성이 '영원한 것' 이어야 한다고 했고, 몽골족은 한시적인 충성을 원했습니다. 여기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일부는 터벅터벅 내려와 가르단에게 항복했습니다.


 이제 가르단의 공격으로 북방의 정세는 묘하게 변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사태를 만든 가르단의 동기는 무엇일까?


 중국의 역사가들의 시각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불경을 내세운 가르단의 주장을, '속이 시커멓고 늑대와 같은' 가르단의 야심을 숨기기 위한 침략 구실로만 여기는게 보통입니다. 또 모든 몽골 민족을 통치하려는 '거대한 야심'을 지닌 가르단의 계획의 일부로 여기는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티베트 불교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달라이 라마에게 경의를 표하는데 대단히 열성적이었던 가르단의 모습을 보면, 그가 일시적인 분노로 일을 저질렀다고도 생각해 볼 수가 있고, 또 마찬가지로 동생이 사망한것이 그의 즉흥적인 결정 ─ 사원을 약탈하는 ─ 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Mongghol borjigid obogh-un teuke라는 자료를 쓴 로미(Aci Lomi)라는 인물은 만주족 정권에 우호적인 동몽고인들으로 1700년대에 살았는데, 가르단이 할하를 공격한 이유를 거대한 음모나 계획의 일부가 아닌, 형제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도, 강희의 원정에 동행하면서 이와 같은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가르단은 엄청난 야심을 바탕으로 계획을 저지른것이 아니라, 스승과 형제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원인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으나, 가르단의 성격을 전혀 반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늑대와 같은 야심'을 지닌 음흉한 계략가는 온데 간데 없고, 불같은 성격과 의리를 지닌 사나이가 나올 수도 있는 법입니다.


 이 시기 청나라 조정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패닉에 빠져 국경으로 도망쳐 오는 할하족의 숫자가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라마승 2백여명과, 2천 가구, 총 무려 2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중국의 도움을 갈구하고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우선 소요 사태를 막기 위해 2천명 이상의 병력을 국경에 배치한 강희는, 의정왕대신회의에 방안을 논의하게 했습니다.


 의정왕대신회의는 이 불쌍하고 절망적인 처지의 몽골인들을 몰아내는것은 불가능하지만, 역으로 그들을 한 곳에계속 머물게 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가축들 때문에 초지가 박살이 나버릴 것이라고 간언했습니다. 강희는 우선 한달만 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가르단의 서신이 왔습니다.


 가르단은 자신의 공격이, 달라이 라마에게 불경죄를 범한 칸과 쿠툭투를 벌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거주지들을 파괴함으로써, 달라이 라마의 영혼을 위해 싸웠습니다! 황제는 쿠툭투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 대신 체포하여야만 합니다."


 강희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양쪽 어느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피난민들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다음 달이 되자 사태는 나아지기는 커녕, 되려 피난민들만 늘어났고, 가르단은 조심스레 청나라 국경의 7일 거리인 후룬베이얼(Hulunbuir)까지 도착했습니다. 강희는 1만여 명의 수비병을 더 파견했고, 가르단에게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투시예투 칸과 화친하여 평화를 유지하자는 이야기인데, 가르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투시예투 칸과 화친을 맺는다면, 내 형제 도르지자부의 죽음은 누가 보상한단 말입니까? 내가 모든 노력을 기울이면, 5~6년이면 할하를 멸하고, 젭종단바 쿠툭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투시예투 칸을 잡으려 간다며, 국경에서 철수 했습니다. 투시예투 칸은 공포에 질려 강희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여전히 강희는 어중간한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시커먼 속내를 슬쩍 내보였습니다. 도와줄순 있지만, 대신에 칸은 청에 항복해야 하며, 앞으로 청의 감시 아래 정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강희는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1688년 8월 28일, 투시예투 칸과 가르단은 초원에서 3일간의 대회전을 벌였고, 가르단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투시예투 칸은 간신히 사막을 가로질러 쿠툭투의 영지로 도주했습니다. 강희는 국경 수비병을 더 증강시켰지만, 겨울이 다가오는데 군량과 건초가 바닥나고 있었고, 무엇보다 군량이 몽골 피난민들을 돕는데 엄청나게 소모가 되자 부분적으로 철수를 시키는데 이릅니다.


 1689년 봄이 되면, 무려 2만이나 되는 할하족이 몰려와 구호품을 요청했는데, 이를 충족시킬 자원은 턱도 없이 부족했습니다. 국경지대가 아비규환 그 자체가 되자 강희는 은근슬쩍 가르단의 편을 들면서 되려 투시예투 칸이 먼저 잘못했다고 비난했고, 가르단이 저지른 불교 사원 공격과 불상 파괴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달라이 라마에게 부탁하여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권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패배를 나의 이익으로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항복한다면, 나는 천자로서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짐이 아니면 누가 돌볼 것입니까? 나는 원한다면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대 라마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그들을 돌볼 것입니다. 나의 목적은 할하와 올로드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대가 가르단에게 라마들을 보내 평화를 촉구한다면, 그는 그대의 법을 따를 것입니다."


 그런데 할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움직인 가르단에게, 커다란 변고가 닥칩니다. 의외로 이 문제는 청이나 다른 몽골 부족이 아닌, 자신의 본토인 준가르 부족 그 자체의 문제였습니다. 가르단의 형제 셍게는 일전에 살해되었고, 그 혼란 중에 가르단이 티베트에서 귀국하여 정권을 차지했던 것인데, 셍게의 아들 체왕 랍탄이 이제 나이가 차서 가르단에게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1688년, 가르단은 체왕 랍탄을 죽이려고 했고, 체왕의 형제를 죽였지만 그는 도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가르단이 할하를 공격하기 위해 떠났을때, 수하를 이끌고 하미를 공격했습니다.




 가르단은 결국 복수를 위해 돌아와야 했으며,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에 대한 압박은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1689년에 가르단을 만난 청나라의 사절은, 가르단의 백성이 전쟁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인육을 먹으면서까지 힘겹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체왕 랍탄과의 싸움은 가르단의 세력을 갑자기 약화시켰습니다.


 바로 그때, 1689년 9월 7일, 청나라는 준가르와 몽골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칠, 하나의 조약을 제국 러시아와 체결했습니다. 바로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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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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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9.07 만리장성이라...... 뭐 우리나라도 고구려 이야기 하면서 많이 말하던 내용이긴 하죠..... 몽골 부족문제도...... 고구려 백제 신라를 생각해 보면............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2.09.07 가르단의 공격이 우발적 충동적이었다고 해도 개인적인 의리를 지키려는 순수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응징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생각됩니다. 스승이 모욕당하고 동생이 죽었는데 손놓고 구경만 하는건 초원의 전사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9.07 참고로 티벳불교의 전생 의미를 따져도 젭종단바가 가르단보다 아래입니다.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2.09.07 근데 강희제나 중국 역사가들은 갈단이 비열하다고 깠지만, 사실은 강희제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갈단과 평화 협상하자고 시간 벌고는 뒤로 몰래 증원군 불러와서 갈단을 기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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