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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57) ─ 베트남 전쟁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25|조회수665 목록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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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카가 티베트를 공격해오던 1788년. 남쪽의 베트남에서도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완(阮) 씨 삼형제라는 걸물들이 완전히 패권을 잡아버렸던 것입니다. 이 과정을 길게 언급하는것은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는 일일 테고, 다만 후 레 왕조의 마지막 군주, 민종(愍宗) 여유기(黎維祁)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습니다. 결국 그는 여러 혼란을 피해 중국으로 피신했고, 건륭은 이 소식을 듣고 개입할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완씨 일파를 축출하여 베트남의 왕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상황을 살펴보다, 8월 말쯤에 양광(兩廣) 총독 손사의(孫士毅)에게 진군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청이 보기에 난리를 친 무리들의 우두머리는 완광평(阮光平) 인데, 완씨 삼형제 중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실상 막내였던 완문혜(Nguyen Hue)가 청나라와 사절을 보내면서 이야기를 나눌때 혼란을 주기, 위해 가짜 인물을 만들어 공갈을 친것으로, 청조는 자신들의 상대가 태덕왕 완광평이라는 인물로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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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막내


 여하간에 이 완광평을 무찌르기 위해 손사의가 나섰고, 그는 건륭에게 요청하여 1만 병력을 주력군으로 삼아 파병하였으며, 운귀 총독 부강에게 8천여명을 선발하도록 해 베트남으로 나아갔습니다. 건륭은 전해에 베트남이 대흉년을 겪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군량 보급이 어려울것을 염려하여 운남과 광서의 양로에 70개가 넘는 역참을 설치하여 대비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또, 그는 베트남의 강을 건너는 작전이 어려울 것으로 여겨, 일부러 병사들로 적의 시선을 끌고, 다른곳, 즉 상류나 하류에서 추가 병력이 강을 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어, 손사의가 주력부대와 대포를 이용해 적의 시선을 교란하는 사이, 청나라의 2천여 정예병이 상류에서 강을 건너 적을 뒤에서부터 공격, 베트남 군은 양쪽에서 공격받고 사상자 수천여명을 내면서 대패했습니다. 건륭은 이 승리에 매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며칠 후, 또다른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번엔 손사의가 완군을 대파하여 핵심지역을 장악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건륭은 더욱 만족스러워서, 손사의를 일등모용공에 봉하고 홍보석이 박힌 관모를 선사했으며, 완광평을 잡아오면 많은 상을 내려줄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줄로만 알았단 전황이 갑자기 기묘해졌습니다.


 온 조정이 기뻐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청군은 난데없이 대패하여 점령한 지역을 모두 토해내야 할 지경에 몰렸습니다. 손사의는 "완군을 물리쳤다." 고 보고했는데, 그건 사실 완군이 일부러 후퇴했다가 역습을 가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손사의는 적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러났다고 하지만 완군은 병력 손실이 매우 경미했습니다.


 이 무렵 팔순이 다 되었던 건륭은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순간적인 현명함으로 사태를 눈치채고,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다고 여겨 어서 퇴각을 하라고 전했습니다. 이미 미얀마 전쟁 등으로 자연환경이 이질적인 상태에서 싸우는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있었고, 딱히 여유기를 위해 청군이 많은 피를 흘려줄 의리도 없었습니다. 이때 청군이 군을 돌렸다면, 청군은 -비록 실질적인 성과는 없더라도- 한번 베트남을 크게 헤집은채 피해 없이 물러나서, 건륭 자신에게나 청나라 군대에게나 체면을 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희 시대부터 청나라 군대에 유구한 전통으로 내려오는 그 고질적인 관습 ─ 황제의 명령을 지독하게 안 들어먹는 일선 지휘관들 ─으로 인해, 손사의 역시 건륭의 지시를 무시했습니다. 그는 완씨형제를 사로잡아 자신의 공적을 올리고 싶은 욕심에, 일부러 철수를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리하여 해를 넘긴 1789년의 정월 초. 밤중에 완군은 청군의 측면을 갑자기 기습해왔습니다. 청군은 방어태세를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속절없이 당해버렸습니다. 이때 술을 마시고 있던 손사의는 병사의 보고에 놀라 급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밤중에 수만명의 병사가 파도처럼 돌격해오는데 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혼란 속에 청군은 자기들끼리도 찌르고 죽이고 하였고, 겁이 난 손사의는 황망히 강을 건너 달아났는데, 문제는 자기가 살기 위해 다리를 끊어버려 완군의 추격을 멈추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강 남쪽에는 아직 청나라 군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1만여명이나 말입니다. 이미 완전히 무너진 청군이 완군을 당해낼 순 없었지만, 강 때문에 후퇴도 불가능했고 제독 허세형과 총병 장조룡 등은 1만여 군대와 함께 완군에게 그야말로 살육당해 한사람도 살아남지를 못했습니다. 건륭은 손사의를 비난하고 그에게 하사했던 관모등을 모두 회수해버렸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긴 했지만, 건륭이라고 딱히 뾰족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로서는 드물게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 여기서 싸움을 그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만 천하를 호령하는 대청제국의 존엄한 황제로서, 국가의 위신이나 스스로의 체면이 완전히 뭉개진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독과 총병대장이 전사하고, 총독은 줄행랑을 놓았으니 달리 변명할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건륭은 직접 칙서를 작성해 완씨 집안의 막내에게 전달했는데, 이 서신에서는 얼마전까지의 치열한 전쟁의 여파는 전혀 느껴지지 않게 매우 온화하고, 의도적으로 마음씨 좋은 어른이 철없은 아이를 점잖게 타이르는듯한 어조로 되어 있습니다. 건륭은 이 서신에서 자신들이 파병한 이유를 어물어물 넘겨버렸고, 패전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은채 '그대가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있기에, 이를 가엾게 여겨 이전의 죄를 더 묻지 않겠다.' 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청과 완씨의 베트남은 이전의 싸움과는 별개로, 국왕이 직접 입조를 하면서 외교적 관계를 무난하게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외교적인 술수를 부린 교활함은 건륭뿐 아니라 베트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완씨 집안의 막내는 완광평이라는 가공 인물을 창조했고, 실제로 중국에 입조하면서 보낸 사람도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안남 국왕(安南國王) 완광평(阮光平)이 황제의 팔순만수(八旬萬壽)를 축하하기 위하여 4월 15일 광서(廣西)의 남쪽 지방에 이르렀는데, 황제가 명을 내려 예부의 만주족(滿洲族) 좌시랑(左侍郞) 명(明)을 파견하여 미리 열하로 데려가게 하였습니다."


 "연회를 시작한 다음 화신이 만수성절을 축하하는 표문과 원자가 탄생한 후에 보낸 자문을 가져다 몇 차례 읽어보고 황제 앞에 바쳤습니다. 한참 뒤에 다시 철보에게 전달하기를 ‘이미 어람(御覽)이 끝났다. 이 밖의 표문과 자문은 행재예부(行在禮部)로부터 받아가지고 유경예부(留京禮部)로 보낼 것이다.’ 하고, 또 표문과 자문을 가지고 안남 국왕인 완광평(阮光平)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자획도 반듯하고 종이의 품질도 정결하다. 조선에서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처럼 경건하니 다른 변방 나라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에서 안남왕 완광평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완광평은 막내 완문혜와 얼굴이 비슷비슷한, 전혀 다른 가짜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서 태연하게 이런 사기술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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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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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벨라지오☆ | 작성시간 12.11.25 잘보고 있습니다 ~ 요즘은 연재가 빠르시네요
  • 작성자多爾袞 | 작성시간 12.11.25 항상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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