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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45) ─ 끝없는 탄압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0.03|조회수568 목록 댓글 1




 옹정에게 사냥당한 융과다


 옹정이 강희의 유조를 조작했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 융과다가 그런 일을 했다, 고 주장을 합니다. 실제 조작을 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이니 그 점은 넘어간다 치고, 그만큼 융과다가 옹정의 황위 등극에 있어 중요한 측근이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당연히 옹정의 등극 이후 그는 권세가 매우 높아져 온갖 귀한 물품을 상으로 받았고, '당대 최고의 군계일학과 같은 대신' 이라는 극찬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융과다의 권세가 매우 높아지자, 이는 옹정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되었습니다. 옹정의 심리를 매우 잘 이해하는 융과다는 미리미리 자신의 재산들을 친구들과 여러 절에 분배했는데, 옹정이 가택 수색을 할 경우를 대비한 경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옹정에게 파악되었습니다. 낌새가 좋지 않음을 느낀 융과다는 자진해서 자리에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옹정은 융과다와 사이가 좋지 않던 공태라는 인물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렸습니다.


 융과다는 이렇게 조심을 거듭했는데, 옹정의 의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옹정 2년인 1724년 12월 13일, 하도 총독 제소륵이 상소문을 올리자, 옹정인 이에 대해 밀지를 내렸습니다. 연갱요의 잘못을 비난하며 융과다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입니다.


 "요즘 융과다와 연갱요가 권력을 믿고 위세를 떠는데 만약 조기에 방지하지 못하면 두 신하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그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기 바란다."


 이렇게 신하들에게 대놓고 특정 인물에 대한 험담을 황제가 내리니, 자연히 견제가 되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 이 무렵에는 연갱요에 대해 옹정의 미움이 극에 달한 시기였는데, 옹정은 연갱요 문제 처리 과정에서 융과다가 수작을 부렸다고 비난하며 그의 직위를 박탈했고, 융과다의 부하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융과다 역시 연갱요와 마찬가지로 재물을 탐하고 짐의 은혜를 배반 했으며, 권력을 휘두르며 당파를 만들었다. 그가 이제 그곳으로 갈 것이니 그대가 비록 과거에 융과다의 부하였지만, 이 소인배를 보더라도 예를 갖출 필요가 없다."


 옹정 4년인 1726년, 마침 체왕랍탄과 협상을 벌일 일이 있어 융과다가 가기로 했는데, 그 일이 끝난 후엔 러시아와 영토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는데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하게 융과다가 황실의 족보인 옥첩(玉牒)의 원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옥첩은 그 신성함 때문에 외부인은 사적으로 보는 것이 허락 되지 않고, 공적인 일로 볼때는 반드시 허가서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융과다가 옥첩을 사사로히 가지고 있는것은 매우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일단 융과다가 협상을 하려고 하니 기다렸다 조사를 하자고 했지만, 옹정은 기회를 놓칠새라 곧바로 융과다를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1726년 10월, 무려 41가지나 되는 온갖 죄목으로 그를 비난했는데 옳는 내용도 있었지만 말도 안되는 트집도 있었습니다. 분류하면 불경죄 5건, 기만죄 4건, 조정을 문란하게 한 죄 3건, 사악한 당파를 이룬 죄 6건, 불법 행위 7건, 부정 축재 16건에 가장 큰 문제인 옥첩의 사유화, 강희제가 하사한 어서첩을 함부로 보관한 죄, 좀 특이한것으로 자신을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에 대한 죄 등 온갖 종류의 죄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옹정은 그답지 않게 옛 정을 발휘해서, 세 칸짜리 집에 융과다를 유폐하고 죽이지 않았으며, 처를 노비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그 작달만한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1728년 융과다는 사망했습니다. 옹정은 장례를 치를 비용은 하사했습니다.


 옹정의 서슬에 당해버린것은 수누 일족도 있었습니다. 수누 일족읜 청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장남, 추옝(褚英)에서부터 시작하는 계보를 지녔는데, 추옝의 아들 예르가투, 그의 아들 투멘, 투멘의 아들 수누로 이어지면서 당시의 일족이 되었습니다. 옹정이 즉위할 무렵, 수누는 일흔여섯이나 되는 노인이었고 황족 중에서는 최연장자였습니다. 그의 아들은 열 세명이 있었는데, 문제는 셋째아들 수르기엔이었습니다.


 수르기엔은 기독교에 흥미를 느꼈고, 책을 구해서 보고 직접 신부들도 만나면서 그 색채가 진해졌고, 다른 형제들도 이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수르기엔은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열째아들 슈르첸은 바울로라는 세례명을 얻었습니다. 옹정이 구황자를 변방으로 보낼때, 수누의 여섯째와 열두째 아들도 이를 수행했는데, 이때 루이와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황자가 '사스헤'가 되면서 노골적으로 박해를 받게 되자, 그 불똥이 수누 일족에게도 튀어 옹정 2년, 수누 일족은 모두 만리장성을 넘어 변방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늙은 수누는 매일같이 나서서 자비를 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변방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수누를 필두로 한 남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병졸로 근무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황족이라, 처음에는 담당하던 인물이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주었지만, 그 담당자가 어느날 베이징을 다녀오더니 태도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수누 일족은 변방에서도 더 먼, 변방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눈비를 피할 시설도 없고 땔감도 구하기 어려운 신부쯔에서 일족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노인인 수누는 결국 견디지 모하고 사망했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집안에 예배당을 설치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면서 버텨냈습니다. 하지만 '사스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이에 연루된 루이와 요셉은 베이징으로 끌려와서, 독방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목과 한쪽 팔이 무거운 쇠사슬을 묶은 채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형제들도 끌려와 재판을 받고 처벌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옹정은 아버지와는 달리 종교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엄격한 입장을 유지했기에, 기독교 집안인 수누 일족은 더욱 큰 낭패를 당해야 했습니다. 수누 일족의 열네 살 이상의 남자들은 신앙을 포기하라는 선언을 하라는 압력을 받았는데, 단 한명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단은 수누의 셋째아들 수르기엔만을 붙잡아 놓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형제 중에 열한번 째인 프란치스코 쿠르첸은 자원해서 형과 함께 구금되었습니다.


 그러자 수누 일족의 다른 여자들도 합의해서 출두해서 자신들을 잡아가두라고 했고, 수누의 손자 중에 여덞살이 넘는 남자아이 다섯명도 스스로 나서 자신을 기독교 신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를 다하는 데 있어서 열네 살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한편, 평생 연금을 당한 루이와 요셉도 신앙 포기선언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부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거부했습니다.


 "나는 천자를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섬길 것을 서약하고 그리스도교도가 되었습니다. 만일 이 행위가 천자를 노하게 하였다면, 나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서약을 깨는것은 불가합니다."


 옹정은 이에 대해 의외로 인내심을 보이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선조 이래의 전통을 버리고 서양인의 의식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이치에 크게 어긋나며, 잘못된 의식으로 하늘을 받드는것은 오히려 하늘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 신앙은 하나뿐입니다. 나의 신앙은 결코 천자께 대한 봉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가르침의 참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모시는 군주에게 충실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이 신앙을 포기한다면 도리어 천자를 기만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서양인의 신앙에 따르는 자는 서양인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공자의 도를 배우는 자는 공자의 자손이냐고 반문할 수밖에 나는 없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감옥 생활은 계속되었고, 모든 재산도 몰수되었습니다. 요셉을 따라 감옥에 들어가 시중을 들던 마샤오얼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러다가 교체가 되겠지 했으나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아 2년간을 감옥에서 기거해야 했습니다. 요셉이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만큼, 마샤오얼도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에 마샤오얼이 미쳐 날뛰려 하자 요셉이 그를 위로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서 번민은 생기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요셉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암기하고 있던 성경 구절을 반복했고, 쾌활하여 마샤오얼은 점차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그를 도와주려고 할 때면, 요셉은 항상 이렇게 거절했습니다.


 "나는 죄가 많은 인간이다. 이 죄는 이 세상에서 갚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육류가 가끔 나오면 모두 마샤오얼에게 주었습니다. 옥중에는 달력이 없어서, 금식하는 날의 날짜 계산을 잘못할까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수누 일족의 재산이 몰수당했을때, 노비로서 재산에 불과하던 마샤오얼도 감옥 근무에서 해방되어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되어 풀려났지만, 그는 오히려 성당으로 달려가 바울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시간만 나면 감옥으로 달려와 이전의 주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옹정 5년. 8월 14일 아침, 사흘 전부터 요셉이 구멍으로 넣어주는 음식을 받지 않자 기이하게 여기던 병사가 확인해보자, 그가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고 죽은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마샤오얼은 울면서 성당에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동안 남은 수누일족은 노비도 모두 빼았기고 수십명의 가족이 열여덞칸의 집으로 이주당했고, 조금의 식량이라도 얻으려고 하면 거절 당해 영양부족으로 쓰러져갔습니다. 토방에서 잠을 자고 죽을 마시면서 지내다가, 옹정 11년, 외몽골에 파견되던 한 장군이 돌아오는 길에, 수누일족의 한 여인이 물을 긷고 있는것을 보고 사정을 물었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몹시 슬퍼하며, 옹정에게 돌아가 사면을 청했습니다.


 옹정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자리에서 청을 들어주어, 흩어진 일가들을 불러 모아 팔기병의 자격으로 근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갑자기 생각이 변한 옹정의 의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옹정이 기독교 신자를 이렇게 탄압한것은 본인의 종교에 대한 혐오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는 이슬람교가 외래의 종교로 나라에 해를 끼친다는 의견에 대해,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아라. 이슬람교도, 불교도 외래라고 보면 외래다. 관습이 다르다고 해서 곤란하게 여겨서야 어찌 정치가 되겠는가."


 하고 나무랐습니다. 이런 일화도 있는데, 어떤 병사를 황제가 면접 형식으로 질문하여 대답이 만족하자 몹시 흡족해 했는데, 그러다가 이 병사가 기독교 신자라는 이야기를 듣자 급히 이것이 사실인가 질문했습니다. 병사가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자, 옹정은 깜짝 놀라 이 자가 미친것이 아닌가 하며 다시 한번 생각하고 대답하라고 권했지만,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신성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충실과 순종과 모든 미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옹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나가버렸는데, 한 환관이 큰 기회를 놓쳤다고 병사를 나무라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 남에게는 그럴싸한 말만 하다가, 다급해지니 거짓으로 천자 폐하를 속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다음 날, 그 병사는 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연갱요에 대해서는 옹정은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최대의 공신이었던 연갱요야 말로, 옹정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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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eichskanzler | 작성시간 13.02.18 청국 황족중에는 저런 고귀한 분들도 있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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