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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76) ─ 배상제회(拜上帝會)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1.20|조회수474 목록 댓글 1




 사람은 무언가를 믿는 존재입니다.


 그게 추구하는 꿈이건, 진리건, 신이건, 지식이건, 신이건. 그리고 홍수전은 자신이 믿을 대상을 권세양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가 어떠한 심정으로 이 책을 읽었을지는 그 심경을 남기지 않아 알 수가 없는일이지만, 그의 심경에 이 책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것은, 책을 다 읽은 홍수전이 곧바로 포교에 나섰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설교 대상은 자신에게 책을 추천해준 이경방이었습니다. 이경방 역시 권세양언에 상당한 감명을 받은 상태라, 홍수전의 역사적인 첫번째 포교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권세양언의 내용이 실제 성경과는 이색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권세양언에는 예수의 행적을 다룬 가장 중요한 네개의 복음서 ─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홍수전과 이경방, 두 명은 양아발이 단편적으로 남긴정보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세례의식을 재구성했습니다. 그런 다음, 양아발이 자기 아내에게 했던 것처럼 사적인 의식을 통해 서로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양아발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예수를 부인한 자는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기에, 두 명은 서로의 머리에 물을 뿌리고 '진정한 하느님' 에게 기도를 한 다음, 모든 우상과 악행, 요괴를 멀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이전의 죄악을 씻어내고, 오래된 것을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나리."


 이 당시 홍수전은 매우 기분이 좋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당시 심경을 나타내는 시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만의 종교집회를 열었는데, 종교집회라고 하지만 처음에는 홍수전의 꿈에 대한 논의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둘은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그 고장의 장인에게 부탁해서 양날의 칼 두개를 주조했습니다. 칼은 둘 다 무게가 약 5.4Kg이었고, 길이는 대략 96cm 정도였습니다. 칼날의 양면에는 참요검(斬妖劍)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둘은 그 당시의 심경을 시로 나타냈습니다.



 '3척 길이의 칼을 쥐고 산하를 평정할지니
 사해(四海) 만민이 한 가족이 되어 화목하게 살아갈 것이다……
 호랑이가 포효하고 용이 울며 빛이 세상에 가득하니
 어찌 태평성대만큼 기쁘지 아니하랴.'



 이 시점에 이르러, 조그마한 관록포 마을은 홍수전이 쏟아내는 괴이한 소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미쳤다고 여겼지만, 홍수전은 벌써부터 동지들을 얻었습니다. 첫번째는 같은 마을에 사는 사촌 홍인간(洪仁玕)이고, 다른 한명은 홍수전의 계모 쪽 친척이자, 관록포 마을에서 1.6km 정도의 거리에 살던 풍운산(馮雲山) 이었습니다.




 풍운산은 홍수전과 같은 객가인이었고, 나이는 조금 더 많았습니다. 또 과거에 낙제한 경험이 있는 독서인이었습니다. 운산은 호이며, 본명은 을룡(乙龍)이라고 합니다. 그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고, 집에서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광저우에 가서 필경에 종사하면서 생활 했다고 합니다.


 태평천국의 일대기를 기술할때, 풍운산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인물' 이라는 측면에서 풍운산은 진정한 의미의 '천재' 였으며, 그가 보인 동원력과 조직력, 실천하는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면 태평천국은 존재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 종종 묘사되는것처럼 ─ 마치 풍운산을 '태평천국의 실세' 처럼 언급하는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옳아 보인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이야기는 되지 못합니다. "실세" 라는것은 명분상의 인물을 내버려두고 실질적으로 커다란 권한을 자기 의지껏 행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풍운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홍수전이라는 인물을 위해서 헌신적이었습니다. 훗날 다른 간부들이 홍수전에게 취한 태도를 생각해보면, 풍운산의 빠른 죽음은 태평천국이라는 집단과 홍수전에게 분명한 불행이었습니다.


 1843년 여름, 홍수전은 풍운산과 홍인간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세 사람은 서당에서 사적으로 세례를 행했고, 그 다음에 근처의 개울로 가서 몸 전체를 푹 담그고 세례를 다시 받았습니다. 풍운산과 홍인간은 그 후부터 홍수전의 완전한 측근적인 인물이 되지만, 역으로 첫번째 신자인 이경방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이 핵심적인 측근 그룹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입니다.


 홍수전은 홍인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내가 병에 대한 체험 없이 그 책을 받았다면, 그 내용을 감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 또 앞장서서 세상의 관습을 반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만약, 내가 그저 앓기만 하고 그 책을 받지 못했다면, 내 꿈의 진실성을 입증할 증거도 더 이상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하느님 면전에서 즉각적인 명령을 받았다. 하늘의 의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몇달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모임을 지속했으며, 양아발의 그 책을 탐독하고, 연구하고, 설교하며, 책자에 나오는 대명사들이 지상, 또는 하늘의 어떤 존재와 연결되었는지 알려고 노력합니다. 


 이 당시 홍수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역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당장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가 그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을 뿐인데, 백여년은 더 전인 시대의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본심은 어떠했는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촉발된 사건들이 결국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과거에 세차례 낙방한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당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몇몇 정치가와 군인 ─ 강충원(江忠源,), 증국번(曾國藩), 좌종당(左宗棠), 이홍장(李鴻章) ─ 들이 제국의 군사력과 재력을 10여년 이상 쏟아부어야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도, 역시 상상하기 어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염원, 1940년대 광시성의 산악지대에서, 소규모의 농민과 이주노동자를 상대하던 그 시절의 홍수전에게, 진실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도 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에 어느정도의 대가가 필요할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홍수전, 홍인간, 풍운산. 세 명은 차츰 자기 가족과 서로의 가족을 개종시켰고, 광시 성 서부에서 잠시 홍수전의 집에 들른 먼 친척 두 명 역시 홍수전의 말에 설득되어 그에게 세례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대로 지상의 모든 요괴를 처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홍수전과 그 일행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꺠달았습니다.


 권세양언의 구절들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탐독한 결과, 홍수전은 우상을 타도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사람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상" 이라면, 홍수전이 서당 노릇을 하고 있는 곳의 중요한 곳에 서 있는 공자의 위패였습니다. 홍수전 등은 즉시 위패를 하나하나 제거했고, "이교도"의 우상으로 오염된 장소를 "청소"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자의 위패만 치우는것이 아닌, 공자 이후 2천년간 추앙받은 유학의 위대한 사상가와 실천가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모든 위패를 철거하는 일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이 "무언가를 했다" 고 한다면, 그 일을 실감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학생의 부모들은 공자의 위패가 철거된 것을 알자 자기들끼리 수근거렸을 텐데, 그 여파인지 서당에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자연스레 서당의 수입도 감소했습니다. 관록포 마을 근처에 있는 일부 생원(生員) 들은 홍수전의 행동에 대해 비난했으며, 그 중 한사람은 권세양언에 나타나 있는 논리적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홍수전은 그와 본래 가지고 있는 관계를 전부 끊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좁은 마을에서 배웠다는 인물로서 홍수전의 학식은 여전히 존경받는 측면이 있었기에, 1844년 향촌의 촌로들은 여전히 홍수전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원소절(元宵节)을 기념하는 송시(頌詩)를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찬양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곧 우상이라고 여긴 홍수전은 거절했습니다. 


 이에 촌로들은 격분했지만, 나름대로 점잖하게 시를 지어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무능한 우리 노인들이 젊은이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줄 생각도 못 했네.
 경륜이 몸에 가득하여 베풀만도 하건만.
 참언(讒言)을 확신하여 그것만을 고집하네.


 홍수전도 어느정도 점잖게 대응했습니다.


 참언을 확신하여 당신들의 요청을 거절한것이 아니라,
 상제의 계명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오.
 천당과 지옥으로 가는 길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어찌 이승에서의 삶을 바보같이 살아갈 수 있는가?


 하지만 결국 홍수전은 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직업을 잃게 됩니다.


 홍수전은 완전한 무일푼이었고, 이 시점에서 아내는 딸을 출산했습니다. 홍인간은 부모와 큰형에게 두들겨 맞았는데, 공자의 위패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때문이었습니다. 홍수전은 남은 붓과 벼루를 팔아버려 푼돈을 마련하고, 풍운산과 풍운산의 두 친척과 함께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현실상의 문제와 고립으로 인해, 홍수전과 풍운산이 절망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권세양언에서는 "예언자는 고향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는 성경의 이야기가 인용되어 있으므로, 되려 오히려 신앙이 더 강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홍수전과 풍운산, 그리고 두명의 다른 일행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세상을 떠돌며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의 교리를 가르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갑작스런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예수의 행적을 흉내낸 것인지, 예수의 사도가 다닌 머나먼 여정을 본뜻 것인지, 혹은 궁지에 몰려 살기 위해서 떠난 것인지. 그 동기는 정확하게 파악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적은, 그들 자신조차도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처음에 그들은 광저우로 떠났고, 그 이후로 광동 여기저기를 다니며 설교를 했지만, 34일간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실제 출발지에서 떨어진 거리는 160km 남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60km 거리에 도달했을 무렵, 홍수전은 일행이 떨어지자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풍운산의 두 친척은 고향과 가족에게 돌아갔지만, 오직 풍운산만은 동행을 주장하여 홍수준과 같이 움직였습니다. 두 사람은 실로 대담한 생각을 했는데, 서쪽으로 광시성까지 걸어가고, 계평(桂平) 지역까지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홍수전의 먼 친척이 살고 있었고, 홍수전의 집을 방문했다가 홍수전에게 개종 당했지만, 당시 홍수전이 있던 곳에서 계평까지는 400km 거리가 넘었고 풍운산과 홍수전은 길을 전혀 몰랐습니다. 심지어 가는 길에 먀오족과 야오족같은 존재들이 주로 살고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씁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여행은 대단히 순조로웠습니다. 지나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두 명을 도와주웠고, 먀오족을 가르치던 한족 선생은 그들을 위해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었습니다. 비록 먀오족에게 전도하는 일은 언어의 장벽때문에 실패했지만, 둘은 노출된 온갖 위험과 부족한 여비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둘은 "하나이신 진정한 하느님의 보호 아래 이동하고 있다." 고 확신했습니다.


 1844년 5월 21일. 두 명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았습니다. 친척들과 그곳 사람들은 홍수전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홍수전과 풍운산은 이 지역에서 전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호재가 있었는데, 홍수전이 거주하던 집의 주인이던 왕씨라는 사람의 아들이 이웃마을 씨족의 고발로 체포되었을때, 홍수전은 자신이 공부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행정공문에 사용되는 언어와, 준수되어야 하는 공문형식으로 진정서를 작성 했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젊은이의 석방을 위해 기도 하자고 한뒤, "기도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진정서를 지방관리에게 올렸습니다. 세련된 문장의 진정서는 효력을 발휘했고, 몇 주 후에 왕씨네 아들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왕씨네 아들은 홍수전의 새로운 신앙에 귀의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마을 주민들도 100여명이 가량이 홍수전을 만나 개종했습니다. 


 이렇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을때, 홍수전과 풍운산은 잠시 산 속의 오두막으로 거처를 이동했다가, 이후 따로 지내게 됩니다. 홍수전은 왕씨네 집으로 되돌아왔고, 풍운산은 계평현으로 나아가 장씨 라는 인물을 새로운 친구로 만들고 그 집에 거주했습니다. 곧 노자가 다 떨어질 무렵이 되자, 홍수전은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수전은 새로운 종교로 개종했지만 이전까지는 유학을 공부했고,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에서도 효도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걱종하고 있을테고, 무엇보다 홍수전은 아직 딸만 있었기에, "대를 유지하는" 효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홍수전은 계평현에 들러, 장씨네 집에서 풍운산을 찾으려 했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미 집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홍수전은 이 말을 믿고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의 신도들이 그를 도와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열이틀의 여정 끝에 올때만큼이나 순조롭게 귀환한 홍수전은,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을 만나 물었습니다.


 "풍운산은 어디에 있소?"


 하지만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대답은 모두 한결 같았습니다.


 "자네와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풍운산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풍운산의 가족들은 홍수전을 비난했습니다. 그가 풍운산을 개종시키고 장거리 여행에 동행하도록 설득했으며, 결국에는 그를 버린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홍수전은 물론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우선 돈이 없었고, 다시 먼 여정을 떠날 여력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홍수전에게 선생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사실 풍운산은 계속 계평 현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홍수전이 그를 찾으러 왔을때 조차도, 그는 장씨 집의 집안사람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대체 홍수전을 만난 장씨 주인이 무슨 의도로 그가 떠났다고 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해 홍수전과 풍운산은 엇갈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엇갈림이 결국 역사를 바꿨습니다.


 홍수전이 떠난지 한달 쯤 될 무렵, 풍운산 역시 계평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홍수전처럼 강을 따라 광저우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광시 성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했습니다. 풍운산은 여정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개종자들을 만들어내고, 홍수전에게 배운 방법대로 그들에게 세례를 해주었으며, 홍수전이 홍수전의 "형" 인 예수,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이자 "전능자" 인 진정한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 ─ 꿈 ─ 을 보다 세밀하게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풍운산이 이동하고, 좀 더 체계화된 모습으로 전파를 하자, 이제 드디어 종교 단체의 모습이라고 부를 법한 기초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배상제회(拜上帝會)이며, 진정한 모든것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풍운산은 본래의 고향으로 내려오기는 커녕 좀 더 깊숙한 산속, 그리고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권력과 유교적 가르침을 받은 지방 유력자들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막강한 입김을 가진 지주들의 힘도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풍운산은 산속 깊숙한 곳을 개발한 객가들과 쉽게 친밀감을 유지했고, 심지어 산속에 사는 다른 부족민들과도 특유의 친화력을 이용, 급격하게 친해졌습니다.


 대장장이, 목수, 방앗간의 쌀 짛는 사람, 떠돌이 이발사, 점쟁이, 약장수, 소금장수, 광부, 도부장수, 뱃사람, 나무꾼, 숯쟁이, 행상, 날품팔이 등등, 어려움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풍운산은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본래 살던 선주민이든, 장족이든, 요족이든, 객가든, 사람은 모두 상제의 아들이기 때문에, 한 가족이며, 또한 형제자매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 지방에 사는 객가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고, 또 본래의 주민들과의 대립과 항쟁을 넘어, 새롭게 결집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단기간에 풍운산이 조직한 신자만 최소 3,000명. 이 모든것이 빈손으로 북상한 풍운산, 개인이 혼자서 해낸 성과였습니다. 풍운산은 계속해서 그곳에 머물며 조직을 정비해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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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140%득표율러시아자유주의자당 | 작성시간 13.01.20 헉헉 늘 좋은글 감사드립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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