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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81) ─ 증국번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1.29|조회수670 목록 댓글 5



 아직 태평군인 남경 ─ 이제 곧 천경이라 불릴 도시 ─ 에 입성하기 직전, 우창에 있을 당시, 그들은 광서에서 장사에 이르는 길을 가는 동안 너나할것 업이 너덜너덜한 짦은 웃옷에 바지 차람이었고, 다만 머리를 감싼 헝겊의 색과 종류 및 크기로 신참과 고참, 지휘관을 구별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절대 권력자인 천왕 홍수전이나 동왕 양수청 마저도 붉은 의복과 방한모로 다른 장병과 차이를 나타낸정도가 다였고, 거의 똑같이 누더기를 걸치고 짚신을 신고 도보로 산야를 넘었습니다. 어쩌다 대나무로 만든 의자형 가마라도 타게 되면 그야말로 최상이었습니다.


 이런 마당이니, 처음 우창 등에서 청군이 버리고 간 온갖 금은재화를 본 그들이 신나고 기뻐했던 일은 너무 당연합니다. 사실 그들은 그런 재물과 보물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태평군의 부인병, 즉 여군이 관료의 예장용 옷을 걸친다던지, 남자가 부인용의 모피를 몸에 걸치고 여봐라고 우쭐해 한다던지, 화려한 이부자리와 의류를 눈이 녹아 질펀한 길 위에 올려놓다던지, 전족하지 않은 커다란 발에다 오랜 여정으로 까맣게 그을린, 100Kg 의 물건도 가볍게 들어올리는 '여장사' 들이 화려한 옷을 목에 걸치고, 머리 가득히 은과 비취로 된 비녀를 꽃은채 활보한다던지.


 태평군의 지배 속에 숨을 죽이고 있던 신사층은 이런 기록을 남기며 그들을 조소했습니다. 다만, 이들은 그저 몰랐을 뿐입니다. 누구라도 촌스럽고 싶어서 촌스러워 지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부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어떻게 그것을 써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눈이 돌아갈 대도시와 부를 최초로 목격한 그들은 얼이 빠질 정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태평군이 확고한 근거지를 갖추게 된 이상, 새롭게 만들어지는 규율과 규칙들이 그들을 압박했습니다. 홍수전과 양수청등은 풍운산이 처음 태평군에 도입시킨 군사사상을 발전시켜 군대에서 오장이 4인의 병사를 관리하고, 양사마가 5인의 오장을 포함한 25인을 통솔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지상낙원' 에서도 네 집의 가족이 오장의 가족과 연결되어야 하고, 25개의 가족 단위가 양사마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공동체 단위는 공동의 곡물창고를 건설하고, 예배를 위한 예배당도 세워야 하며, 양사마는 이 예배당에 거주했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오장은 자기 가족과 나머지 네 가족을 예배당으로 인솔해 와서 예배를 보게 해야 합니다. 남녀는 따로 떨어져 앉아 양사마의 설교를 듣고, 천부(天父)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만 했습니다. 일곱번째 안식일마다 모든 고위급 장수들은 자기 휘하 양사마의 교회들 중 한 곳을 방문하여 신도들에게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태평군은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상당히 광범위한 자료를 모았으며, 이를 행정에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량 씨 라는 어떤 태평천국의 주민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의 나이는 그 당시 34세이고, 계평에서 태어났으며, 1850년 8월 금천에서 태평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9월에 양사마에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진급했으며, 부친은 계평에서 사망했고 그의 부인은 태평군의 깃발을 만드는 기관에서 일하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주민에 대해서는 공동창고에서 식량을 분배하며, 차별을 하지 않고, 성인 남성은 군대에서 복무를 하면서, 홀아비와 과부, 고아, 아이가 없는 사람, 노약자 등의 사회적 약자는 배려를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이상적인 제도는 단 한번에 실현될 수는 없습니다. 


 종교적인 면으로 보자면, 대도시인 난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중에 도교 신자와 불자들은 예외없이 '참회'의 대상이 되어 속죄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역사적 가치를 따지는것조차 불경스러울 각종 도관과 사찰들은 요괴의 소굴로 간주되어 박살나고, 불타버렸습니다. 태평군의 병사들은 한 손에 칼을 든채 자신들의 종교를 설교했습니다. 예외적으로, 난징에 있던 중국인 무슬림은 그다지 큰 공격을 받지 않았고, 도시 안의 몇몇 모스크도 보존되었습니다.


 애매한 입장이 가장 강한 사람들은 물론 중국인 가톨릭 개종자들입니다. 태평군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모두 200여명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는 혼란 속에 30명 정도가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들었습니다. 태평군은 그들을 찾아내었고, 태평군의 예배의식대로 기도문을 외우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그러한 행위를 거부했습니다.


 손발이 묶인 채로 재판을 받게 된 그들은 본래 사형에 처해졌어야 하나, 무슨 영문인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태평천국의 기도문을 읽은 뒤에 '의외로' 비교적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와 차이점이 적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고쳐먹게 됩니다. 다만, 아직도 굴복할 의사가 없는 몇명은 전방으로 끌려가 병사나 인부가 되었는데, 대부분은 달아났습니다.


 천경의 모든 이들에게 상제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하여 최소한 400여명의 인원들은 끊임없이 글자를 베끼고 목판을 새기는 작업을 하면서 성서를 출판했습니다. 그 중에, 도저히 중국의 윤리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들 ─ 롯과 그의 두 딸이 관계를 맺는 등등 ─ 은 생략이 되었습니다. 


 학자 출신으로 태평군에 가담한 지식인들은 일종의 성직자처럼, 태평군의 사상과 난징을 천경으로 전한 이유에 대해 그들 나름의 신학적인 관점으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대체로 서로 격리되었고, 가족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태평군의 지도부는 많게는 수십명에서 적어도 여러명의 여자들을 거느렸습니다. 다만, '적어도' 이 시점까지 이 일은 색욕과 관련된 부분이라기보단 차라리 지도부의 위신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계평에서도, 영안에서도, 우창에서도 안전하지 않았던 홍수전은 이제 안전합니다. 목책과 성벽, 그리고 해자 뒤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방의 망루에서는 위병이 경계를 서고, 자기 곁에 있는 여자들이 시중을 들고 있는데 가운데 홍수전은 자신의 왕국을 굽어볼 수 있었습니다. 홍수전이 직접 편찬한 저서들과 노래들을 외우고 있는 천경의 신민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황상제꼐서는
 둘도 없는 오직 한분이시네.
 애초부터 그 분은 능력을 보여주셨으니,
 하느과 땅을 창조하셨네
 만물이 모두 완벽해졌을 때
 세상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지
 빛과 어둠을 가르자
 낮과 밤이 계속 반복되었네
 해와 달이 빛을 비추었고
 별과 별자들이 질서를 이루었네
 바람은 사방으로 불었으니
 그 기세가 맹렬하고 사나웠네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올랐고
 창공에서 비가 내렸네.
 홍수가 지난간 뒤에
 세상을 동정하신 상제께서 약속하셨지.
 다시는 큰 물로 멸하지 않겠노라고.
 그 징표로 무지개가 떠올랐지.
 그분께서 요괴를 죽이고 요괴를 쓸어버리시니,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내리쳤네.



증국번(曾國藩)


 홍수전이 자신의 제국을 굽어볼 무렵, 현실의 제국인 청나라는 경악과 비통에 잠겼습니다. 태평군의 기세는 실로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정부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형편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주기인들로 이루어진 군대들이야 그 질은 이미 논하는 일조차 부끄러울 지경에 처해있었습니다. '말을 타지 못하는 기병' 들이 드물지 않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싶습니다. 한족들로 이루어진 녹영은 몇십년 무렵에는 만주족 부대보다는 상황이 나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모병제도로 바뀐 이래 병졸의 사회적 지위도 땅바닥에 떨어졌고, 부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인간쓰레기를 보는것과 진배없었습니다. 실제로도, 녹영의 태반은 더 이상 구제할 방법조차 없이 아편이 골수에 찬 아편 중독자들이었습니다.


 팔기와 녹영. 이 두 집단의 무능은 끔찍할 정도였습니다. 태평군이 계림을 공격하다 떠나자, 계림의 정부군은 일부러 느릿느릿 추격했습니다. 서둘러 추격하면 전투를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학살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데 방관하기만 한 적도 있었습니다.


 광서에서 출발한 태평군이 남경에 이를때까지, 그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건 팔기와 녹영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강충원이 조직한, 초용(楚勇)으로 불린 단련이었을 뿐입니다. 정규군은 싸울때마다 깨지고 도망을 치는데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병력이 더 잘싸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자, 청나라는 그동안 치를 떨었던 민간인들의 집단, 단련에 대해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제국이 단련을 두려워한 것은 그것이 반정부 운동으로 이어질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군은 지금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보려고 해보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태평군을 괴멸시킬 수도 있었던 강충원은 관료로 말하자면 거인이었습니다. 중앙에서 보면 거인에 불과한 강충원조차 저렇게 강력한 부대를 조직했는데, 더 높은 고위 관료가 본격적으로 손을 대면 어떻게 될 거인가? 조정에서는 호남 순무인 장량기(張亮基)에게 한 통의 문서를 보냈습니다. 장량기가 열어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귀향한 시랑(侍郎), 증국번과 함께 호남성의 단련을 관할하라."


 장량기로서는, 당연히 증국번의 모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증국번은 어떠한 사람인가.


 호남성 출신인 증국번은 도광제 시절, 27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했습니다. 지방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홍수전과 달리, 그는 시작부터 한림원에 들어가며 고급 관료 과정을 밞았고, 홍수전이 배상제회를 조직하던 1849년에는 오늘날의 교육부 차관급인 예부시랑으로 승진해 있었습니다. 출발점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태평군의 기세가 남방을 모두 휩쓸어가던 1852년, 증국번은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한 증국번은 관습에 따라 27개월 동안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상을 치르기 위해 호남으로 향했습니다. 우창에 도착했을 무렵, 호북 순무였던 상대순이라는 인물은 태평군이라는 비적들이 지금 장사를 공격하고 있으므로, 우회해서 귀향하는것이 좋다고 조언해습니다. 조언에 따라 증국번은 우회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조언을 해준 상대순은 우창 함락 때 전사했습니다.


 이런 여정 끝에 고향에 도착한 증국번에게 단련에 관한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내키진 않았지만, 증국번은 아우인 증국전(曾國荃)과 논의한 끝에 장사로 가서 순무 장량기를 만났습니다. 장량기는 이때 좌종당(左宗棠)이라는 한 인물을 참모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 좌종당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근대사의 거인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단련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단련을 만든다. 하지만 요컨대 말하자면, 쓸모 있는 군대를 만들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자면 일반적인 모병으로는 안됩니다. 이전의 방식으로 모병을 해봐야, 더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바닥 인생' 들의 집합체와 같은 불량스러운 집단이 될 뿐입니다. 증국번은 자신만의 인재 등용법을 내세웠습니다.


 "흙 냄새가 나고, 순박하고 착실한 젊은이, 즉 시골 사람일수록 좋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이 매끈한 남자나, 한량 같은 사내나, 관공서에 뜻이 있는 자는 채용하지 않겠다."


 또한 그는 사령관 격인 자기 밑에서 일할 간부들로 자신의 문하생들을 채워 넣었습니다. 증국번 자체가 고위 관료이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렇게 증국번에게 채용된 문하생들은 또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 예컨대 제자거나 집안 일로 연결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불러 자신들의 보좌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반복되자, 증국번의 조직은 윗사람 부터 아랫사람까지 인간적인 연결고리로 강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기준이라면 이렇게 연줄로 연결된 군대가 강력한 힘을 보일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청나라는 일반적인 나라가 아니었고, 당대의 시국도 일반적인 시국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결속이 느슨한 ─ 좀 더 본격적으로 말하자면 지휘관은 싸움이 나면 우선 도망치고, 아편을 피우던 병사들도 적군이 몰려오자 뿔뿔이 흩어지는 등 엉망이었던 정부군에 비해, 증국번의 이 부대, 곧 상군(湘軍)은 동향이라는 연결고리로 묶여져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부대는 청나라의 군대가 아닙니다. 증국번의 부대이며, 증국번을 따르는 사람들의 부대입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오직 자신의 스승을 위해서 일 뿐이고, 또한 스승의 스승을 위해서일 뿐입니다. 부패한 청조 따위야 시간이 지날수록 알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군벌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국의 근현대는 군벌의 시대이며, 증국번의 그 군벌의 아버지격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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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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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13.01.29 당시 청나라 상황이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요새 정말 신불해님 글 읽는 재미에 삽니다 ㅠㅠ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1.30 정말 재밌어요~~ 정말로~ 필력이 정말~
  • 작성자zombie | 작성시간 13.01.30 잘 읽고 갑니다~~!!
  • 작성자열혈청년 | 작성시간 13.01.30 좋은글 감사합니다. 공부 잘하고 있읍니다.
  • 작성자타마네 | 작성시간 13.01.31 시작은 명말이었는데.. 어느새 증국번까지 ㅇ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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