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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83) ─ 재앙의 전조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2.02|조회수495 목록 댓글 0



 지상낙원의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인가?


 태평천국의 지도부는 야심만만한 전략에 따라 행동해왔지만, 단지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53년 5월, 그들은 '요괴'의 소굴인 베이징을 점령하기 위해, 광시 출신의 노련한 병사와 새로 모집한 신병으로 구성된 약 7만명의 충성스러운 태평군 부대를 급파하여 북벌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군사작전을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청군은 태평군 쪽에 거짓 정보를 흘려 넣었고, 청군이 대규모 남진을 시도중인 것처럼 정보를 조작했습니다. 그러나 청군의 실제적인 전략은 단련과 연합하여 작은 시진을 철저하게 방어, 북상하는 태평군의 행군속도를 더디게 만드는게 목적이었씁니다. 게다가 중국 북부의 지형은 태평군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청조 정부가 임명한 특별군관들이 활약하면서 태평군의 북상은 더더욱 지지부진 했습니다. 특별군관들의 임무는 태평군이 접근할 것으로 예상되는 황하 부안의 모든 배를 지켜, 그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태평군은 남경에 이르기까지 계림, 장사 등 저항이 격렬한 성시는 포위를 풀고 나아갔으며, 악주나 우창처럼 점령한 땅도 모두 버려두고 전군이 모두 남경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남경이라는 '점'은 얻었지만 '면'을 얻지는 못했기에 '면' 을 얻기 위한 싸움은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남경 점령 직후에 곧바로 기세를 몰아 북벌하자는 의견등이 있었습니다. 천왕 홍수전이나 북왕 양수청이 북벌하여 개봉을 점령, 대규모 도하작전을 벌여 하북으로 밀고 가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이 의견을 낸 인물은 나대강 입니다.


 하지만 양수청 등의 의사에 따라 남경에서 잠시 쉬었다가, 천왕 등이 이끌지 않은 일부 부대가 북벌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태평군이 처음 봉기하여 남경에 이르기까지 움직임은 실로 신출귀몰한데다, 당사자들조차 자신들의 운명을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혼란속의 연속이었기에 청조 역시 대응할 방법이 마뜩찮았습니다. 하지만 태평군이 남경을 함락함으로서 그 위험성에 대해 모두가 경악하여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베이징 함락' 이라는 적의 목표가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에 역으로 이에 맞춰 확실하게 준비 할 수 있었습니다.


 청조는 그동안 군사적인 부분에서 대단히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베이징이 함락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것은 청조의 몰락을 뜻하고, 청나라라는 썩은 동아줄에 의지해서 부귀를 누리고 있는 본인들의 몰락도 뜻하기에 필사적이었습니다. 청조는 즉시 동북의 군대를 베이징 방어를 위해 이동시켰습니다. 성경, 즉 봉천의 병력 8천명, 차하르 군 4천여명, 길림 군 2천여명, 흑룡강 군 2천여명, 도합 1만 6천여명이 서둘러 베이징으로 달려왔고 각지의 군대들도 속속 집결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습니다.


 청군 지휘관들은 이제 태평군이 성벽으로 돌진해오면, 모든 식량창고와 화약고를 불태워버리라는 명령을 훈령을 받은 상태입니다. 물론 몇몇 지휘관들은 이러한 명령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대부분은 명령을 준수했고 결과적으로 태평군은 물자의 보급과 휴식이 제한되어버렸습니다. 


 광시에서 남경까지 가는 길은 전체적으로 문화권도 비슷하고, 말도 어느정도 통합니다. 당시의 태평군은 수만명이 사망하면 또다시 수만명을 보충 할 수 있어 진격하면 할수록 병력이 늘어나는 구조였지만, 호북을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말이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랐습니다.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주로 먹는 음식 자체도 달랐습니다. 장강 이남의 사람들은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여 밥을 먹지만, 이북은 다릅니다. 장강 이북은 분식(粉食) 문화권이라 만두나 국수등을 주로 먹었던 것입니다. 다른 지역과의 이동이 지금보다 훨씬 덜했던 그 시절 중국에서, 병사들이 서로의 지역에 따라서 쌀이나 밀가루조차 먹지를 못했습니다. 


 당초에 정부군이 태평군을 공격하려고 했을때, 북방에서 온 부대는 남방으로 들어서자,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는 쌀을 보고도 잘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태평군이 북벌을 하게 되자, 쌀 대신 보리들이 가득하여 그것을 잘 먹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기후 역시 남방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태평군이 황하를 건너게 되자, 그들은 거의 아무런 대비도 못한채 혹독한 화북의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행군대열에서는 추위에 떨다 죽는 자들이 속출하고, 동상으로 불구의 몸이 되어 낙오하는 자도 나왔으며, "두 발이 마비되어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땅을 기어가는" 자들도 나타났습니다. 따뜻한 남부 출신인데다 방한복을 갖추지 못한 ─ 그런게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 병사들은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부상과 중국 국가대표팀의 혹사, 그리고 터무니없는 심판들의 편파적인 콜만 아니었다면 훨씬 위대한 선수가 되었을, 의심할 나위없이 가장 위대한 동양인 출신 농구 선수인 야오밍. 최근에 평창 스페셜올림픽을 위해 국내에 와서 봉사를 했는데, 인터뷰에서 야오밍은 "나는 따뜻한 남부 출신이라, 눈 위를 걸어본 적도 없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고 말 했습니다. 야오밍은 상하이 출신입니다.


 그렇게 태평군은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전력이 고갈되었습니다. 광시에서 남경으로 진군할 때와는 달리 진격할수록 병력이 소모되며 전력은 빠르게 약화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당초의 태평군은 이동하는 정권으로, 아예 공세종말점(攻勢終末點)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부 전력을 나누어 북벌하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길도 잘 몰랐습니다. 천경에서는 북벌군에게 "지름길을 이용하라." 고 하였지만, 그들은 지름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악조건에서도 불구, 태평군의 일부 군대는 거의 불굴에 가까운 의지로 천진(天津)의 4.8km 안팎까지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천진에서 베이징까지는 고작 12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태평군의 저력이 그 120km를 메꿀 수 있을 정도로 조금만 더 있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바로 태평군의 공세종말점이었습니다. 몽골 기병이 새롭게 합세한 청군과 지방군이 이들을 막기 위하여 파견되었습니다.




 당초에, 태평군의 메세지를 처음 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각종 장강 이북에 있는 비밀결사들도 흥미를 가지고 접근해왔습니다. 그러나 태평군은 이들의 신망을 저버렸습니다. 식량과 옷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그들은 여기저기서 학살 사건을 일으켰고, 공포의 물결이 백성들을 뒤엎어 비협조적으로 나오게 했던 것입니다. 1853년 9월 23일, 태평군은 하북의 창저우를 공격할때 성을 지키는 관군에게 4천여 병력이 희생당하자, 분풀이로 만주족, 한족, 회족을 총 1만명 학살해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베이징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앞에 있는 청군의 저항은 너무나 강력했습니다. 청군 역시 천진이 함락되면 끝장이라는것을 알고 있었기에, 몇겹이나 되는 진을 치면서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태평군은 미친듯이 일하여 단 하루만에 흙으로 보루를 쌓고, 해자를 팠고, 장애물이 없는 드넒은 대지에 십자형으로 참호을 파 놓았습니다. 하지만 청군은 농사일을 하는 지역 노동자 수천여명을 소집하여 태평군을 에워싸는 견고한 포위망을 구축했습니다. 


 추위, 굶주림, 그리고 너무나 견고한 적의 수비. 태평군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포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참살되었습니다. 지리에 어두운 태평군은 토끼몰이를 하듯이 몰려서 살육되었습니다. 1854년 5월, 청군은 태평균이 요새로 삼은 지역 근처에 있는 거의 말라가는 하천에 대운하의 물이 흘러드는 긴 수로를 완성시켰고, 이 작업이 완료되자 태평군의 주둔지는 진흙탕이 되었으며, 점점 호수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상상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겨울의 동상으로 썩어나간 발가락과 손가락. 그리고 지독한 굶주림에 몽골 기병들의 끊임없는 습격. 그리고 바닥은 물이 차오르는 진흙탕으로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고, 잠을 잘 수도 없으며, 요리를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병마가 속출했을 것이 뻔하고, 그들의 화약은 물에 젖어 못 쓰게 되며, 지붕 위로 올라가고, 사다리에 매달리며, 직접 만든 땟목을 타고 물에 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청군은 무리 지어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물고기를 잡듯이 건져 올리고는, 남김없이 처형되었습니다. 25개월 동안 끊임없이 전투를 거듭하여 약 3,200km를 행군해온 태평군의 전사들은 이렇게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병사들이 양쪽에서 포위되고, 창에 찔려 강으로 자빠지는 그림. 



 만일 태평군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북벌을 하였다면?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유리하게만 전개되진 않았습니다. 태평군은 북벌군과 거의 동일한 규모로, 별도의 서정군(西征軍)을 일으켰습니다. 서쪽에서는 호랑이처럼 틀어앉은 증국번이 태평군을 노려보면서 끊임없이 상군을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과거 장사를 태평군으로부터 수비했던 낙병장과 손을 잡은 증국번은 육군과 수군을 재편하여 점차 가공할 전투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태평군의 서정군은 곧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 부대는 현재의 합비 방면으로, 다른 부대는 우창으로. 그리고 우창에서 태평군은 또 갈라져서 일부는 우창을 공격하고, 또다른 일부는 장사를 공격했으며, 장사로 진군한 부대는 석달개의 지휘아래 천경 서남쪽을 공격하기 위해 또 갈라졌습니다.


 태평군은 장사를 점령하지 못했고, 후난 성을 완전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후난의 신사층은 단련을 모집하여 적극적으로 항거했습니다. 무엇보다 역시 증국번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18세에 불과한 젊은 장군 진옥성(陳玉成)의 활약으로 태평군은 우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합비로 진군했던 태평군은 증오스러운 적을 만났습니다. 과거 태평군을 전멸직전으로 몰아넣었던 강충원이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강충원은 당시 공적을 인정받아 안휘 순무가 되었는데, 그러나 이 당시에는 중과부적의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태평군은 땅굴 위에 또 하나의 땅굴을 파는 이중 땅굴을 건설하고, 시간차를 두어 폭발할 수 있도록 도화선의 길이가 조절된 폭약과 땅굴을 연결하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하여 마침내 이 지역을 함락시켰습니다.


 첫 번째 폭약이 폭발한 이후, 청군 수비대는 폭발로 뚫린 구멍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고, 보수가 거의 끝날 무렵에 또다시 폭발을 일으키면서 병사들을 죽이고, 더 나아가 그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습니다. 성이 함락되자 강충원은 자결했습니다. 태평군은 22개월이 넘게 이 지역을 지켰지만, 나중에는 결국 밀려나게 됩니다.


 장시 지역으로 진군한 석달개는 자신의 리더쉽을 적극적으로 발휘했고, 무려 수만여명의 삼합회 회원들을 모아 군대로 통합했습니다. 석달개는 지방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장시 성 대부분의 지역을 태평천국 정부의 가장 풍부한 식량공급지로 만들었습니다. 단, 파양호 근처에 있는 난창(南昌)은 예외였습니다. 그곳에는 증국번이 있었고, 석달개도 증국번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태평군의 북벌군은 완전히 실패했고, 서정군은 인상적인 승리와 패전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한것은, 태평군의 부대가 천경에서부터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중국 전역을 압박하고 있었음에도, 정작 천경의 북부, 수십 km 부근에서는 청군의 군사력이 태평군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동쪽으로 온 청군은 심지어 천경의 거의 몇 킬로미터 지역까지 다가와서 대규모로 진을 치고, 지금은 반란군의 소굴이 된 거대한 도시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불과 수 킬로미터를 거리에 두고 서로간의 신경전이 벌어지면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중국 전역을 무대로 전투가 벌어지는 괴이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풍운산은 죽었고, 소조귀도 전사했습니다. 살아있는 왕들 중에는 오직 석달개만이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홍수전은 상징적인 지도자로서 궁전 안에 머물며 사색에 잠겼고, 위창휘는 천경 주변부의 방어를 총괄하며 근처에 있는 청군을 경계하고, 천경 내부의 식량 공급을 관리했습니다. 양수청은, 모든것을 했습니다. 일반적인 행정업무부터, 모든 전투활동의 조정자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북벌군으로부터 안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아직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었으며 서정군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고, 프랑스인이 난징을 방문하던 그 무렵, 즉 1853년 12월 말, 양수청은, 자신과 수많은 태평군을 구렁텅이 속으로 몰고가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 중 처음으로 가시화되는 움직임을 취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다시 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북왕 위창휘는 다른 고위관료들과 함께 양수청을 만나 행정업무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에, 갑자기 '하느님' 이 내려왔고, 그 하느님은 양수청의 입을 빌려서 말했던 것입니다. 천왕 홍수전이 가혹하며,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방금전에 자리를 떴던 위창휘는 하느님의 왔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다시 양수청에게 달려갔고, 홍수전 역시 금세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양수청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천왕에게 직무태만의 벌로 장형 40대를 명했고, 홍수전이 장형을 받기 위해 엎드리자 하느님은 비로소 그를 용서하고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이 돌아가자, 양수청은 짐짓 걱정스러운 어조를 보이면서 "하느님"이 말한 홍수전의 문제를 거론하고, 이를 고쳐야 한다면서 "충성스런 상소"의 형식으로 홍수전에게 권고했습니다. 


 같은 달, 양수청은 홍수전이 내린 몇가지 결정, 즉 그들의 교리에 대한 부분에서 몇가지 사소한 부분을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자면 신앙의 핵심을 양수청이 마음대로 수정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용" 이라는 존재에 대해, 기존 교리 해석상으로는 그들은 사악한 요괴에 속했지만, 양수청은 이에 반발하며 용은 영예로운 존재이며, 인간의 영혼을 배신한 동해의 사악한 뱀이나 그 앞잡이들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따졌습니다. 이에 홍수전은 지금부터 태평천국에 관련된 용은 모두 고귀한 금룡이며, 그것을 삐딱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본래의 해석을 고쳤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간단하게 본다면 추상적인 존재에 대한 해석이 약간 바뀐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자면 홍수전을 양수청이 "지적" 했고, 홍수전은 엉결에 변명을 하면서 물러섰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결코 의미가 작지는 않습니다.


 동왕은 이제 서서히 천왕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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