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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71) ─ 포성 속의 존엄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12.29|조회수54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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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아편전쟁. 모든 전쟁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공식적인 명분에 대해 영국 파머스턴 외무부 장관이 내세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영국 국민의 생명이 위험했다. 둘째. 영국 국민의 재산이 위협받고 있다.

 

 

 말이 안되기는 두 가지 이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절대로 아편을 취급하지 않겠다.' 라는 서약서에 사인만 하면, 영국인은 광저우에 머물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몰수되고 하나, 애시당초 금제품인 아편을 몰수한 일입니다. 아편이 금제품인것은 영국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그저 단순한 금제품도 아닌, 사람을 해치는 악마가 바로 아편입니다.

 

 

 아편전쟁이라는 이름은, 이 전쟁의 본질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름입니다.

 

 

 '영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출발한 영국 함대는, 당초에 모든 사건이 벌어진 광저우로 가는 대신,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광저루를 그대로 지나고, 주산열도(舟山列島)로 나가아면서 청군의 의표를 찔렀습니다. 광동에는 임칙서가 있었는데, 물론 당시 영국 함대의 군함, 거포, 잘 훈련되 병력이라면 광동에서 싸워도 지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전은 압도적으로 장식해야 하는 법입니다.

 

 

 또, 주산열도는 중국 중부의 연해에 있는 곳으로, 무역기지로는 비전이 있는 곳이었고, 영국은 이전부터 이를 탐내왔으므로 기왕 싸운다면 주산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정작 풍토가 기지를 세우기엔 좋지 않은 곳이라 구상을 포기했찌만, 이 시점에서 영국은 이곳에 무역기지를 세우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서전을 주산에서 벌인다는 계획은 옳바른 판단이었습니다. 주산에는 고작 2천여 병력이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모두가 전투 경험은 전혀 없었고, 보통 토공, 목수, 미장이등으로 일하면서 돈을 버는, 직업군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전력이었을 뿐입니다. 영국군은 거의 피해도 전무한 상태로 주산을 장악했습니다. 청나라 정해진 총병 장조발은 전사했고, 정해지현 요회상은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했으며, 수비병과 주민도 모두 도망쳤습니다.

 

 

 싱겁게 승리를 거둔 영국 함대 일부는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칙서와 갈등을 벌인 찰스 엘리엇의 사촌 형인 엘리엇 소장은 군함 5척 등을 거느리고 천진 앞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천진과 베이징은 코앞이나 다름 없으니, 이곳을 바로 흔든다면 '남쪽 변방' 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올라가는것보다 대번에 북경 조정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청 조정은 기겁했습니다. 과거 정성공 조차 이렇게 북쪽으로 올라온 적은 없었기에, 직례 총독 기선(琦善)이 파견되어 영국 측과 교섭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영국인들은 중국의 '관' 과 공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접촉을 하기 위해 부던이도 애를 썻고, 네이피어는 요란한 소동을 벌였지만 이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져 하북, 산서, 하남, 산동을 관할하는 직예 총독이 '외국인'과 직접적으로 만나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심지어, 영국 측은 '기선이라는 인물이, 정식으로 청나라 정부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될 때까지 만나지 않겠다.' 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이전과는 상전벽해 였습니다.

 

 

 간신히 엘리엇 대령과 만난 기선은 파머스턴 장관의 서신을 받아보았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흠차대신(임칙서)이 광동에서 몰수한 아편 대금을 배상할 것.

 둘째. 영국의 무역 감독관이 받은 모욕에 대해 사죄할 것.

 셋째. 장래를 보장할것.

 넷째. 연해의 한 곳, 또는 몇 곳의 섬을 영국 국민의 거주 및 상업 활동 장소로 지정할 것.

 다섯째. 공행상인이 영국 상인에게 진 부채를 청산할 것.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일단 이 문제를 광동 지방 차원의 문제로 보려고 한 점입니다. 그들은 베이징 코앞에 '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고, 광동에서 교섭하자고 부던히도 영국을 설득해, 무대는 다시 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베이징 앞에 적이 당도했다. 는 사실의 공포심은 이 정도로 막대했고, 갑자기 조정 내에서 임칙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습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하여 '오랑캐' 군대가 난리를 벌이게 한 것은, 순전히 임척서의 탓이라는 겁니다. 임칙서에 대해, '두려워 하지 말고 차라리 만용을 부려라.' 하며 격려했던 도광제조차 겁을 먹었는지, 광동에서 있을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청나라 정부는 임칙서를 파면해버렸습니다.

 

 

 "……이번에 영이(영국)가 곳곳에 청원서를 내어 불평을 호소하고 있다. 짐은 사정을 통찰해서 결코 흔들리지 않지만, 임칙서는 특파된 대관이면서도 그 처리가 실제적이지 못했고, 도리어 또 다른 사단만 일어나게 했다.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함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다. 그래서, 특별히 징벌을 내리는 것이지 영이의 청원으로 갑자기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대함대를 끌고온 영국의 위협을 '청원' 으로 바꾸고, 임칙서의 파면은 그것때문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가지고 대화를 했던 임칙서는 이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산에서 정전협정이 체결 될 때, 임칙서가 파면 되자 양강 총독의 집사가 영국 함대의 제독 브레머 준장에게 임칙서의 해임을 알리며 "경하할 일입니다." 라고 하자, 브레머 준장은

 

 

 "임칙서는 훌륭한 재능과 용기를 지닌 총독이었다. 애석하게도 외국 사정을 몰랐을 뿐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외국인조차도 '훌륭한 재능과 용기를 지녔' 다고 평가했던 임칙서를, 청나라는 스스로 '나라를 병들게 하고 도리어 또 다른 사단만 일으킨 말썽꾼' 으로 비하한 것입니다.

 

 

 임칙서는 이 무렵 수사제독과 더불어 간신히 해군의병대를 조직하고, 영국 함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수면에 뗏목을 늘어 놓는등, 큰 효과를 낼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시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기 위해 안간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해임되었고, 기선이 새로운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광동으로 달려왔습니다.

 

 

 임칙서 대신 부임한 기선은 임칙서가 조직한 해군의용병을 대번에 해산시켰고, 땟목등도 모두 치워버렸으며, 1만명의 주둔군을 8천명으로 줄이고, 그나마도 6천여명은 호문에서 다른곳으로 철수시켜 주둔군은 이제 2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손을 비비면서 영국측의 비위를 맞추려는 시도였습니다. 영국 측의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영국인이 받은 모욕에 대한 사죄, 장래에 대한 보장

 2. 몰수된 아편 대금의 배상, 원정에 소요된 경비의 변상

 3. 공행의 부채와 상환을 청나라 관헌이 보증할 것

 4. 외양에서 아편 밀수를 이유로 영국인 및 영국 상선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

 5. 수출입세를 일정하게 하고, 무분별하게 증감하지 않을 것

 6. 무역선에 부과되는 번잡하고 과중한 경비의 절감

 7. 영국인의 청원서는 지방 관헌을 거치지 않고, 베이징의 황제에게 직접 전달되게 할 것

 8. 복건, 절강, 강소, 직례 등 여섯 항구, 또는 그 이상의 무역항을 영국인에게 개방할 것

 9. 북경에 사관을 개설하고, 각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킬 것.

 10. 개항장에 마카오 방식의 외국인 거류지를 설정할 것

 11. 거류지에는 영국인 가족도 거주하게 할 것

 12. 개항장에서 발생한 영국인의 범죄는 영국 관리에 의해 처리하며, 청나라 관헌은 관여하지 않을 것

 13. 개항장에는 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할 것

 14. 공행 제도를 폐지하고, 폐지가 불가능하다면, 소속 행상을 증감하지 않을 것

 15. 영국이 특별한 사법권을 가지는 도서 또는 해항을 할양할 것

 

 

 

 기선은 협상에 나서면서도, 자기 체면에 사사로이 '오랑캐' 와 협상하는것도 아니라고 여겼는지, 대부분의 일은 영어를 할 줄 아는 포붕(鮑鵬)이라는 중개업자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처음부터 칼자루를 영국 측이 쥐고 있는데다, 협상을 하는 당사자가 이따위 태도로 나오니 제대로된 협상이 될리가 없었습니다.

 

 

 일단 영국 측의 수많은 요구조건들을 청나라가 들어줄 리가 없었고, 그 들어줄 리가 없는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군대가 동원된 것입니다. 그런데 청나라와 교섭을 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온 존 엘리엇과 사촌 동생인 찰스 엘리엇 대령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사촌 형은 고압적으로 대해야 말을 듣는다는 의견이었고, 사촌 동생은 적당히 저쪽 체면을 챙겨주는 편이 앞으로 통상 관계에 있어서도 유리하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존 엘리엇은 병을 이유로 귀국하고 말았고, 후임으로 헨리 포틴저(H. Pottinger)라는 인물이 부임했습니다.

 

 

 다른 조약은 그렇다고 쳐도, 문제가 되는것은 마지막 조항입니다. 영국은 홍콩과 주산, 두 곳을 할양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조사해보니 주산이 적절하지 않아 홍콩을 할양 받을 생각을 했습니다. 두곳 중에 하나만 손에 넣으려는 만큼, 요구도 그만큼 강경해져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눈꼽만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애가 탄 것은 주산입니다. 예부터 힘이 부족할 시에, 금전이나 재물을 보내 상대를 달래는 일은 왕왕 있어왔지만, 영토를 내주는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베이징의 조정에서 이를 찬성할 리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빼고 나면 회담은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 끝에 기선은 홍콩을 마카오와 같은 형태로 하여, 명목상으로는 중국 땅이고 실제적으로는 외국인이 거주하며, 정부에서 이를 눈감아 주는 형태로 하는것이 어떻겠냐고 제시했지만, 영국 측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할양(割讓)은 할양이지만 이를 숨기는 암할(暗割)인가, 혹은 분명한 명할(明割)인가 하는 한 글자의 문제가 이토록 컸던 것입니다.

 

 

 기선은 이야기가 통하지 않자 베이징에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하기 어렵지만, 광저우 외에 복건의 두 항구를 개방하라는 요구는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베이징의 태도입니다. 당초에, 영국군이 베이징의 코 앞에 당도하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은 상황에서 북경 조정은 그것만으로도 겁을 먹어, 기선을 파견하고 임칙서를 파면시키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광동으로 영국인이 내려가자 이번에는 터무니없는 강경론이 주를 이루어 '저 건방진 오랑캐 들을 혼을 내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득세했습니다. 어느것 하나 분명한것이 없고 그저 분위기에 휩쓸리기만 할 뿐입니다.

 

 

 "분하고 한스러움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한 상대와는 더 이상 교섭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도광제는 대답했습니다. 결국 상부의 명령으로 기선은 회담을 중지했고, 영국 측은 1월 7일부터 다시 실력 행사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영국군이 노린 목표는 호문의 1관문인 수도였고, 이는 동쪽의 사각포대와 서쪽의 대각요새 사이에 있었습니다. 영국은 우선 이 두개의 요새를 목표로 했습니다.

 

 

 문제는, 앞서말했듯이 청나라 조정의 엉망진창인 태도입니다. 당초에 임칙서가 여러가지 준비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청나라 정부와 기선은 협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임칙서를 파면하고 모든 조치를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강경론으로 나와 싸움을 벌이려는 것입니다.

 

 

 사각에는 본래 2천여명의 수비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심을 사 교섭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수비병을 600명으로 줄였습니다. 반면에, 영국군은 브래드 소령이 이끄는 1461명의 병력에 왕국 포병대도 가세하여 전혀 상대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청군은 '사망자' 만 292명에 엄청난 부상자가 나왔지만, 영국군은 사망자는 '전무' 하고 부상병은 38명이 나왔을 뿐입니다.

 

 

 이 시점에서, 엘리엇은 어차피 주산이 기지를 세우기엔 부적절한 만큼, 주산을 반환하고 점령한 요새에서 철수할테니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청을 압박했습니다. 기선도 베이징에 마카오의 사례를 내세워서 적당히 할양해 주자고 설득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할양에 동의했다면, 추가적으로 영국의 압박이 있을지도 모르고 청나라의 체면도 땅바닥에 떨어졌겠지만, 그 이후의 전개보다는 조금 상황이 나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은 강경책으로만 일관했는데, 강경책에 필요한 준비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지르고 보는 것입니다.

 

 

 도광제는 '분노하여 머리칼이 곤두섰' 다는 표현을 쓰며, 각지의 군대가 출동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 소식을 들은 엘리엇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정원(靖遠) 포대를 공격했습니다. 수만 대군이 있어도 막기 힘들텐데, 정원 포대의 병력은 고작 200명이었습니다. 이 역시 물론 협상을 위해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기선은 파면되었습니다. 문제는 후임들이 그다지 기선보다 나을것도 없던 인물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정역장군 혁산, 참찬대신 양방 등은 20년 전부터 제독 자리에 있던 인물들이지만, 양방은 주술에 심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영국군의 포격이 정확한 이유를 발달한 기술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적의 주술이 강력하기 때문에' 라고 생각했고, '적 주술사의 힘을 약하게 해야' 승리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점쟁이에게 견해를 물어보자, '외이의 요술을 막으려면 여자가 쓰는 요강의 뚜껑을 벗겨, 그 입구를 적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하면 요술은 금세 깨질 것이다.' 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양방이 부임하자마자 내린 첫 명령은, 다름 아닌 요강을 모두 모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광저우를 지키기 위해 파견된 4만의 군대는, 오히려 적군보다도 질이 나쁘던 자들로 사방에서 약탈, 폭행을 마구 저질렀고, 이에 분노한 광저우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군대를 습격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적을 막을 수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1841년 5월 24일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에 맞춰, 영국군은 광저우 서쪽에 있는 13행가에 상륙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장군은 여자 오줌을 모으고 있고, 백성들은 악랄한 관군을 습격하고 있는 상태. 중화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에 몰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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