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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89) ─ 메피스토텔레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3.02.26|조회수490 목록 댓글 0



 이홍장의 자는 점보(漸甫)이고, 호는 소전(少荃)이며, 1823년 1월 5일 안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4형제 중 둘째였고,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홍수전과는 달리 스물다섯의 나이에 간단하게 진사에 합격했고, 1847년에는 한림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증국번의 제자가 되었고, 아침저녁으로 증국번과 함께하면서 유가의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났을 무렵, 태평천국의 기의가 일어났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홍수전이 전중국의 절반을 유린할때, 마침 안휘성에 머물고 있던 이홍장은 순무에게 건의해 안휘의 병력을 직접 이끌고 두 개의 현을 장악하여 적의 병력지원을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이 일은 이홍장의 군사적 명성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1855년 1월 무렵의 일입니다.


 이 당시 안휘 순무는 이홍장을 추천하는 상서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휘관이었던 정괴사(鄭魁士)라는 인물이 이홍장의 명성을 꺼려했고, 이 일을 저지해 이홍장을 좌절시켰습니다. 게다가, 이홍장의 명성이 퍼지면서, 자연스레 온갖 괴이한 뜬소문도 퍼지면서 그를 괴롭혔고 사방에서 그를 욕해대었습니다. 이홍장은 고향에서 발 붙이고 사는게 힘들어졌고, 실제 권한이 거의 없는 이름뿐인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황망하게 시간만을 보내던 이홍장은, 1858년 무렵에 증국번이 군대를 이끌고 이동하자, 자신의 스승을 찾아와 알현하고 참모가 되었습니다. 이홍장은 증국번과, 그의 동생 증국전의 참모로 지내면서 경험을 쌓았고, 1860년 증국번은 이홍장을 조정에 추천했으나 승인받지 못했습니다. 증국번은 다시 한번 재차 이홍장을 추천했으나, 하필 그 당시 2차 아편전쟁으로 인해 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쳐버린 바람에 상소문은 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홍장은 이렇게 몇년이 지나도록 출세의 길을 막혀버렸습니다. 이홍장 본인도 한탄했지만, 그러나 증국번의 참모로서 경험을 쌓은것은 그에게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프레데릭 워드(Frederick Townsend Ward)


 한편 2차 아편전쟁의 광풍이 약간이나마 진정되었을 무렵, 공친왕은 태평천국을 진압하는데 서양 열강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열강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증국번을 비롯해서 흠차대신 원갑산(袁甲山), 왕유령(王有龄), 강소 순무 설환(薛焕) 등에게 공친왕의 자문 요청이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응은 각각 제각각이었습니다.


 원갑산은 서양 병력의 개입은 위험성이 있다며 무조건적인 반대를 주장해고, 설환은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를 이용하는것은 위험하니, 따로 병력을 조금 고용해 상하이 등의 수비에 도움을 좀 주게 하자는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증국번의 의견은 이러했습니다.


 "현재 중국은 극도의 곤경에 처해 있어, 외국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이롭지 않습니다. 그러니 토벌을 돕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에는 좋은 말로 답하되, 출병 일자는 되도록 지연시켜야 합니다. 대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 장교를 이용하여 반역자를 섬멸하는데 실질적인 효과를 보도록 해야 합니다."


 즉, 열강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이 문제에는 좋은 말로 답하는 대신, 실제로 열강의 군대가 움직이는일은 되는 대로 막아보고, 한편으로는 외국의 장교들을 초빙해서 실질직인 효과를 보자는 방안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증국번의 이 말을, 미래에 있을 양무운동(洋務運動)의 복선 정도로 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제안은 매우 정중하게 거절의사를 표시하면서, 동시에 신병을 교육시킬 서양 군관을 초빙했습니다. 이때 초빙된 사람이 프레데릭 워드입니다. 뉴욕 출신의 미국인이었던 워드는 미국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했지만, 장교로 근무하면서 범죄를 저질러 상하이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워드는 청나라 관원에게 인정받아 초빙되었고, 청나라 측의 요청으로 미 영사가 그의 범죄를 사면해주었습니다. 


 워드는 유럽인과 미국인 몇십명 정도, 그리고 중국인 수백명 가량을 모병하여 훈련시켰고, 쑤저우와 상하이 방면의 방어 나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체로 소수 부대가 다수를 격파한 경우가 많아서 상승군(常勝軍)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상승군의 모습


 
 이 무렵, 증국번의 상군은 증국전이 안칭의 태평군을 격멸시킨 일 때문에 기세를 상당히 타고 있었고, 이에 태평군은 이수성 등은 장쑤와 저장 성으로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장쑤성과 저장성은 중국의 조세 수입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고, 군수품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장쑤 성의 쑤저우와 저장 성의 항저우는 엄청난 중요성이 있었습니다.


 저장으로 진군한 이수성은 순조롭게 연전연승하여 닝보 등에 이어 항저우까지 점령했습니다. 이 과정에 적을 막던 저장 순무 왕유령은 이수성의 군대가 항저우를 포위하자 목을 메 자살했는데, 이수성은 왕유령의 장례를 예를 다해 치뤄주었습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증국번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쑤저우, 창저우, 항저우 등을 되찾고 지키라고 요구했고, 이에 증국번은 좌종당을 저장의 군사 책임자로 추천했습니다. 훗날 청나라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이 되는 좌종당은 1852년 이후 증국번의 상군을 지휘하면서 명성을 쌓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장쑤성이었습니다. 증국번은 장쑤성으로 파견한 인물로 이홍장을 추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군(淮軍)의 시작입니다. 이홍장은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회군을 모집했고, 그들을 안칭으로 데려온 후 증국번의 도움을 받아 군율과 군제를 제정하고, 무기와 군수품, 군량을 준비했습니다. 이홍장은 이어 근처에서 명성을 날리던 민단을 끌어들어 자신의 조직화 했습니다. 1862년 3월 무렵, 회군의 숫자는 8,000여명에 이르렀고 준비가 끝나자 이동하여 군대는 상하이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군은 4월 28일에 도착했씁니다.


 이 무렵, 상하이 부근의 상승군은 아직 완벽하게 편성되지는 못했습니다. 워든 이홍장이 도착하기 직전인 1862년 2월 무렵에 태평군 1만에게 포위당했다가 필사적으로 싸워 이들을 무찔렀는데, 이홍장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그의 지취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이전인 1월 20일 무렵, '천경' 에서 한 남자가 부리나케 나와 근처의 영국선박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사카 로버츠, 과거 홍수전을 가르쳤던 신부입니다. 홍수전을 '회개' 시키기 위해 난징으로 왔던 그는, 이제 몹시 분개해서 언론에 편지를 썻습니다.


 "나는 간왕(홍인간)에게 크게 속았다……홍수전은 미친 사람이다. 통치자로서 완전히 부적격자이며, 현재 어떤 조직화된 정부도 없는 상황이다."


 2월 무렵 로버츠는 상하이로 귀환했고, 노스차이나헤럴드(North China Herald) 지는 이사카 로버츠에 대해 "난징의 대주교 각하" 라던지, "지난날에는 가짜 디오게네스 였지만, 이제는 선교사들 사이에서 플라톤이 될 선교사" 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만약 로버츠가 그때 홍수전에게 세례를 내려주었다면, 그로 인해 홍수전이 무탈없은 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면, 지금 전중국의 절반을 휩쓰는 불꽃은 없었을 것이라는게 이유였습니다. 이 신문은 시적인 어조로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그가 불경죄와 살인 같은 광범위한 대재앙을 이끈 도화선에 처음 불을 댕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결국 자신이 불러낸 괴물로부터 도망쳤다. 마치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로부터 도망친 것처럼."


 이제는 선지자도, 예언자도, 예수의 동생도 아닌'괴물'이자 '메시스토텔레스'가 되어버린 홍수전을 피해 로버츠가 상하이에 귀환했을 무렵, 이수청은 상하이 외곽에서 새로운 태평군을 집결시켰습니다. 다시 한번 공세가 재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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