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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73) ─ 세상이 변하는 소리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1.12|조회수509 목록 댓글 2


 이제 승자와 패자는 분명해졌습니다. 영국이 승리했고, 청이 패배했습니다. 
 
 
 과거의 경우, 영국은 청나라 관리와 직접적인 교섭을 벌이기 위하여 부던히도 애를 썻으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청나라는 협상장에 강제로 끌려나오는 셈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이전, 영국은 양광총독 노곤을 만나는것조차 힘들었지만, 1842년 8월 29일, 남경에 정박하고 있는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에 탑승한 만주족 대표는 다름 아닌 황실의 종실인 기영(耆英)이었습니다. 그는 사포 부도통 이리포(伊里布)와 함께 영국 군함에 탑승했었는데, 기영은 공부상서와 호부상서를 역임했고, 아편 전쟁 기간 중에는 광저우 장군 겸 흠차 대신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도지사를 만나기도 힘들었던 것이 예전인데, 지금 와서 보니 건설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만나게 된 셈입니다.


 이 난징조약(南京條約)은 불평등 조약 중 하나로 이름이 높습니다. 이 조약의 요구 조건은, 실질적으로는 이전 기선이 엘리엇과 논의한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청나라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배상금 등을 물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아편 몰수에 대한 대금까지 지불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청국 황제는 1839년 3월, 영국 신민이 청국 고관에게 감금되어 사형의 위협을 받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광저우에서 인도한 아편의 배상금으로, 양은 600만 달러를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아편이 이미 청나라에서 금제품이었다는 이야기는 여러번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불법적으로 아편을 가져왔고, 임칙서는 이 불법 제품을 압수했으며, 절차상으로 문제가 없는 일임에도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 조항은 중국에서 아편이 금제품이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무시해버리고 있습니다.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편을 인도했다.' 고 하지만, 이는 앞뒤가 다른 이야기로 '불법 제품인 아편을 내놓지 않았기에' 위협을 받은 것입니다. 이 조항에서는 '영국 신민이 청국 고관에게 감금' 되었다고 표현되었지만, 역시 실상은 '강제적으로 감금' 된 것이 아닌, '아편을 내놓지 않기 위해 농성' 한 일에 불과합니다. 이 전쟁에서 영국의 기만적인 태도는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조항은 11조입니다. 이제 영국 고관이 청나라 고관과 문서를 주고받을 때의 형식이 정해졌는데, 이제까지는 '청원' 이라는 형식으로 공행을 통해 간접적인 의사 표현만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직접적으로 대등하게 교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공 무역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중국 왕조는 어디까지나 "은혜" 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직접적인 1:1 교역이 아닌, 의례적인 조공품을 받고, 이에 하사품을 내리거나 비공식적인 교역을 묵인하는 형태로 다른 나라와 교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형식적인 절차 없이 직접적인 교역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이 변화가, 사실은 지난 2000년간의 사고방식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중국의 왕조는 항상 천조를 표방하였고, 주변국은 외번, 조공국, 그리고 오랑캐와 만이로 나누어 그 차이를 구별했습니다. 이러한 의식 체계가 이어지기 위해서는 항상 중국, 즉 천조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강력한 국가라는 믿음이 있어야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습니다. 바다에서건, 육지에서건 그들은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기존의 조공 무역 체제도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다고 영국이 이전 중국 왕조를 소멸시키고 대신 자리를 차지했던 북방 이민족처럼, 전통적인 중국적 명분론에 입각해 '천명이 이동했다' 는 식으로 새로운 중국 왕조 중에 하나가 된것도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그전까지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난징 조약이 체결 된 후 2년 뒤, 청나라는 프랑스와 황포조약(黃埔條約)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인은 중국 법률에 따라 명령된 어떠한 의미도 지지 않는다고 해석할 있는 조항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치외법권(治外法權 Extraterritoriality) 입니다.  이보다 몇달 전인 1848년의 7월 경, 미국과 청의 망하조약(望廈條約)이 체결되었는데, 형사사건의 경우 재판과 처벌 모두 피고인의 소속 국가 법률을 따르도록 규정했습니다. 또한 황포조약의 경우, 중국어 문장과 프랑스어 문장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이전의 가치관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일들 뿐입니다. '결코 대등한 위치에서 상대하지 않는다.' 는 중화의 자존심은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청나라는 본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강제로 두들겨 맞고 국제무대로 끌려 나왔습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다보면, 그 '국제무대' 에는 위상으로서 대등한 국가가 수없이 있었고, 월등하게 강력한 함대로 무장한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변했다." 라는 이야기에 대해서인데, 이 "변함" 이라는것은 추상적인 이야기 외에도 실질적으로도 명확했습니다. 수억 한족들 위에서 지시를 내리던 만주족들이 영국인들에게 패배하여, 백기를 내걸고 도망치고, 결국에는 억지로 끌려나와 협상을 맺었습니다. 백성들은 이 모습을 분명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관헌의 위엄이 이전처럼 먹히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미 전쟁 이전부터 백성들의 생활은 악화일로를 겪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재앙과 민생의 파탄, 이로 인한 종교적인 봉기. 지나칠 정도로 잔혹한 정부의 탄압, 사상통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거리에는 도적들이 출몰해 치안도 급격하게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변한 점으로 보자면 크리스트교의 포교가 있을텐데,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거리에서는 외국인 선도사가 설교를 하고, 책자를 나눠주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치외법권으로 보호받고 있었기에, 포교는 자연히 활발해졌습니다. 


 이 당시에 널리 퍼진 이러한 소책자 중에, 권세양언(勸世良言) 이라는 책이 있었씁니다. 이 책은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이라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중국인 최초의 선교사가 된 양아발(梁阿發)이 지은 책입니다. 양아발이 지었다고는 해도, 그는 문장이 서투르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사실 부족했기 때문에, 그 내용적인 면은 불교 사상 등이 합쳐져서 모호한 면이 있었습니다. 


 1836년. 과거 시험을 치루기 위해 걸어가던 24세의 한 젊은이는, 우연히 광저우 거리에서 기독교 전도사에게, 이 권세양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 소책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그를 떠밀었습니다. 홍수전(洪秀全)으로서는, 20년 뒤의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 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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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열혈청년 | 작성시간 13.01.13 권력자가 백성을 철저히 억압하면 결국은 사이비 종교가 발흥하게 되어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장기집권을 꿈꾸는 무리들이 유념해야할 진리입니다.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1.14 중국은 역사적으로 그 사이비종교가 한번 발흥하면 워낙 파급효과가 큰지라;; 공산당이 왜 파륜궁사건을 일으켰는지 알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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