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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52) ─ 새로운 시대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10|조회수757 목록 댓글 4




 개인적으로는 본래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 출판에 관한 일이라던지, 이위(李衛)나 전문경(田文鏡)같은 옹정 시대의 신하들 등, 옹정의 일화를 좀 더 다루려고 했는데, 어차피 그의 성격적 면모와 주요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다 한 상황에서 이 이상으로 옹정시대를 묘사하는것도 너무 늘어지는 일이 아닌가 싶어서 그 다음 시대로 전개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는 건륭제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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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이전의 건륭제


 건륭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체스판의 말처럼 준비된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만주족의 지도자로는 처음 있는 일로, 지금까지 그의 전대에 있던 지도자들은 끊임없는 불확실성에 자신들의 답을 내놓아야만 했던 겁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졸개에 가까운 입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만일 조금만 모든 일이 맞물리지 않았으면 만주 집단의 존재를 지워버렸을 사르후 전투에 대해서, 홍타이지는 누르하치 사후, 이 불안정한 만주 집단과 경제적 위기,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륙의 정세에 대해서, 순치제와 섭정왕은 중원 진출이라는 역사적 대폭풍의 한 가운데서, 강희제는 막 탄생한 제국의 주변에 있는 모든 적으로부터, 옹정제는 불확실성한 황제의 자리를 두고 싸움을 벌였고, 다시 급격하게 성장한 제국의 온갖 모래알 같은 면모를 튼튼한 서까래로 깔아두는 그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17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그 해 4월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edric Handel)이 알치나(Alcina)를 초연했습니다. 북유럽의 스웨덴에서는 린네(Carl von Linne)가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 초판을 출간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으로 가 보면,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필라델피아에서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Poor Richard's Almanac)을 쓰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아오키 콘요우(青木昆陽)가 고구마의 재배를 권장하는 글을 썻습니다. 그리고 영조의 부인이었던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던 해 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 베이징에서 옹정제가 눈을 감았습니다. 대단히 독재적이면서, 놀라울 정도로 헌신적이며, 질릴 정도로 뻔뻔하면서, 숙연해지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있던 사나이의 종말이었습니다. 향년 57세, 수년간 계속된 과로는 천자의 몸을 상하게 했고, 1729년 심각한 병을 겪자 대신들이 황제의 가혹한 일정을 줄이게 하려던 시도도 모두 실패한 후였습니다. 


 당초에, 만주족은 본래 황태자를 정하는 관습은 따로 없었는데, 강희제는 자신의 맏아들이 후계자임을 진작부터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비극으로 끝났고, 옹정은 이에 따라 새로운 방법을 제시, 나무 상자 안에 종이를 집어 넣어 봉인해놓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 종이에는 새로운 후계자의 이름이 쓰여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밀 유지와는 별개로, 그 다음 후계자가 누가 될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미 정해진 정답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깊은 애도의 분위기와 되도록 삼엄한 경계심을 유지한 상태에서, 측근들은 신속히 황궁 안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아침 새벽이 되기 전에 새로운 황제의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모든 신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전시위는 먼저 옥자 위로부터 천을 두른 상자를 끌어내린 다음, 그 상자를 황제의 넷째 아들, 즉 보친왕 홍력에게 엄숙하게 제출했습니다. 그 옆에는 수석군기대신 장정옥, 만주족 오르타이 등이 서 있었습니다.


 24세의 보친왕, 홍력은 무릎을 꿇고 상자를 연 다음, 상자 안에서 조서를 꺼냈고, 봉인을 풀었으며, 아버지가 1723년에 썻던 유언을 열어보았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는 황제의 친필이 가리키는 이름은 바로 홍력, 자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홍력이 이때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계의 발표가 공표될때 그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고, 이제 건륭 연간, 제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놀라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강희제가 어린 손자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그 아버지가 이 덕택으로 황제가 된 후부터, 소년의 운명은 결정되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홍력, 이제 건륭은 그 자리를 쟁취하였다기 보다는, '결정 되어' 옥좌에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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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생전 옹정이 건륭에게 중요한 의례에 참여하는 임무를 맡긴 경우만 해도 최소 10건 이상이었습니다. 건륭은 황제를 대신하여 지난 2,000여년간 하늘과 땅의 연결을 상징해온, 오직 황제만이 중개할 수 있는 예식들을 주관하여 책임지고 맡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황제가 될 것으로 알고, 건륭 본인도 자신이 황제가 될 운명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만만하면서도 간헐적인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건륭이 1730년에 출간한, 유년기의 시와 수필을 모은 문집에서는 그런 면이 간헐적으로 들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종종 내가 쓴 글을 보고, 그 글에 비추어, 나 자신의 행동을 검토한다. 만약 내가 반성을 통해 행동을 고칠 수 없다면, 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할 수 없다면, 내게 그 보다 더한 치욕이 있겠는가?"


 "언제나 어떻게 황부(옹정제)로부터 깊은 총애를 받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황부께서는 수시로 가르침을 내리셨는데, 진심에서 우러난 분명한 방식이셨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현명한 사부들을 선발하여, 그들의 지도를 통해 무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셨다. 나는 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완벽해지기 위해 절차탁마했다. 또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가로이 쉬는 와중에도 공부에 전념하여 시와 책의 맛을 실컷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많고 또 극기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여, 성정의 함양도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상황이다. 밤중에 이 일에 관해 생각해보니 절로 끔찍할 뿐이다."


 이런 면모는 상당히 의외의 모습입니다. 건륭은 즉위 이후, 특히 말년에 이르러 사상 치악의 검열을 시도했고, 역사 왜곡, 정보 통제, 이미지 만들기 등의 작업등에 열중하였습니다. 따라서 강희제가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보였던 진솔함이나, 자신만만했던 옹정이 나타냈던 강렬한 인간성 등의 개인적 면모는 이후에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잘 만들어진 황제의 가면, 즉 고대의 기록이 부족하여 단편적인 업적만을 알 수 있었던 황제들 수준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꾸몄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렇게 건륭이 자신의 속내를 완전하게 틀어놓는 부분을 보긴 힘듭니다.


 건륭이 즉위했을때, 청나라의 인구는 1700년 경에 이미 1억 5000만명을 넘겼고, 이는 현대 한국의 4배이며 일본의 인구보다도 더 많습니다. 게다가 이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1800년경에는 무려 3억명을 넘어가는 가파른 증가 추세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영토는 만주와 화북, 강남과 대만을 포괄했으며, 내몽골을 실질적으로 내지화 시켰고, 북으로 러시아와 국경 협상을 벌여 국경을 안정화 시켰으며, 동으로 조선, 서로는 티베트의 복속을 받아 안전을 꾀했습니다. 서쪽으로는 하미나 투루판의 오아시스들까지 그 영역이 미쳤고, 준가르와 카자흐까지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황해의 바다와 고대 실크로드의 여명이 비치는 오아시스, 비옥한 토지에서 번화한 도시, 폭풍이 휩쓸고 간 동북 지역의 사할린에서 서남부의 눈 덮힌 히말라야의 장엄함까지. 열대 밀림 지대인 동남부의 서쌍판납(西双版纳), 몽골의 사막이 모두 건륭 개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영토적 부분에서 건륭이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는 또한 아버지의 도움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패가 증가하고 세수가 떨어지던 제국에서 옹정은 제국의 재정을 건전하게 회복시켰으며, 실질적으로 제국의 은 보유량을 570만 량에서 4250만 량에 이르는 수준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한 이 제국은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내지 중국의 영토와 백성은 중앙, 성, 부, 현 단위로 운용되는 관료제도를 통해 자금성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습니다. 경쟁적인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2만 5000여명의 관료들이 제국을 지탱하는 뿌리였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고, 지방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하고, 현지의 법률를 집행하고, 그들을 감시했습니다. 제국의 동남부에서는 일반적인 행정구조와 청조 조정에서 허가한 부족장 제도가 미묘하게 맞물렸고, 티베트에서는 청조의 지원을 얻은 종교적 지도자와 세속의 지도자들이 제국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것들은 세심하게 조사되어, 인구조사부터 곡물의 가격, 찻잎의 수확량, 강설량, 제방의 복구, 말의 가격, 기후, 파종량, 단위당 생산량, 수확의 등급에 대한 모든것이 조사되었고, 엄청난 양의 기록들은 한문으로, 일부는 만주어로 존재하여, 거의 모두가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의 도입부에 이토록 방대한 행정의 체계화와 효율성에 관한 한, 전근대의 어느 나라도 규모 내지 정교함의 측면에서 도달하지 못한 영역까지 청조는 이루었고, 이제 24세의 젊은이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하며, 기반이 확고한 국가의 주인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륭이 스스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아직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그가 통치 경험을 키울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인물들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장정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오르타이(악이태) 였습니다. 



 장정옥
 
 일전에 대학사를 지냈던 인물인 장영의 아들인 장정옥은 한족 출신이지만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요직을 담당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에게는 다른 신하들에게 없는 빼어난 문장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지를 작성할때 다른 신하들이 옹정제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던 반면에, 장정옥은 옹정제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해서 작성했는데, 그 속도도 대단 했습니다. 문어체도 아닌 구어체로 옹정제가 말을 해도 바로 옆에서 거의 동일한 속도로 문어체로 글을 작성해서 나무랄데 없는 문장으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옹정제의 다른 신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또 장정옥은 겸손하고 과묵했는데, 옹정제는 이 충실한 일꾼을 아주 마음에 들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수십년 동안 수많은 문서를 처리하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일하는데 시간을 보냈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장정옥이 아프다는 소리를 들은 옹정제는 갑자기 "팔이 아프다." 고 했습니다. 신하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장정옥이 아프니 나도 팔이 아프오."



오르타이

 오르타이는 만주인이었습니다. 같은 만주인의 처지, 옹정은 평소에 그에게만은 자기 자신의 속내를 자주 털어놓았는데, 본래 옹정이 오르타이를 알고 있던 것은 황제로 즉위하기도 이전의 일로, 내무부 관리인 오르타이의 처소에 사람을 보내 일을 부탁하다가 거절당한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황자 마마는 오로지 덕을 쌓고 공부에 여념이 없어야 합니다. 정치 운동 같은 일은 부디 삼가십시오."


 옹정은 이 대답을 듣고 오히려 이 사나이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옹정은 즉위 후에 오르타이를 발탁하여 운남과 구이저우의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이 지방은 묘족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던 곳입니다. 오르타이는 이후에 광시 성의 묘족 문제까지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림으로 치면 이런 느낌



 중국 양쯔 강 이남의 산간 지방. 그곳에는 예전부터 먀오족이 살고 있었는데, 샴인이나 버마인과 가까우며 한인이 평야를 개발하면서 점차 깊은 산속으로 쫓겨 들어가 청대 초기에는 사천, 운남, 구이저우, 광시, 후난 성 변경의 산간지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독톡흔 씨족적 단결로 뭉쳐 있었고, 족장의 통솔 아래 크고 작은 부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 족장은 청조로부터 지방관과 같은 대우를 받고 관위도 수여받았는데, 이것은 청조 정부로부터 직접 선임되는것이 아니라 세습제였기 때문에, 이를 토사(土司)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청나라 옹정 연간, 중국의 인구가 그야말로 폭발하면서 토사와 가까운 지역에까지 한인들이 침투했고, 전혀 다른 양자간에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한인이 토사의 지역에 들어가 경작하고 토지를 빼앗는가 하면, 죄를 범한 자가 먀오족의 땅으로 들어가 관의 단속을 피하고, 이런 점을 이용해 한인 인신매매 조직이 먀오족의 부락을 중간거점으로 삼아 한족 아이를 사들여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급격한 문화적 충격 속에 먀오족 중에서도 이런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먀오족은 독화살을 가지고 있는데다, 이런 한인들로부터 총기까지 사들였고, 큰 부족의 족장은 무려 대포까지 가지고 있어서 범인이 먀오족 부족 안으로 도망치면 잡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물론 먀오족 입장에서도 불만이 있었는데, 토사의 관위를 상속받을 때마다 중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중간에 요구하였고 금전을 바치지 않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분풀이로 망명자를 더욱 환영하고, 더구나 망명자의 꼬임을 받아 한인지역으로 약탈과 납치를 하러 가는 일 등 온갖 무법들이 변경에서 횡행했습니다.


 청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지금까지 토사를 이용한 간접적 지배에서, 완전한 내지화, 즉 먀오족과, 먀오족의 영역을 청조의 중앙 집권적 시스템에 귀속시켜 그들을 완전히 한화 시키는 방식을 쓰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개토귀류(改土歸流) 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굉장한 반발을 가져왔는데, 먀오족들의 반란이 끊이지가 않았습니다.


 오르타이는 바로 그런 반란 세력들에 대해 무력 토벌을 행사한 것입니다. 수많은 먀오족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 끝에 이 정책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어, 구이저우 만한 면적이 새로 청나라의 군현으로 포함되었습니다. 


 초기에 건륭은 그둘의 보좌를 받아 일을 처리했습니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필연적으로 그들의 위치가 대단히 높아져, '한족 관리들은 모두 장정옥을 찾아가고' '만주족 관리들은 모두 오르타이에게 찾아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강희, 옹정이 그토록 경계한 당파가 생겨날 조짐이 보였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건륭이 집권 초기 정국을 안정화 시키기 위해선 두 노대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 노신들의 명망, 그리고 두 당파를 단번에 처리할 경우 초래될 국정의 혼란은 상상하기도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집권 초기에 건륭에게 오르타이나 장정옥이 너무 권력이 강하다고 말을 올리는 신하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건륭은 우선 옹정제가 일을 처리한것처럼, 오히려 이를 반박하고 "쓸데없는 말을 한다." 면서 핀잔을 주어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건륭 본인의 기반과 자신감이 쌓아졌다고 여겨지자, 그는 간단한 술수를 몇가지 써보았습니다. 두 당파간의 대립을 부추긴 것입니다.


 일은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두 당파는 대립하면서 서로 지리멸렬해졌고, 이 과정에서 꼬투리르 잡은 건륭은 오르타이를 호되게 질책하고, 분명하게 경고함으로서 사실상 오르타이의 위협을 분쇄했습니다. 다음은 장정옥이었는데, 장정옥은 무려 반세기전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하고, 그 명망이 너무나 대단해 건륭으로서도 위협으로 느낄 만 했을 것입니다. 1749년, 갓 퇴임한 장정옥은 성급하게도 황제에게 자신의 사후, 본인의 위패가 태묘에 배향될 것임을 확실히 보증하는 문서를 요구했습니다. 건륭은 대단히 불쾌하게 반응했지만 이 요청에는 응해주었고, 시도 짦게 한 수 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77세의 장정옥이 직접 와서 감사를 표하는 대신, 아들을 보내 인사를 하는 실수를 저지르자, 건륭은 기회라고 여겼지만 몹시 흥분해서 불같이 화를 내며 욕을 했습니다. 이에 놀란 장정옥이 다음날 노구를 이끌고 나타나자, 건륭은 되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귀뜸을 해주었기 때문이라며 또다시 화를 내고 장정옥을 "쓸모없는 골동품" 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했습니다. 황제는 장정옥의 백작 작위를 박탈했고, 북경에 있는 그의 집을 압류했으며, 최종적으로 83세에 장정옥이 사망하기전, 그의 상당한 양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습니다. 건륭이 그에게 다시 관대함을 보여준 것은, 장정옥이 이미 죽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시점이었습니다. 건륭은 죽은 장정옥을 태묘에 배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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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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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어하라 | 작성시간 12.11.10 이제 건륭제로군요. 생각보다 욕을 많이 먹던데
  • 작성자★벨라지오☆ | 작성시간 12.11.10 부지런한분 많군요~ 벌써 열분 보고가시네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12.11.10 잘보고 갑니다.
  • 작성자june | 작성시간 12.11.10 회사 생활과 정치 위에 글이 왜이리 잘 맞노?
    힘이 없을 때는 도와줄 친구가 필요하고 잘 나가면 꼬투리 잡아 관계 단절`````` 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회사 생활이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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