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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79) ─ 지상의 성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1.27|조회수506 목록 댓글 1









 "태평천국" 이라는 집단에 대한 평가는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변질된 기독교를 믿고 일어난 사이비 종교의 난리라거나, 혹은 현 중국처럼 마치 혁명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을테고, 그 모두를 긍정하거나 혹은 그 모두를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한가지는, 홍수전과 그 일행이 일으킨 작은 파장이 결국 어마어마한 파도로 되돌아온것은, 그 발걸음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홍수전과 풍운산을 폭풍 속으로 인도한것은 종교적 열망 때문입니다. 양수청과 소조귀도 그러하긴 하겠으나, 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시대상과 계급적 불만이 더 커보입니다. 위창휘는 대지주였고, 그 지역에서 이름난 부호였습니다. 기근이 들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던 그는, 종교적 열망 보다는 마치 천지회 협객과 같은 의지로 배상제회에 가담했을지 모릅니다. 스무살도 안된 석달개가 홍수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것은, 어떤 이상주의적 태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생각을 안고 한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비적들도 있습니다. 8개 집단의 천지회 조직은 청군과의 싸움에서 몰려 배상제회에 가담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배상제회는 반청 집단이었고, 그 점에서는 천지회와 같았지만 그 둘은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종교 집단은 기본적으로 일체 단결하고, 엄격하고, 규율을 중시하는데 반해, 마치 수호지 속의 호걸 무리들 같은 천지회 조직은 기질적으로 완전히 반대입니다. 홍수전은, 천지회를 받아들여도 좋지만 착실히 종교 교육을 실시해 신자로 만들던지, 적어도 신앙을 이해하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상제만을 믿고, 배상제회의 계율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그들은 합류했지만, 실제로 배상제회에 합류해 보니 그 규율이 상상 이상이라 8명의 수령 중 7명이 얼마 안 있어 "규율이 너무 엄하여 지킬 수 없다." 는 이유로 이탈하였습니다. 오직 한 명, 나대강(羅大綱)이라는 인물만이 남았으며, 그는 훗날 태평군의 이름난 장수가 되었습니다. 


 이 고도의 금욕주의야말로 신흥의 배상제회로 하여금, 기존의 천지회를 대신하여 중국 당대의 수많은 민중반란에서 중심세력이 되게 한 커다란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합니다.


 새롭게 밀려오는 유민들과 신도들, 그리고 비적들로 인해 극도의 무질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청군은 2차 공격은 준비했습니다. 지난 번의 싸움에서 밀린 일도 있고 하여 보다 철저하고, 그리고 대규모로 이루어진 공격이었습니다. 청군은 단련의 지원을 받고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진군했고, 이에 맞서는 배상제회의 군단은 모두 1만명이 적을 맞이하러 나섰습니다. 대규모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배상제회 역시 군단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좌군은 양수청이 이끌었으며, 우군은 소조귀가 이끌었고, 중앙은 홍수전과 풍운산이 담당했습니다. 전투는 1851년 1월 1일에 벌어졌습니다.


 이 싸움에서 만주족 장군인 이커탄부(伊克坦布)는 7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수전과 풍운산이 있는 중앙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러자 소조귀와 양수청은 좌우 양쪽에서 돌아 나와 협공을 하여 적을 요격합니다. 이커탄부는 후방과 단절되었고, 곧 배상제회 군대로 인해 작은 산둥성이로 몰렸으며, 최종적으로는 지리멸렬하게 참패하고 맙니다. 이커탄부는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가 탄 말은 미끄러졌고 넘어진 이커탄부를 추격한 배상제회의 한 보병이 그를 베어버렸습니다. 


 청나라 쪽에서는 군관 10여명과 병사 300명이 전사했습니다. 이튿날 계평에 있는 총병이 파견한 원병마저 패하게 되자, 남아 있는 청군은 퇴각했습니다. 이후 보고가 올라오길,


 "홍건을 손에 든 수명의 적이, 장발을 늘어뜨린 채 검을 들고, 입으로 주문을 외면서 많은 부하를 이끌고, 결사적인 싸움을 걸어 왔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놀랄말한 승리와, 1월 11일이 홍수전의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승리 후에도 배상제회의는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지회 출신의 입회자들은 엄한 군율, 무엇보다 승전 이후의 전리품 문제 때문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홍수전은 자신의 의견을 5개 규정으로 요약해 발표했습니다.


 1) 명령에 따를 것
 2) 남자의 부대와 여자의 부대를 별도로 할 것
 3) 사소한 것이라도 범하지 말 것
 4) 공정한 마음으로 협조하고, 수령의 통제에 따를 것
 5) 마음을 하나로 하여 협력하고 전투에 임해서는 퇴각하지 말 것.


 이러한 조치들에 반발하여 여러 명의 비밀결사 지도자들은 배상제회를 버리고 오히려 청조에 투항했습니다. 뒤숭숭한 상황 속에, 홍수전과 다른 지도자들은 이곳을 포기하고, 보다 방어하기 쉬운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에 일치를 보였습니다. 그들이 최종 목표로 결정한 곳은 장커우(江口)로, 현재의 위치에서는 24km 떨어져 있습니다. 그곳은 거래를 통제하고 보급품을 정비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지역일 것입니다.


 이리하여 1월 중순경, 배상제회 신도들은 청군의 반격이 재개되기 이전에에 재빨리 지역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월 말에는 여유있게 장커우를 점령하였고, 그곳에서 군대를 정비했습니다. 홍수전에게 있어 더 기쁜 소식은, 배상제회를 이탈하지 않은 유일한 천지회계 인사인 나대강의 존재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홍수전과 합류했고, 그 이후 태평천국 천왕의 참모로서 활약하며 수상전투, 항해술, 물자보급의 지휘와 실행에 관계된 지식을 전수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장커우는 반란군이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는 너무 좋은 곳이었기에, 청군은 곧바로 반격을 하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장커우로 접근하는 청군의 숫자가 1만여명을 넘어서자 배상제회 지도자들은 서둘러 이곳을 떠났고, 그들이 퇴각하는 동안 장커우는 완전히 불에 타버렸습니다. 청나라와 배상제회 양쪽은 이 문제에 있어서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 와중엔 1851년 3월. 홍수전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미루어왔던 "태평천국"의 존재를 정식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평천국의 존재를 선언하면서 어떤 의식도 없었고, 따로 선언한 기념일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태평천국군이 특정한 기념일을 축하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나 1851년 3월 30일 부터, 새로운 종류의 공개적인 의식이 거행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수립된 태평천국의 존재이지만, 아직 천국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태평천국 원년인 1851년 봄부터 혹서의 한여름까지는 끊임없은 공방전이 여기저기서 벌어졌기 떄문입니다. 청군은 거의 2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해서 이 신종 집단의 불꽃을 잠재우려 안간힘이었으나, 그 당시 청나라 군대는 이미 실력적인 면이나 사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히 지구 전체에서 가장 바닥에 있는 무력 집단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도태되어 있었습니다. 광서 순무는 한탄하길,


 "우리 병사는 매를 만난 참새와 같이……발을 싸맨 양과 같이 한 사람도 움직이려는 자가 없다."


 또한 당시 전권대신이었던 새상아(賽尙阿)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씁니다. 


 "이 반란집단은 다른 유적(流賊)과 전혀 다른 자들입니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성원이 다수 있어 단결도 매우 강합니다. 계략을 쓰고 첩자를 사용하여 해산시키려고 해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거듭해서 처벌하거나, 체포해도 그들이 통과하는 지방에서는 차례로 우민을 선동하여 동료로 끌어들입니다. 일단 동료로 들어가면 모두 태연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투의 선두에 서서 포로가 된 자나, 그들이 지방에 내보낸 첩자를 붙잡아 고문을 가해도 두려움을 모르고 사형을 면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습니다. 천부천형의 사설(邪說)을 믿으면서 죽어도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양광 총독과 광동 순무는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입회한 자는 모두 미혹에 빠져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것을 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보통의 이단 종교의 모반자나 천지회비에 비하면 전연 다른 자들입니다."


 나중에 태평군의 일원 중 한명인 홍인간은, "금전기의(거병) 초기는 다년간 신의 조화에 의해 군중들의 마음이 금석과 같이 견고했다." 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공할 보고는 사실, 자신들의 무능을 감추려는 청나라 고관들의 과장도 일부 섞여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청군과의 여러 전투가 모두 태평군의 승리로 돌아간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여러 전투 가운데 가장 뼈아픈 것은 1851년 중순 경의 싸움들입니다. 그 당시 태평군이 머물고 있던 지역으로 남쪽으로 110km 떨어진 지역에서는 능십팔(淩十八)이라는 인물이 별개의 조직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능십팔 역시 배상제회의 중 한명이었고, 막대한 재산을 배상제회에 기부했습니다. 1850년 무렵 동안 그는 한곳에 모여있는 다른 배상제회 조직들과는 별도로 움직이며 곡물과 병력을 모았고, 이 시점에서는 3천여명이 이르렀습니다. 


 물론 능십팔은 그 세력을 가지고 북상하여 홍수전과 힘을 합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만에 달하는 태평군에 또다른 병력이 충원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지 예상할 수 있을 정도의 상상력은 갖춘 청군 지휘관들은, 재앙이 닥치지 않기 위해 홍수전의 남하와 능십팔의 북상을 필사적으로 저지했습니다. 양쪽의 배상제회 군단은 청군을 거듭 공격했지만 결국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청군은 태평군의 근거지 전역에 대한 압박을 계속 강화했습니다. '지상낙원' 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태평군의 사기는 점점 가라앉았습니다. 1851년 8월 무렵, 홍수전의 세력은 무려 3만이 넘는 대세력으로 변모해 있었지만, 그러나 청군 지휘관이었던 향영(向榮) 및 오란태(烏蘭泰) 등은 태평군을 거의 전멸에 가까운 위협으로 몰아 넣으며, 토끼몰이처럼 압박했습니다. 


 태평천국 지도부는 이제 선택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 일대가 태평천국운동이 발생하고 성장한, '신성한' 지역임에도 불구, 이제 이 지역을 벗어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태평천국 지도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예 "논의" 자체를 금지해버리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지만, 실제로는 십중팔구 이 문제로 지지자들간의 엄청난 논쟁이 있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홍수전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한편으로는 상제의 이름을 언급하며 변명하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아예 배상제회 신도들의 집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단호하게 움직였습니다. 소조귀와 석달개가 육군을 이끌고, 일부 수군을 나대강이 이끌면서 태평군은 동북으로 96km 떨어진 영안(永安)으로 이동했습니다. 홍수전과 양수청은 중앙을 이끌었고, 풍운산과 위창휘가 후방을 엄호했습니다. 3민이 넘는 대집단을 그래도 무리없이 인도하게 했다는 측면에서, 이 시점의 홍수전이 가지고 있는 통솔력은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태평군이 종교적 집단이라 일반적인 비적 무리들보다 규율이 훨씬 강했다는 측면도 고려해야 하긴 합니다.


 천신만고의 고난 끝에, 1851년 9월 24일, 태평군은 영안 성의 외곽에 도착했습니다. 영안 성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여있긴 했으나, 태평균의 맹공을 막을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태평군의 지도자들은 이 시점에서 상당히 현명하게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단단한 성벽에 바로 박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달그닥 거리는 돌멩이를 바구니에 잔뜩 넣고, 몇 마리 안되는 말을 타고 성벽 주위를 돌아다니게 하면서, 동시에 성벾 밖에서 다량의 불꽃화약을 밤새도록 성안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러자 성 안의 수비대는 혼란에 빠졌고,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패닉상태가 되었습니다. 성안 주민들이 폭발소리, 연기,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질때, 날이 밝음과 동시에 태평군은 가지고 있는 모든 대포를 성의 동문에 조준하여 공격하고 공성용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침입했습니다. 수비대는 변변한 저항조차 못했고, 저녁 무렵이 될 즈음에는 800명의 청군이 죽고, 군관들은 살해되거나 자결했습니다.


 1851년 10월 1일. 홍수전은 성 내에 입성했습니다. 그가 꿈 속의 하늘에서 천계 33층을 거슬러 올라가며 요괴의 군단과 전투를 치룬지 14년, 이제 그는 처음으로 지상의 성을 점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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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Black Lucy | 작성시간 13.01.28 숙취엔 여명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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