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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59) ─ 대만 평정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1.27|조회수593 목록 댓글 1


건륭 중기 이후부터, 언제까지고 견고하기만 할것 같았던 청제국은 천천히 내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건륭은 이에 전국적으로 보갑을 강화하고 무기를 압수했고, 처벌도 대단하 잔혹했습니다.


 "가장 먼저 도주한 자들을 밝혀내 사형을 집행하여 만인에게 올바른 법의 존재를 보여라. 그리고 거기에 호응하여 같이 도망친 자들을 잡히는 즉시 이이로 보내 몽골의 노예로 삼으라."


 특히 보갑제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왕륜의 반란 이후, 특히 산동은 대단히 검열이 강화되어, 지나가는 행상의 이름, 그들의 휴대 물품, 수레의 수량, 음식점, 사원, 동굴, 모든 것에서 정부의 눈이 번뜩거렸습니다. 이 경우, 청제국의 행정력이 절정에 오른것이 백성들에게는 숨막히는 통제의 연장으로 작용했습니다. 


 보갑제에 더불어 연좌제가 강화되었고,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한족과 소수민족의 왕래도 차단되었고, 복건이나 광동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가는것이 금지되었으며, 산동 연해 사람들이 봉천으로 가는것도 통제되었습니다. 건륭은 당초 옹정 시대보다 유연한 통치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백성들은 옹정 시대보다도 더욱 강화된 감시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관료제도의 부패로 효율을 상실했고, 그 틈을 비집고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백성들의 난이 사방에서 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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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대만 임상문(林爽文)의 반란은 그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건륭은 당초에 대만에서 난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실제 반란은 그리 과소평가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만의 거주민은 이미 그 당시부터 복잡했습니다. 원주민인 고산족, 복건과 광동의 장주, 천주, 조주 등 연해 주현에서 이주해 온 한족들이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살기 위해 정부의 금령을 어기고 바다를 건넌 거친 사나이들로, 고생이 익숙하고 반항 정신이 강한데다, 권익을 지키고 손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살기 위해 서로 집단적인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으며, 지역 관념으로 똘똘 뭉쳐 있어, 여타 반란군에게 보이는 본열의 양상도 적었습니다. 


 그리고, 비밀 조직 ─ 천지회같은 반청 조직도 그들 사이로 침투해 있었습니다.


 제국이 삐그덕대는 소리가 이미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모든 제국들이 멸망할때는 관료 사회의 부패가 먼저 발생하는 법입니다. 특히 청조 대만 관리들은 몹시 타락하여, 이들의 수탈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시대홍이라는 총병은 부임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백은 5만냥을 횡령했고, 대만부 지부 손경수는 재임 중 백은 10만냥에 달하는 적자를 내었는데 그 적자가 어디로 갔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입니다. 제라현 지현 당일은 본래 가난한 상태로 대만에 왔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백은 2천여냥을 만들어내는 마술을 부려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통제에서 이미 심적으로 벗어나 있는 대만의 사람들에게, 반청복명을 외치는 천지회 조직들이 스며들어 그들을 부채질 했습니다. 보아라, 저것이 청조의 실체다.


 반청 복명 단체라는것은, 실질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통일되어 있는 조직이 아닙니다. 수많은 군소조직들이 지하로 잠입해 있었는데, 이곳 대만에서는 여러 조직들이 서로 역량을 모아 방향을 같이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철편회, 소도회, 철척회, 부모회 같은 조직들이 천지회와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천지회의 활동은 드문드문 양지에서 목격이 되어, 이들의 일부 활동은 지방 관원들의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패해져 가는 청조 관원들이라, 대만 총병 시대홍이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제 배만 불리는데 몰두한 탓에,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어 이미 진압될 타이밍을 놓쳤버렸습니다. 천지회 조직원들은 서로를 "형제" 라고 불렀고, 공동의 은어로 암호를 전수했으며, 새로운 회원이 입회할 때에는 하늘을 향해 맹세하면서 신전에서 피와 술을 나눠 마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청나라 말기, 가로회(哥老會)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특히 공산당 1세대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이런 조직과 관련이 있는데, 가로회에 가입했던 주더의 전기를 보면, 다른 가로회 회원들 모인데서 짐승의 피를 서로 나눠먹고 형제의 맹세를 하는 식인데 이는 천지회의 모습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임상문은 본래 복건성 출신으로, 부친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했습니다. 젊은 시절 가마꾼 노릇도 해보았고 아문의 잡일도 해보았던 사람으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지역에서는 꽤 부유한 축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건륭 48년, 내륙에서 엄연이라는 사람이 대만으로 침투해서, 대만에 천지회를 전파했는데, 특히 임상문과 접촉이 많았습니다. 이리하여 임상문은 엄연의 영향으로 천지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임상문을 비롯, 대만 사회에 천지회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임상문과 친구였던 장대전이라는 인물도 천지회에 가입했는데, 평소 의협심이 매우 강해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일이 많았던 부자였습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자, 신경도 쓰지 않던 총병 시대홍도 결국 주목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천지회 회원 중에 장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운이 나쁘게도 시대홍에게 걸려 잡혀버렸습니다. 그러자 천지회 회원들은 힘을 모아 관원을 죽이고 장열을 구해내었습니다. 당황한 시대홍은 병사를 풀어 53명을 잡아들였고, 자신들이 '첨제회'를 소탕했다고 건륭에게 보고했습니다. 천지회라는, 소문이 자자한 그 불길한 조직의 이름은 건륭의 심기를 크게 건드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열을 구해낸 천지회 일원들은 임상문이 있는 곳으로 몸을 피해 봉기에 대해서 논의 했습니다. 이에 지현의 관원이었던 양진국이라는 사람이 임상문을 잡으러 갔는데, 되려 임상문에게 잡혀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뒤로 관부의 사람들이 임상문을 잡으로 가는 도중에 아무 죄도 없는 백성들의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이 발생, 양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습니다.


 때가 되었음을 느낀 임상문은 마침내 건륭 51년 7월 27일 밤, 거병하여 청군의 진영을 공격, 지휘관들을 살해했고, 지부를 죽였습니다. 봉기군은 대량의 식량과 무기를 손에 넣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 모두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임상문을 맹주 대원수로 임명했고,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불법적으로 대담하게 제멋대로 행동하여, 마을의 곡식과 재물을 훔치는 자가 있다면, 백성이나 민중들이 죄인을 결박하여 본수부로 압송하는것을 허락한다. 잡혀 온 자는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할 것이며,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으리라."


 임상문이 일단 들고 일어서자, 대만 전역의 천지회가 이에 호응, 호걸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이 칼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경악한 민절 총독 상청은 수사 제독 황사간, 육로 제독 임승은, 총병 학상유, 부장 서정사 등의 인물들에게 무려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가게 하여 대만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1만은 일개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기에는 많은 병력으로, 숫자로 보나 무기로 보나 청군은 봉기군에 대하여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군이 있어도 졸장의 아래서는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황사간은 전쟁 한번 해본 적이 없었고, 연로하여 병에 골골 대었습니다. 임승은도 장군 가문 출신이었으나 귀한 집 도련님에 불과했습니다.


 대만의 총병 시대홍은 농민 봉기군에 대해 적대감이 심한 부자 지주들의 도움을 얻어 봉기군을 한번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봉기군의 장대전이 재차 반격해오자 달아나 버렸습니다. 육로 제독 임승은으로 말하자면 겁이나 임상문의 진영 40여리 쯤에 진을 치고 구경만 하고 있었고, 늙은 황사간도 성만 지키며 적군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반란군은 청군이 전쟁을 두려워하자 사기가 극도로 상승하여, 이제는 되려 청군이 봉기군에 '토벌' 될까 두려워해 몸만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건륭은 임승은이나 황사간이 관망만 하고 있자 이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는, 민절 제독 상청이 직접 대만으로 건너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상청 역시 무능하기로는 별다를바 없었습니다. 상청으로 말하자면, 그의 재주는 화신(和珅)에게 아첨하여 줄 타고 올라가는 재주뿐으로, 병법에는 아무런 이해가 없었습니다. 또 담이 작아 전쟁에 나서는것도 두려워해 벌벌 떨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전공을 거짓으로 날조했습니다.


 "장대전이 부하를 거느리고 부성에 소요를 일으키기에, 신이 수 차례에 걸쳐 직접 관병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적을 생포하고 죽였습니다. 또한 장군이나 하급무관 할 것 없이 사력을 다해 싸웠으며, 의병들도 앞을 다투어 용감히 나아가 적을 토벌했습니다. 그리하여 역적 2천여명을 물리쳤으며, 생포하여 사형을 집행한 자가 50여명입니다."


 건륭은 상청이 나이가 많은데도 용감히 싸웠다고 칭찬했지만, 대만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이제 반란군은 1만여명이나 되었는데, 관군은 왠일로 술과 음식으로 병사들을 배부르게 하며 출정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당일이 임상문과 장대전이 1만명으로 진군하던 시기로, 관군의 움직임을 미리 눈치 챈 그들은 사전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성에서 나오는 관군을 바로 공격했습니다. 겁많은 상청은 이를 보고 벌벌 떨면서,


 "무도한 도적때가 늙은이의 머리를 베려고 하는구나!"


 라고 소리치고는 말을 거꾸로 하여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총지휘관이 이런 추태를 보이자 모든 장수들이 달아났고, 봉기군은 환호하며 적을 격파하고는 전리품을 잔뜩 챙겨서 돌아갔습니다. 상청은 성문을 굳게 닫고 틀어박힌채, 본국에 1만의 지원군을 더 요청했습니다. 이제 반란에 호응하는 세력은 10만을 넘었습니다. 청군은 각지에서 성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여, 서로간의 연락도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습니다.


 이때, 건륭은 상청에게 정예군을 지원하고, 직접 돌격하여 적군을 섬멸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봉기군은 제라라는 지역을 공격했는데, 총병 시대홍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남북의 중앙에 위치한곳으로 교통상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상청은 겁이나 도우러가지 못하고 대신 휘하의 총병들을 파견했는데, 총병들은 봉기군에게 대패하여 수많은 사상자라를 내었습니다.


 봉기군 역시 제라성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기에 이곳을 집중 공격했고, 공세가 너무 강해져 못 견디게 된 시대홍은 죽음을 각오한 사절을 수 차례 보내 상청에게 도우러 와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상청은 처음에는 겁이나 숨어만 있었지만, 생각을 해보니 제라가 함락되면 자기도 끝이라, 건륭제의 옆에 있는 화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자신을 대신할 지휘관을 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화신은 건륭을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건륭은 1만 1천여명의 지원군을 더 보냈으며, 복강안을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대체로 많은 반란군이 무너질때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집니다.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건륭은 적을 이간질 시키는 작업부터 시작하여, 봉기군 내에서 투항자를 유인했고, 큰 포상을 내려 봉기군이 무너질 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봉기군' 중에서, '봉기군을 진압하는 의병' 들이 발생해, 봉기군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건륭은 늙고 판단력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일단 마음을 먹으면 능력은 충분히 보였습니다. 다만 그러는 일이 적었습니다.


 건륭은 직접 복강안에게 공격할 루트를 지시하면서 '원격 조종' 을 했고, 복강안은 이를 충실히 수행하여, 봉기군을 대패시켰습니다. 갑자기 세력이 약화된 데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군을 만난 임상문의 봉기군은 연패를 거듭했고, 전황은 순식간에 완전히 달라져버렸습니다. 예컨대 기세 싸움인 것입니다.


 결국 패하고 패하고 몰린 임상문은 해한가에 진을 치고, 1만여 병사로 항전을 계속했으나, 복강안은 이 역시 진압했고, 패잔병들을 추격했습니다. 밤중에도 계속된 추격으로 마침내 임상문이 잡히게 되었고, 이후 소탕전이 전개되어 기세가 대단했던 임상문의 봉기군은 상당히 어이없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모자들은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면 이 대만의 반란은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했다는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 원인이 문제였습니다. 대만의 임상문은 죽어버렸지만, 광대한 청제국의 수많은 곳에 제2의 임상문이 도사리고 있었고, 천지회의 손길은 더욱더 멀리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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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자우림 | 작성시간 12.11.28 흐음....건륭제도 말기에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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