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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88) ─ 원명원, 불타오르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2.24|조회수605 목록 댓글 3




 광저우에서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청나라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1차 아편전쟁 당시 확인된 사실입니다. 영불 연합군 역시 이 문제를 지방 차원이 아닌 나라와 나라의 문제로 만들기 위해 북상을 시작했고, 미국과 러시아는 참관국으로서 같이 했습니다. 1858년 4월, 연합군의 함대는 천진의 외항인 대고(大沽)에 이르렀습니다.


 1차 아편전쟁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조정은 외국의 군대가 베이징 근처까지 오고 있다는 점에 놀라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흠차대신으로 임명된 담정양(譚廷襄)은 현장으로 출동하여 러시아와 미국 공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러시아 공사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각국의 요구를 거부하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것입니다."


 청나라 정부는 적당히 미끼를 주면 그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광동과 복건의 항구를 추가로 더 개항하고, 세액의 절감도 인정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처음부터 구실을 찾아 밀고 올라온 자들입니다. 이 정도 조건에 승낙할 리가 없었습니다. 연합군은 이런 제안은 아예 들은척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상 대고에서 담판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백하를 거슬러 천진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포대를 연합군에게 넘겨주길 바란다."


 이 '통고'는 '공격하겠다' 라는 의사표시 일 뿐입니다. 연합군은 포대를 공격했고, 포대는 두시간 정도 치열하게 맞섰으나 힘의 차이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하급 장교들은 필사적으로 버티다가 죽어나갔지만 상부, 이를테면 흠차대신 담정양 등은 가장 먼저 도망을 치느라 바빴습니다. 연합군은 백하를 거슬러 5월 30일, 기어코 천진에 도착했습니다.


 이쯤되자 청나라 정부도 어쩔 수가 없어, 대학사(大學士) 계량(桂良) 등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저들과 회담을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전권대사는 사소한 일은 통역관인 토머스 웨이드, 호레이쇼 레이라는 사람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회담을 할 의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서로 나눌 이야기는 없고 단지 요구를 밀어부치겠다는 의사표현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문헌에서는 호레이쇼 레이등의 모습에 대하여,


 "관서를 오가며, 목청을 높이고……"


 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일개 통역관이 그 배경을 믿고 흠차대신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계량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고 이를 갈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대화도 필요 없이 밀어부치려는 요구는 무엇이었을까?


 1. 사신을 베이징에 상주시킬 것
 2. 원정군의 비묭 및 광저우 양관 방화의 손해를 배상할 것
 3. 중국 내륙의 통상, 여행, 장강의 통상을 개방할 것
 4. 기독교 선교사 및 신도의 보호, 포교와 신교를 금지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것 
 5. 세율표 개정을 위한 위원을 임명할 것
 6. 해적 진압을 위해 협력과 원조를 할 것
 7. 청국에 보내는 영국 공문서에 영문을 채택하고, 조약은 영문으로 된 것을 정식 문서로 보낼 것



 이렇게 하여 청나라가 이런 요구조건들을 받아들인 일이바로 천진조약(天津條約)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율표 개정' 이라는 항목이 눈에 보입니다. 세율표 안에 지금까지 없었던 양약(洋藥)이라는 품명이 더해졌습니다. 양약은 말 그대로 보면 서양에서 만든 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주로 "아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천진조약은 청나라로 하여금 아편을 공인하게 만드는 목적도 숨어 있었습니다. 이 전쟁이 "2차" 아편전쟁으로 불리우는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당장의 폭풍은 물러나간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1년뒤인 1859년 6월 17일, 천진조약의 비준을 위한 다는 명목으로 영불 연합군은 다시 대고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조약은 이미 조인되었고, 비준서를 교환한다는것이 목적이었는데, 비준서를 교환하는데 16척이나 되는 군함을 이끌고 나타난 것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백하 하구 등지에 뗏목과 철조망등의 장애물을 설치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등은 "청나라가 조약을 비준할 의사가 없다." 라는 구실을 내세운 것입니다. 


 당시 청나라 조정은 순천부윤이 직접 외국인이 살기에 쾌적한 저택을 알아보고 있었고, 외국의 문물이나 외교 전문가들을 베이징에 불러들였습니다. 백하 하구의 군대는 "외이의 도발에 응하지 말라." 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청나라가 비준안에 동의하려고 했던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영국 등은 이를 이유로 도발을 자행했습니다. 백하 하구의 장애물등을 자기들이 제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미군이 아무런 통보 없이 국군의 방어시설을 해체하는 작업을 벌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른 나라 안에서 허가 없이 이런 일을 벌인다면, '침범' 입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받은 대로 공격을 삼갔습니다.


 영국은 사건의 시작에 대해 청나라가 먼저 포격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청나라 측 문헌에는 정반대로 되어 있어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청나라가 포격하지 않았다면 말할 일도 없고, 청나라가 먼저 포격을 했다손 쳐도 영국이 먼저 침범 행위를 시작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사회는 힘이 논리를 깔아뭉개는 법입니다. 영국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6월 25일 오후 2시부터 꼬박 하루를 이어진 이 포격전은,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결과로 끝났습니다. 영국 함대가 되려 상당한 참패를 당해버린 것입니다. 영국 함대는 군함 네척이 격침되었고, 두 척이 나포되었으며 사상자 숫자가 5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영국군의 숫자가 1,200명이었으므로 거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당해버린 것인데, 심지어 대장이었던 제독 호프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영국 함대는 군함, 총포 등을 버리고 상하이로 도주했습니다. 서양 열강과 청나라가 싸운 결과로서는 정말 드물게 대승리를 거둔 셈입니다.


 물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이런 대패를 당하고 가만히 있는다면 자신들의 위신에 큰 타격이 가해질것은 자명합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세번째 원정군을 보내기로 하고 1860년 영국이 군함 173척, 병력 1만 8천여명, 프랑스가 군함 33척에 6,3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침공을 재개했습니다. 파머스턴 외무부 장관은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베이징을 공격, 점령해서 청국 황제를 몰아내고, 우리 전권대사를 그 곳에 주재시켜야 한다."



File

존.W.포스터(John W. Foster)

File

칼 마르크스(Karl Marx)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는 언론인인 포스터는 자신의 외교 평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이때 중국인의 입장은 학리상으로도 정당했으며, 영국의 제3차 원정은 부정한 논점에 의해 개시되었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중국 전쟁' 이라는 평론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습니다.


 "중국 당국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영국 외교 사절이 베이징으로 오는것이 아니라, 영국 군함이 백하의 바다를 떠나디며 경계하는 일이었다. 중국 당국은 브루스(영국 서기관)가 육로로 베이징으로 입경할 것을 요구했지, 군함의 호위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프랑스 공사에게 런던에 주재하는 권리를 인정할 때, 설마 프랑스 공사에게 프랑스 원정대가 템스 강에 침입할 권리까지 주지는 않을 것이다.……영국의 무장 원정대에 대한 중국인의 저항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차피 이러한 이야기는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 시각 영국과 프랑스의 군단은 4월에 주산 열도를 점령했고, 6월 말에 상하이에 도착했으며, 7월 30일에는 천진 근처까지 도착했습니다. 청나라 수비대는 천진을 도저히 지켜낼 수 없자, 천진을 버리고 후퇴했습니다. 영불 연합군은 천진을 점령했습니다. 당시 천진을 담당하는 주임이 된 파크스라는 인물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백인우월심 가진 인종차별주의자로, 중국인을 거의 벌레처럼 여겼습니다. 심지어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영국에서조차 파크스에게,


 "좀 더 온건하게 청국인을 대하라."


 라고 훈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청나라는 이미 굴복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마무리를 짓기 위하여 9월 17일 파크스가 통주로 왔을때,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청나라에서는 누구를 가릴 것 없이, 황제를 만나려면 삼궤구고두를 해야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하지만, 특사가 공사가 무릎을 꿇는것은 나라의 위신과도 관련이 있으니 불가능합니다. 미국 공사의 경우, 비준서 조약을 할때 국서를 흠차대신에게 맡기고, 흠차대신이 황제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그런 중재안을 거절했습니다. 파크스는 심지어 저쪽의 수석대표였던 이친왕 재원(載垣)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결국 모든 협상은 박살나서 원점으로 돌아갔고, 함풍제는 친정을 선언했습니다.


 "짐이 이제 친히 육사(六師)를 이끌고 즉시 통주로 가서, 짐의 군대로 오랑캐를 토벌하겠다."


 물론 함풍제의 친정 따위는 없었습니다. 함풍제는 곧바로 모든 일을 동생인 공친왕 혁흔(恭親王 奕訢)에게 맡겼고, 본인은 곧바로 열하를 향해 도주를 감행했습니다. 공친왕은 본래 대외강경론을 주장했는데, 정작 적이 가까이 오자 슬그머니 숨어버렸습니다.


공친왕 혁흔 


 황제는 후비와 측근을 거느리고 9월 22일 열하로 도주했고, 영불 연합군은 10월 초 무렵에 베이징성 서북쪽 10킬로미터 위치에 있는 원명원에 도달했습니다.


 원명원은 옹정제가 아버지 강희제 시절에 하사받은 폐원에 정원을 조성한 것으로, 건륭제 시절에 증축되었습니다. 이곳에는 황제의 수집품이 가득했으며, 아름다운 분수와 서화, 골동품, 귀중한 서적,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있었습니다. 실로 그 당시에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자 도서관이었을 테지만,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는 터무니 없이 무력했습니다.


 10월 6일부터 10월 9일에 걸쳐, 영불 연합군은 원명원을 철저하게 약탈했습니다. 가치 있는 보물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만일 너무나 커서 가지고 갈 수 없다면, 부셔버렸습니다. 남아서 후대에 전래되었다면, 실로 가치있는 세계의 보물이 될 도자기들은 단지 "운반하기 힘들다" 는 이유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산더미 같은 보물이 눈 앞에 있으니 베이징 입성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고, 특히 일요일이었던 10월 7일, 연합군의 장병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듯이 보물을 모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원명원의 재앙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던 파크스는 통주에서 귀환하는 도중 전쟁이 재개되어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후 파크스는 석방되었지만, 사이에 함께 포로가 되었던 연합군 장병 20명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영불 연합군이 원몀원까지 진격한 이후로 수맣은 약탈, 살인, 방화, 강간이 있었지만, 연합군은 "야만적인 학대"를 이유로 보복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원명원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영국 전권대사 엘긴의 결정이었습니다.


 "이것은 비교적 무고한 백성에게는 영향이 없고, 직접 책임이 있는 황제에게만 가해지는 징벌이다."


 실로 사려깊은 배려입니다. 아마 실제적인 목표는 약탈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데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명원은 3일 동안 불타올랐습니다. 그곳에는 강희제의 자취가 있었고, 공무에 지쳐 잠시 휴식을 취하던 옹정제의 기억이 있으며, 건륭시대의 화려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길은 그 모든 흔적을 회색 쟃빛으로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전권 대사이자 원명원 파괴에는 부정적인 의견이었던 그로 남작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무익하기도 하고, 동시에 위험하기도 한 이 보복 행위를 위해 엘긴과 협력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원명원의 궁전을 초토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그런 생각을 단념시키려고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 참가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몽토방 장군(연합군 프랑스 사령관)도 나와 같은 행동을 취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궁전을 삼키고 있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픕니다."


 원명원을 삼키초 있는 불꽃은 영국인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무자비한 약탈에는 프랑스 군대가 더 열성이었습니다. 그로 남작은 원명원을 삼키고 있는 불꽃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 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약탈 당하고 부서진 보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가슴이 아프지 않은 모양입니다.


 불꽃이 지나간 원명원과 마찬가지로, 이제 청나라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청나라는 병든 사자처럼 비참한 모습으로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각각 800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했는데, 이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의 번역을 담당하던 프랑스 신부인 들라마르라는 인물은, 프랑스어 문서에는 없던 "선교사의 토지 조차와 구입, 건축을 승인" 하는 항목을 슬쩍 중국어 문서에 끼어 넣었습니다. 명백한 사기였지만, 청나라는 무효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베이징 조약 5조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으로서 영국 식민지, 그 밖의 해외 여러 지방에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는 자가 이를 위해 영국 신민과 계약을 하거나, 이 조항에 해당하는 자와 그 가족이 청나라 개항장에 있는 영국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유라는 취지를 공포할 것."


 내용을 보자면, 그동안 청나라가 제한하던 자국민의 해외 이주를 풀어준 사례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의도는 그렇게 친절하진 않습니다. 당시 영국 등은 부족한 노동력을 해결하고자 광동이나 복건에서 끊임없이 인신매매를 저질렀고, 여러 중국인이 "저자(猪仔 돼지)" 라고 불리면서 실질적인 노예무역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싱가포르 등지에는 그런 팔려온 "돼지" 들을 몰아넣었던 집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조항은 이러한 노예무역을 포장하여 합법화 한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의 뒤에 숨어 편승했던 러시아 역시 한몫 챙기는데 성공했습니다. 처음 천진조약이 맺어질 당시러시아는 아이훈조약(愛琿條約)을 청나라와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길림성 관할이던 흑룡강 왼쪽 기슭의 땅을 러시아령으로 빼앗겼습니다. 러시아는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리우는 곳에 곧바로 1차 이민단을 보냈고, '동방의 지배자' 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청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던 1861년, 12월 무렵 증국번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라에 커다란 난리가 벌어진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우선 태평군을 진압하는 일입니다. 조정에서는 장쑤 성에 파견할 장수로 누가 적당한지 증국번에게 물어보았고, 증국번은 이에 대해 수천명을 뽑아 신속히 양쯔강 하류로 파견해 반란군 진압을 돕게 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추천했습니다.






 이홍장(李鴻章)의 이름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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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13.02.24 과연 패자는 비참한 것이군요,,
  • 작성자ksk45 | 작성시간 13.02.24 이렇게해서 증국번이 이홍장을 추천하게 되는 거였군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el5311 | 작성시간 13.02.24 지금까지있었다면 훌륭한 관광지가 됬을텐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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